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경'에 해당되는 글 2건

  1. 그 사람만의 진실 2014.01.16
  2. 외출, 영화와 책 사이 6 2008.01.19

그 사람만의 진실

from 서재를쌓다 2014. 1. 16. 19:10

 

 

  

    어제 나는 홍대 벨로주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친구가 김형경 작가와의 만남에 당첨되었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갔다. 시작 시간에 거의 촉박해 도착했더니 앞자리가 비었다며 앞자리에 앉겠냐고 했다. 친구가 신나했다. 친구는 김형경을 정말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지만 앞자리 제일 중앙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냥 그런 거였다.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고, 앞자리에 앉자고 해서 앉은 것. 나는 끝나고 뭘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시원한 생맥주를 먹는 게 좋겠지. 뜨끈한 국물도 좋을텐데. 이런 생각 뿐이었다. 제일 앞자리의 중앙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7시 40분에 시작한 행사는 9시 30분 정도에 끝났다. 두 시간 여 진행된 행사. 임경선이 함께 나왔고, 초대된 여러 독자들의 고민들을 듣고 두 작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충고도 해주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마지막 질문은 내 옆에 앉은 남자였다. 자기는 얼마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너무 힘들어 작가님이 말씀하신대로 음주와 섹스로 이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고 했다. 김형경 작가가 말했다. 원나잇인가요? 남자가 무어라 말했고, 작가가 다시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충고는,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제일 좋은 건 그냥 그 슬픔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조용히 슬퍼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게 가장 현명한 치유방법이라고 했다. 옆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9시 30분 즈음에 내가 든 생각은 오늘 여기에, 벨로주에 잘 왔고, 앞자리에 앉아서 다행이었다는 것.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 중에 내가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작가들이 이야기해주는 답변에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어느 순간에는 종이를 꺼내고 펜을 꺼내 메모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진실'이 있다는 것.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고 말한 이유는 가만히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면 이해되지 않을 일은 없다는 것. 그러니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고, 그 사람만의 진실이 있다는 거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니까.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박해감'이라는 단어도 있었다. 그 누구도 친구가, 가족이 나를 공격하고 깔보려고 그 말을 한 건 아닐 거라는 거. 그걸 기분 나쁘게 듣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는 거다. 상대가 왜곡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박해감을 내면에서 정확하게 점검해야 진정한 극복이라는 말. 어떤 사람은 만나고, 어떤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할지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에는, 당연하지만 '시간과 열정을 낭비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소모적인' 사람과의 관계는 끊는다고 했다. 그랬다.

 

   김형경 작가는 신뢰가 가는 목소리 톤을 지녔다. 하는 이야기들도 모두 수긍이 갔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만 살 수 있다면 나는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화나는 일도 없고, 나를 자책하는 일도 없겠지만, 인간이므로 또 실수하고, 실망하고, 화를 낼 거다. 그러면 어렵겠지만 조용히 나를 돌아보고 어제의 말들을 떠올려 봐야지. 그럴 수 밖에 없다. 작가는 빙 둘러 이야기하는 걸 참지 못하고, 요점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답을 할 때도 다정한 목소리로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다. 친구도 질문을 하나 했다. 친구에게는 친한 친구에게 하듯이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지금처럼 행동하면 남자도 매력없어 한다 했다. 친구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모두가 우리의 문제다. 바꾸어야 한다고 했고, 지금도 충분히 이쁘다고 했다. 친구는 더더욱 김형경 작가에게 빠졌다. '그 사람만의 진실'을 마음에 새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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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신문을 뒤적거리다 <외출>이 금요일 MBC 주말의 영화인 걸 봤어요. <태왕사신기>의 성공적인 종영과 <무방비도시>의 개봉에 힘 입어 편성된 거 아닌가 혼자 생각하면서요. 2년 전 영화네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친구와 지금은 친구의 시누이가 되어버린 이와 함께였고, 영화를 보기 전에 명동에서 감자탕을 먹었고, 커피를 들고 컵홀더가 없던 2관에서 보았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허진호 감독의 영화라 보기 전부터 설레였고, 약간의 실망을 했지만 사람들 반응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섰지요.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면 처음에 보이지 않던 세세한 것들이 보여요. 일상적인 소품이나 사소한 배우의 표정, 스쳐 지나갔던 대사 하나. 오늘도 <외출>을 보면서 2년 전 극장에서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좋았던 장면들과 그 때는 놓쳤던 사소한 것들을 찾으면서 재밌게 봤어요. 역시 <외출>의 가장 큰 오점은 배용준이라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다시 봐도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았어요. 한 여자의 남편같지도 않고, 소주 잔을 입 안에 털어넣는 동작은 어찌나 완벽하던지요. 배의 식스팩이며. 배용준은 완벽해지려는 사람이라 이제 보통 사람의 역할은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만 확고하게 했지요.

   영화 <외출>이 개봉했을 때 김형경 작가의 소설 <외출>이 같이 출간되었어요. 영화를 촬영하는 것과 동시에 김형경 작가도 시나리오만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요. 기획성이 짙어서 별로 안 땡겼는데 김형경 작가가 썼다기에 영화를 보고 바로 구입해서 읽었어요. 괜찮았어요. 같은 이야기와 한 시나리오에서 나온 이야기니까 많은 부분이 겹쳤지만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다른 매체구나를 실감했었어요.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소설의 몇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봤어요.   


   "차 좀 세워주세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인수가 길가에 차를 세우자 서영은 황급히 차에서 내려 텅 빈 도로를 가로질러 건넜다. 벌판을 향하고 서서 속엣것을 올리듯 울음을 토해냈다. 단 한 번의 울음에도 내장이 달려 올라올 듯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자세가 더 나쁘다는 것을 서영은 웅크리고 앉은 다음에야 알았다. 그 자세는 오래도록, 깊이 울게 되기 좋은 자세였다.
외출, 김형경. p.73-74

    마지막에 인수의 아내가 깨어나고, 인수는 아내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아요. 그 남자 누구냐, 둘이 언제부터 만났냐, 나 속이면서 바람피니까 그렇게 좋았냐, 한 때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또렷하게 보며 차라리 죽지 그랬냐고 하던 사람이였는데. 그냥 인수는 이 말만 해요. '처음엔 궁금한 거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그렇게 되기 시작한 시작일 거예요. 저 장면.

   저는 이 장면이 참 좋았어요. 그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그랬어요. 여자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서 텅빈 도로 끝에서 엉엉 울어대던 장면이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일어섰겠죠. 남자는 그때까지 여자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테구요. 다시 운전하기 시작하는 창가에 어둠이 퍼렇게 내려 앉아있어요. 엉엉 울었고, 스스르 잠도 몰려오고, 저녁의 어스름이 눈 앞에 보이고, 이제 더 나쁠 건 없을 거라는 평온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예요. 사랑에 빠진 배우자를 대신해서 상갓집에 다녀온 여자의 울음과 남자의 담배. 감정을 다 토해내고 나서 찾아오는 침묵은 말할 수 없이 평온해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서영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식당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인수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영이 식당 출입문을 열고 나가 수족관 앞으로 걸어갈 때, 그제야 인수는 반쯤 풀린 눈빛인 채 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취한 몸보다 마음이 더 많이 흔들렸다.
외출, 김형경. p.98

    이 영화는 제게 손예진의 재발견이였죠. 이 배우, 예쁘고 새침하고 내숭떨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괜히 되지도 않는 질투하고 있었는데, 연기 잘하구나, 어쩌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지금은 그 생각이 <연애시대>를 거쳐서 완전히 굳어졌어요. 좋은 배우라고. 이 횟집 장면에서 손예진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하며, 정말 술 한 잔 하고 찍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은 그 취한 연기와 울먹이면서 이어가던 대사들에서 어찌나 사실감이 느껴지던지요. 진짜 같았어요. 진짜. 배우도 진짜. 술도 진짜. 서러움도 진짜. 맥주를 마시는 여자와 소주를 마시는 남자. 소주를 마시는 남자를 남겨두고 비틀거리며 맥주를 마시는 여자가 통유리 너머의 횟집 밖으로 나갔을 때, 남자처럼 여자인 제 마음도 흔들렸어요. 저런 여자라면.

    저는 <외출>의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았나봐요. 좋아하는 장면들도 죄다 여자가 크게 보이는 장면들이네요. 여자가 혼자 여관에서 병맥주를 시켜놓고 씨디피로 음악을 들으면서 마시는 그녀에겐 끔찍했던 그 시간도 기억에 오래 남구요. 남자가 '너무 멀리 왔나봐요'라며 뛰던 강변, 여자가 '죽이지 마세요'라며 화분을 건네던 병원. 오늘 본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억해둡니다. 어쩌다 세번째로 어딘가에서 <외출>을 보게 되면 오늘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도록.

   봄을 좋아한다던 여자와 눈을 좋아한다던 남자였어요. 어디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사랑은 스멀스멀 시작되는 건가봐요. 허진호의 사랑은 늘 그렇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사랑이 한 번 다녀간 뒤에도, 배우자의 불륜을 앞에 두고도요. 그래서 지독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행이기도 해요. 4월에 눈이 내리면 어딘가에서 사랑이 스멀스멀 시작되고 있다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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