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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박 - 3억엔보다 행복한 우리들 24 2008.02.18
  2. 안경 - 사색빙수 한 그릇 드실래요? 23 2007.11.27

   <수박>을 보게 된 건 순전히 마이앤트메리의 메리진 때문이다. 그가 홈페이지에 'すいか'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드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메리진은 <수박>의 주인공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오니기리를 맛나게 먹는 장면을 캡쳐해놓고선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어. 또 다른 바램이라면 봄,여름,가을,여름으로 계절이 돌아갔음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찾아본 2003년 일본에서 온 이 드라마. 초여름의 산들바람처럼 고요하고 시원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던 여름 드라마를 나는 겨울에 보았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부터 이 투박한 제목의 드라마가 너무너무 좋아져버렸다. 


   1983년 여름. 2000년이 도래하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한번씩들 꿈꾸었던 세기말. 시험에서 28점을 맞은 절망적인 하야카와는 쌍둥이 꼬맹이들을 만나 2000년의 멸망을 이야기하다 카레 냄새를 맡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 냄새. 이 세 사람은 그 날 이후 어쩌면 카레 냄새로 2000년을 그려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멸망하지 않은 2000년이 지나고 여전히 카레냄새 가득한 해피니스 산차에서 만난 세 사람 중의 두 사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운명에 이끌려 해피니스 산차에 머물게 된 네 여자이야기. 우리는 2000년의 카레를 꿈꾸지만, 그건 1983년부터 지속되어졌던 냄새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2003년의 일본, 냇물이 흐르고 그 곳에 맥주와 토마토를 담궈놓고, 빨간색 풍경은 바람이 불 때마다 딸랑거리고, 왕눈이 나무 아래에 물고기들이 살고, 바람이 불 때마다 끊임없이 망치질을 하는 바람개비 아저씨가 사는 꿈같은 하숙집이 있다는 이야기. 이 곳에 은행에 다니는 34살의 하야모토, 은행잔고 83엔으로 살아가는 성인 만화가 카메야마, 요리할 줄 모르게 생겼는데도 맛난 요리를 끼니 때마다 내놓는 이 하숙집의 주인인 시바모토, 39년간 이 하숙집에서 생활한 올드 미스 사키타니 교수까지 네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곤 하야카와의 은행 단짝 바바짱이 3억엔을 횡령한 이야기다.  


   이 드라마가 말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회, 바바짱의 입을 빌려 나온다. '하야카와가 사는 하숙집에 갔을 때 매실 장아찌를 보고 눈물이 나왔어. 아침 식사 후의 식기에 매실 장아찌 씨가 각각의 식기에 담겨져 있고 왠지 그것이 사랑스럽다고나 할까. 얌전하다고나 할까. 왠지 살아간다는 게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나왔어. 청소기 소리도 굉장히 오랜만이였어. 정원에 물을 주거나, 부엌에 가서 뭔가를 만들고, 그걸 모두 함께 먹고 말이야. 뭔가 그런 거 전부가 나에게는 없어. 그렇게 소중한 것을 단지 3억엔으로 인해 모두 잃어버렸어. '라고.

  3억엔의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걸 열개의 에피소드가 계속되는 동안 깨달게 되는 게지. 내 곁에 니가 있어줘서 다행이고,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어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거, 거기에 술 한 잔을 곁들이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 바보같은 나를 이해해줄 단 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드라마는 계속 알려준다. 천천히, 다정하게, 맛있게. 


   드라마 <수박>은 영화 <카모메 식당>과 <안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가 드라마를 보고 영감을 떠올려 두 영화를 만든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박>을 보면 <카모메 식당>과 <안경>의 시작점이 되는 부분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맛있는 쌀로 만든 오니기리를 맛있게 나누어 먹던 장면이라든가, 마지막 회 교수가 하숙집을 떠나 여행을 하겠다는 결심에 자신들도 당장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만화를 그려야 하고, 은행에 나가야 한다면서 만일 회사를 그만둔다면 남쪽의 섬에서 빙수를 팔면서 태평스런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장면들 말이다. 결국 <수박>의 일상 속 자그만 행복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스크린 속에 표현된 것이 영화 <카모메 식당>과 <안경>인 거다. <카모메 식당>과 <안경>에는 <수박>의 등장인물들은 물론이고 드라마 속에서 꿈꾸었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니까. 결국 드라마는 현실이고, 영화는 환상인걸까.

   뭐랄까. 나는 2003년에 만들어진 드라마 <수박>을 보면서 2008년에 행복했다. 하야카와는 한번도 오오토로를 먹지 못하고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오오토로가 어떤 맛인지 궁금하고,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소망했다. 그러던 어느날 숙명처럼 해피니스 산차에 들어가게 됐고 그곳에서 오오토로를 생전 처음 먹게 되었다. 하지만 하야카와는 오오토로를 맛 보았으나 비행기는 타지 않았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들이 지금 발 디디고 있는 땅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깨달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겨우' 34살의 여름을 맞이했고, 해피니스 산차에서 39년을 생활한 교수는 '이제서야' 길을 떠났다. 안에 있는 것도 배우는 것이 많지만, 밖에 있는 것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 이 드라마 이렇게 내게도 오다니. 나는 올해가 시작된 후로 <수박>을 떠올리면서 매번 감개무량했다.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전해져 온 이 작고 따뜻한 이야기에 나는 감동했다. 야금야금 아껴봤다. 이 감동이, 이 따뜻함이 내 마음 속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않도록. 나는 해피니스 산차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씩씩한 하야모토, 현명한 교수, 오버하지만 그만큼 귀여운 시바모토, 외롭지만 귀여운 카메야마? 뭐든 좋다. 나는 1회에서 정답을 얻었으니까. 1회에서 사키타니 교수는 카메야마가 통장잔고 83엔으로 살아가는 게 신기하다던 하야모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 이 세상에서 그런 여자가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 중이죠?
   - 예.
   - 그건 틀린 생각이예요. 여러가지 삶의 방식이 있어서 좋은 거예요.
   - 나같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 있어서 좋아.

   네. 당신도 나도. 우리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서 여러가지 삶의 방식이 생겨서 좋은 거예요. 그러니 우리 3억엔만큼 열심히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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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지 한 곳을 추천할께요. 일본 남쪽 바닷가의 작은 민박집이 있어요. 이름은 하마다. 아주 작은 간판만 붙여져 있으니 찾아가실 때 주의하셔야 해요. 공항에서 민박집까지 찾아가기 힘들지도 몰라요. 민박집 아저씨가 올려놓은 지도는 형편 없거든요. 쭉 가다가 이쯤에서 나와야하는데 슬슬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80M 더 가서 오른쪽, 이런 식의 지도예요. 이 따위의 지도를 가지고 하마다 민박집을 헤매지 않고 잘 찾아왔다면 당신은 여기에 머물 재능이 충분히 있는 거예요. 이 곳에 올 때 주의사항이 있어요. 이 곳은 복작복작한 바닷가 관광지가 아니예요. 이를테면 사색을 위한 여행지죠. 그러니까 큰 짐은 필요없어요. 아주 간단한 손가방 하나만 들고 오세요.

   한번 이상 손님에게 권하지 않는 조금은 무신경한 유지아저씨가 이 민박집의 주인이예요. 아저씨가 안내해주는 방은 깔끔할거예요. 흰색과 파란색의 커튼과 하얀색 시트로 덮여져 있는 매트리트 하나, 컵 안에 담겨져 있는 한 송이 캔디 장미 정도의 깔끔한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세요. 편안한 복장으로 나와서는 이제부터 사색을 시작하면 되요. 노을을 보고 사색을 하는 건 너무 간단한 사색법이구요. 하루종일 졸고 있는 것같은 에매랄드빛 봄 바다를 마주보고 앉아 옛 사람을 깊이 생각해서 추억한다던가, 예전의 일들을 떠올려봐요. 책도 읽지 말구요. 컴퓨터도 휴대폰도 안되요. 이 곳에서는 사색만 하는 거예요. 낚시를 하면서 사색을 해도 좋겠어요. 그냥 방파제에 걸터앉아 하는 사색도 좋겠어요. 빨간색 머플러를 뜨면서 하는 사색도 좋겠어요. 아, 이 곳에서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사색법은 봄이 되면 어김없이 하마다를 찾아오는 사쿠라 아줌마의 빙수를 먹으면서 사색을 하는 거예요. 사쿠라 아줌마. 이름부터 봄 내음새가 잔뜩 느껴지지요? 사쿠라 아줌마의 빙수에는 화려한 재료들이 들어가지 않고, 아줌마가 직접 달인 팥과 옛날식 빙수기계에서 쏟아져나오는 눈같은 얼음과 연유뿐이예요. 이 간단한 빙수를 투명한 그릇에 담아서 봄내음 물씬 풍기는 바다를 마주하고 사각사각 스푼으로 떠서 먹기 시작하면 행복해지고 아련해지고 그리워지는 어느 순간에 대한 사색이 자연스럽게 시작이 되요. 다 먹고 난 뒤에 돈으로 계산하려고 하지 마세요. 추억을 공유하는 거니깐 계산은 또 다른 추억으로 하는 거예요. 정성들여 종이접기한 사자라든지, 석양을 배경으로 한 만돌린 연주라든지 하는 정성이 들어간 것으로 계산해 주세요.

   이 곳은 그저 주인 아저씨가 차려주는 시원한 맥주를 곁들인 침이 꼴깍 넘어가는 바베큐 요리라든지 통통한 가재라든지 정갈한 아침밥을 먹으면서 행복해하고, 바닷가를 마주하며 사색을 하고, 아침이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쿠라 아줌마의 건강한 메르시 체조를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추억을 정리하기도 하고 새 삶을 다짐하기도 하는 그런 간단하지만 어려운 여행을 하는 곳이예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고 나른하고 슬프고 무언가가 그리워질 때 이 곳을 찾아주세요. 사색을 듬뿍하고 일상같은 이 여행이 질릴 때쯤이면 돌아가서 또 열심히 지내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하마다 민박집의 유지 아저씨가 매일 아침 밥상에 올려놓는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시큼한 매실 장아찌가 생각날 거예요. 하루의 부적, 하나를 먹으면 그날의 화를 피할 수 있다는 매실 장아찌를 먹지 않아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난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정도로 금새 그리워지는 그 곳이 바로 제가 오늘 추천하는 여행지예요.


   롯데 시네마 삼색영화제로 <안경>을 개봉 전에 먼저 봤습니다. 개막식이라고 감독님의 무대인사도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모메 식당>을 보고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분명 <안경>도 좋아하실거예요. <카모메 식당>에서 주먹밥을 정성스레 만들어주던 사치에가 이번에는 민박집의 손님으로 등장하구요. 그 주먹밥을 맛있게 먹어주었던 마사코가 이번에는 반대로 사치에에게 사색하는 빙수를 만들어 대접을 해요.

    이 영화,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줄곧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것을 입에 가져가 냠냠거리면서 먹는 장면들을 오랜시간 공들여서 보여줘요. 바베큐 그릴 위에 고기와 연근이 올려지고 입가에 기름이 묻고 구운 연근을 씹는 아삭한 소리하며, 가재를 손으로 뜯어서 포동포동한 살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장면하며, 정갈해보이는 아침상의 매실장아찌의 시큼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장면하며, 바닷가를 마주하고 커다란 맥주잔에 따라서 마시는 삿포로 맥주하며 영화를 보는 내내 얼마나 침이 고이던지요. 정말 저 바다가를 마주하고 맛난 맥주를 마시고 사색을 한다면 어떤 안주도 어떤 책이나 음악도 필요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빙수는 싫어한다면서 내내 까칠하게 굴던 타에코를 위해 바닷가 사색의 빙수를 사쿠라 아줌마가 만들어낼 때는 왜 그런지 눈물이 찔끔 나왔어요. 그리고 이 영화가 정말 좋다는 생각과 그러니까 영영 끝나지 말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맛있는 영화예요. 저는 아주 큰 스크린으로 봐서 그런지 그 예쁜 바닷가 구석구석을 마치 제가 직접 본 것 마냥 직접 그 바다를 마주하고 앉은 것 같았어요. 엉덩이를 털면 하얀 모래들이 후두두 떨어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요. 너무나 예쁜 풍경에 엉뚱하고 사람들이 등장하는 아주 맛있는 영화였어요. 정말 언젠가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꼭 하마다같은 곳이였음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모메 식당>에서처럼 <안경>에서도 감독은 한 특별한 장소를 찜해두고 그 곳에 대한 소소하고도 맛있는 이야기를 풀어냈어요. 봄이 되면 생각 날 영화가 한 편 추가된 것 같아요. 계절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영화를 보면서 그 계절을 시작한다는 것,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추운 겨울, 꾸벅꾸벅 조는 봄의 바다로 두시간동안 여행 한번 떠나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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