'일드'에 해당되는 글 12건

  1. 그래도, 살아간다 2 2011.11.25
  2. Q10 - 라소리가 나는 여자아이를 만났다 2010.12.28

그래도, 살아간다

from 티비를보다 2011. 11. 25. 23:41



    여자는 눈물이 쏟아질 거 같다. 나란히 앉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남자에게 이쪽을 보지 말라고 한다. 등을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자의 등에 손을 댄다. 보지 말아요. 그대로 있어요. 더이상 말하지 말아요. 남자는 망설이고 있다. 사랑하는 여자가 코앞에 있다. 여자와 남자는 오늘 헤어진다. 헤어지기로 한다. 여자가 남자의 가슴을 때린다. 내가 손을 흔들었잖아요. 자꾸 때린다. 저기요, 손 흔들고 있었잖아요. 흔들고 있잖아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무시하는 거예요? 남자는 망설인다. 여자를 안아야 할까. 안아도 될까. 남자는 평생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다. 여자가 흐느낀다. 남자가 여자를 안는다. 태어나서 처음 안아본 여자다. 이 여자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여자가 이제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음놓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오늘 헤어지기로 한 사람. 여자가 말한다. 사실은요. 아까부터 이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었어요. 남자는 이 여자가 눈물겹다. 남자는 이 세상에서 최고로 어색한 자세로 여자를 안고 있다. 여자는 이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간다>를 봤다. 정말 순식간에 이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출근길에 보고 일하면서 내내 여자와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남자의 엄마와 여자의 아빠도 생각했다. 남자의 친구가 남자의 여동생을 죽였다. 망치로. 망치를 휘두른 그 아이가 바로 여자의 오빠다. 여름날이었다. 연이 날고 있었고, 날은 무더웠다. 모두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공간에 있었다. 그 날, 여동생이 죽었고, 딸이 죽었다. 오빠가 여자아이를 죽였고, 아들이 살인자가 됐다. 가족들은 각자의 이유로 자기자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각자의 이유로 서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시간은 잘도 흘렀고, 가족들 모두 끔찍한 그 사건을 잊고 사는듯, 혹은 잊지 못하고 사는 듯 했지만 모두 잊지 않고 있었다. 상처는 시간의 겹에 따라 두텁게 쌓이고 있었다. 누군가 그 상처들을 헤집어 놓고 무너뜨려야 했다. 하지만 겁이 나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15년이 흘렀고,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혹은 일부러 피해자의 오빠와 가해자의 동생이 만났다. 두 사람은, 그리하여 두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건 무척 아프고 쓰라리고 죽을 것같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그동안은 살아 있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15년 전에는 결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두 가족은 하기 시작했다. 그건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고나서도 여운이 맴돌았다. 여자와 남자 생각때문에 계속 마음이 아팠다. 여자의 가족과 남자의 가족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이들이 나눠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렸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나 주문만 해놓고 먹지 못했던 탄두리 치킨과 빵, 일본식 함박스테이크와 밥, 남자가 여자에게 이건 개인적인 것이라며 내밀었던 컵라면, 여자의 여동생이 처음 요리한 맛이 없었던 카레, 여자의 아버지가 남자에게 가져온 과자, 남자의 엄마가 여자의 부모님에게 대접했던 국수와 수박, 남자와 여자가 함께 먹었던 라면, 여자의 가족이 딸들의 미래를 위해 따로 살기로 결심한 후 나눠먹었던 저녁 도시락과 미소된장국,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자의 오빠가 함께 먹었던 오므라이스, 여자와 남자가 헤어지기 전 마셨던 샴페인까지.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먹었던 음식들. 그 음식들을 나눠 먹으면서 그래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을 만들었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까 이런 드라마가 나온 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겨울을 맞으며 이 드라마를 겪은 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동안의 이야기이다. 15년간 지속되어온 한여름 혹은 한겨울 같은 이야기. 중간중간 울었다. 아끼는 사람을 만나면 꼭 권해주고 싶은 드라마다. 언니가 그래서 내게 권했겠지 생각하고 있다. 정말 좋았어요, 언니. 정말. 타블로가 이번에 낸 새 앨범 중 이런 가사가 있다. '내 불행의 반을 떼어가길 바래서 너의 반쪽이 된 건 아닌데.' 나로 인해 너의 불행이 줄어드는 일, 그걸 나의 또다른 행복이라 생각하는 거, 그게 사랑이라고, 사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레데모이키테유쿠.


,

(이 글, 스포일러 덩어리예요.)





    2010년 겨울, 이 드라마가 내게 와 주었다. 키자라 이즈미의 드라마는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내게 와 주었다고. 마지막 회를 보고,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매번 생각했다. 오늘 밤, 큐토에 관한 글을 쓰자.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어떤 장면들은 못 견디게 그리워 다시 들여다 보기도 했다. 헤이타가 큐토의 어금니를 누르고, '라 소리가 나는 여자아이를 만났다'고 나레이션 하는 장면. 큐토의 충전 모습을 한 쿠리코 선생님이 '충전하러 왔어요' 라고 축 늘어져 이야기하는 장면. 큐토가 '내일 보자'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담백하게 이별하는 큐토와 헤이타.

    그 중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바로 이 장면. 복도를 지나며 헤이타가 후지노에게 말한다. 큐토를 리셋하겠다고. 후지노가 말한다. 1년이 지나면 너의 머릿 속에 큐토의 기억은 사라질 거라고. 자신의 기억도. 우리는 그런 물질을 바르고 있다고. 헤이타가 말한다. 그럴 리가 없잖아. 큐토를 내가 잊을 리가 없잖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잖아. 그때서야 나는 이 드라마가 연애에 관한, 사랑에 관한 드라마라는 걸 알아차렸다. 바보같이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이건 연애가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나는 이야기. 열렬히 사랑하고, 그래서 후회하고, 그래서 행복해하고, 그러나 끝나게 되는, 그리하여 잊혀지게 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미래에서 온 로봇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는 사랑 이야기였다. 

   헤이타는 정말 기억을 잃었다. 큐토를 사랑했던 기억을 잃었다. 철탑 밑의 추억을 잃었고, 함께 손을 잡고 걷었던 한쪽 손의 감촉을 잃었다. 자신이 큐토가 평생 흘린 눈물을 가졌다는 사실도 잃었고, 자신이 큐토를 보냈다는 사실도 잃었다. 큐토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잃었다. 큐토에게 '라' 소리가 난다는 것도 잃었다. 큐토가 적어준 '세계'라는 글자도 잃었다. 모두 다 잃었다. 고작 1년이 지난 후에. 그럼에도 사랑했으므로, 아팠으므로 마음만은 남았다. 그래서 큐토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어떤 마음들이 덩달아 떠올랐다. 실제로 존재했었는지조차 가물거리지만 큐토라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늘 헤이타를 따라다녔다. 무언가를 볼 때면 그걸 큐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첫 출장에서 달에서 본 지구, 신혼여행에서 들었던 빙하가 녹는 소리, 아이들을 데려갔던 천년 된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빛.'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말하는 거지. 니가 사랑했던 게 맞다고. 1년 전에, 10년 전에, 50년 전에 니가 사랑했던 게 맞다고. 너는 그를 사랑했고, 그 시간들은 행복했으며, 그 사람은 끝났지만 너의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고. 그 사랑으로 인해, 그 이별로 인해 지금의 니가 있다고. 우리는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거라고. 그러니 그 기억들을 잊어도, 혹은 잃어도, 그 마음들은 잊지 말라고.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고. 2010년 겨울, 내게 와준 키자라 이즈미 작가님들이 이야기하신다. '큐토를 사랑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제 세 밤이 지나면 서른 둘이 된다. 곧 서른 둘이 될 나에게 온 '크리스마스의 기적'. 후지노, 이 드라마가 내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야. 쿠리코 선생님의 말이 맞다. 2010년에는, 아직 2010년의 세상에는, 기적이란 게 있다. 




    그리워서 어떡하지. 큐토. 헤이타. 쿠리코 선생님. 나는 헤이타가 용기있게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삭제 버튼을 누를 수가 없네. 아무래도 SD카드를 구입해야겠어. 구입해야겠어. 이번에도 고마웠어요, 키자라 이즈미 작가님들. 우리 또 언제 볼 수 있나요. 흑흑.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타아시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