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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우스키핑 - 이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 3 2008.08.06
  2. 종신검시관과 CSI 2008.08.01
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을 한 군데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두 소녀, 언니와 동생, 그러니까 루스와 루실이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외로웠으므로 아주 늦게까지, 어둠이 꽁꽁 언 호수 위에 소리 없이 내려 앉을 때까지 빙글빙글 스케이트를 탔다. 같이 타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을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이 부분이다. 루스와 루실이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위에서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하는 생각들. 이건 정말이지 따'듯'한 문장이다.

p.49-50

   <하우스키핑>은 외로움에 관한 책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책에는 온갖 외로움들이 나열되어 있다. 외로움이란 편의점에 진열되어 있는 커피우유의 종류처럼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만큼 비슷비슷한 거 아닌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곳에는 열 개의 외로움이 있다.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 곳에는 백 개의 외로움이 있다. 외롭다는 것, 우리가 모두 한 가지씩 각자의 외로움을 지닌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외로움에 관한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그건 스케이트로 뒤로 가는 법을 배워야하는 것이고 한 발로 도는 법을 연습해야하는 것이다. 살을 에이는 차가운 바람을 얼굴로 맞기 좋아하는 사람이 더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안다. 불빛 하나가 위안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나는 안다.

   핑거본의 호수 아래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잠겨져 있다. 새까만 밤, 기차는 소리없이 추락했고 사람들은 호수 아래에서 잠들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평온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소를 짓고 있었을 거라고. 루스와 루실을 할머니집에 데려다 준 엄마도 호수 아래로 떨어졌다.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면서. 엄마는 웃고 있었을 거다. 눈물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채로. 외로움이 적은 사람은 호수의 도시, 겨울의 도시 핑거본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을, 파묻혀버릴지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을 무서워했다. 그들은 핑거본을 떠났다. 외로움이 아주 많은 사람도 그랬다. 그들도 기차가 매일 몇 번씩이나 소리없이 지나가는 호수 아래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핑거본에 영원히 머무르거나, 영원히 떠나거나. 당연하게도 핑거본에는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


   호수 아래의 세상을 생각해봤다. 호수 아래에도 외로운 사람들의 세상이 있다. 겨울이 시작되면, 호수물이 꽁꽁 얼기 시작하면 살을 에는 차가운 물에 얼굴이 바짝 닿는 사람들. 수면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불빛이 위로가 된다며 속삭일 사람들. 봄이 오고 빙판이 녹기 시작하면 그들은 호수 바닥에서 축제를 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갔어요. 이렇게 또 한 계절이 오고 있답니다. 댄스 파티. 아주 천천히 물살에 몸을 맡기는 춤을 추는. 상상해보면 그건 왠지 좀 슬픈 동작처럼 보일 것 같다. 그러면 호수 위의 이들에게까지 그 동작이, 그 기운이 전달될 것이다. 출렁이는 호수 밑바닥에 이는 흙탕물의 냄새까지. 핑거본은 '바람 속에서도 호수 냄새가 나고, 마시는 물에서도 호수 맛이 느껴지는' 곳이니까.

   이 소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한다) 읽어나가면 겨울을 만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눈이 지독하게 많이 내리는 호수의 도시 이야기는 꽤 매력적이다. 당장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많이도 내린다. 외로움도 많이도 내린다. 이 호수의 도시에서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 호수 아래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나 걱정해야 한다. (호수 아래에는 이미 많은 외로움이 있다) 결국 두 여자는 호수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핑거본을 떠났다. 그리고 덕분에 가끔 자신의 외로움을 어두운 창가에서 발견하는 사람이 생겼다.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낮 말고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안만 훤히 내비치는 밤의 창가에서 자신을 꼭 닮은 서늘하고도 따듯한 외로움을 발견하는 사람. 이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니까. 신기하게도 그런데도 자꾸만 따뜻해지는 이야기니까.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핑거본의 호수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살을 에는 적막한, 사람을 마비시키는 차가운 공기를 지독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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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과 CSI

from 티비를보다 2008. 8. 1. 23:06
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사실 난 <종신검시관>의 구라이시가 별로였다. 모두가 칭송해마지않는 그야말로 종신검시관, 구라이시였지만 내게는 독불장군이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이 책에는 8가지 사건들이 들어있다. 모두 종신검시관, 구라이시가 등장하는 단편들. 구라이시는 현장에 소리없이 쓰윽 나타나 단번에 사건의 진상을 알아차린다. 그는 길게 말하는 법이 없다. 이 사건은 자살이네. 이 사건은 타살이야. 이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지. 그는 사생활에서는 난잡하지만 일에서는 완벽하다. 완벽주의자. 실수는 절대 없다. 의미를 담고 일부러 실수하지 않는 한. 그는 독보적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질투하거나, 존경하거나 둘 중 하나다. 같이 일을 한다거나, 힘을 합치고 머리를 합쳐 사건을 처리해나간다기보다 혼자 완벽하게 쓰윽 둘러보곤 정답은 이것이야, 이렇게. 동료들 속에서 섞이지 않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사람, 나는 그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남은 땀을 뻘뻘흘리며 찾아내는 것을 뒷짐지고 쓰윽 둘러보면 정답불이 딩동 들어오는 사람. 나는 왠지 그가 미웠다. 구라이시, 당신은 너무 완벽하기만 해.

   모르겠다. 모두들 따뜻하다고 칭찬하는 책을 나만 왜 삐딱하게 읽어냈는지. 내 마음이 삐딱한건지. 늦은 밤, 꽉 막힌 동대문즈음의 버스 안에서 이 책을 마쳤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얼른 집에 가서 CSI를 보자고 생각했다. 모두가 협동해서 사건을 해결하고, 치명적인 실수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범죄들이 즐비하고,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상처받고,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이야기. 집에 돌아와 얼른 CSI 라스베가스 시즌 1의 첫회를 봤다. 라스베가스 이야기에 그렇게 열광했으면서 이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사건들과 처음으로 맞닥뜨렸는지 몰랐다. 나는 이제까지 최근 시즌만 봤으니까.

 
   시즌 1, 첫 번째 이야기에서 라스베가스팀은 동료를 잃는다. 시즌 1, 첫 번째 이야기에서 나중에 미결 사건으로 그리썸 반장과 소름끼치게 대적했던 범죄자와 마주한다. (이 특수분장사가 첫 번째 이야기에 용의자로 등장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그리썸 반장님은 훗날 일은 아무 것도 모르고 친절하게 '그리썸입니다' 인사하고)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 그리썸은 반장이 되고, 사라가 등장한다. 그리썸과 캐서린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먼저 그리썸의 이야기. 거짓말을 하는 것같은 용의자 때문에 오리무중인 워릭에게.
 
    

   워릭은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썸의 저 충고덕분에 워릭은 증거는 찾았지만 자신에 집중하는 바람에 끔찍한 실수를 해 버렸다. 그리고 이건 캐서린의 말. 캐서린은 엄마때문에 할 수 없이 지원했다는 이제 일을 시작한 홀리에게. 


   홀리는 그 날 죽었다. 첫 번째 사건도 해결 못한 채. 현장을 다시 찾은 강도의 총에 맞아서. 그녀는 첫 날이였지만 CSI답게 충분한 증거를 남겼고. 라스베가스팀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홀리의 죽음에 자책했다. 이게 내가 CSI를 좋아하는 이유다. 어떤 날은 통쾌하게 사건을 마무리짓고, 어떤 날의 사건은 미결로 남아 오랫동안 요원들을 괴롭히고,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범죄에 그들 또한 노출되고 아프고 힘들고 화내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성장할 수 있게 해 주는 힘. 그게 CSI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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