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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서재를쌓다 2015. 3. 7. 10:13

     

     

        지난 크리스마스 밤, 잠실의 공연장에 있었다. 옥주현이 출연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뮤지컬을 보러 갔다. 동생이 표가 생겨 따라간 거였고, 별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보다 루이 16세가 궁금해졌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왕권이 짓밟힌 상황에서 그(들)의 도주 계획이 실패하고,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일과를 마친 루이 16세는 자신의 초라한 의자 위에 앉아 노래했다. 그냥 평범한 대장장이로 태어났으면 좋았다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고.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당할 때. 그녀는 의연하게 단수대로 올라갔다. 더이상의 노래나 대사는 없었다. 단수대에 누워 목을 대었고, 무대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게 물들었다.

     

       어쨌든 '그'가 궁금해진 나는 얼마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떠올랐다. 공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읽고 싶었고, 새해 나의 첫 책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이었던 페르센이 계획했던 루이 16세 일가 도주사건의 24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페르센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녀의 목숨을 꼭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루이 16세 일가를 프랑스 외곽으로 도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곳에서 그들은 망명을 할 수도 있고, 주변 국가들에게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고, 왕당파와 결합하여 다시 왕권을 굳건히 세울 수도 있다고 믿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 도주사건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책을 읽고 보니 이 모든 실패는 내가 뮤지컬을 보면서 측은해했던 루이 16세 때문이었다. 그는 때에 맞지 않는 질투를 했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고, 말도 안 되는 여유로움을 부리면서 이 도주계획을 완전히! 백퍼센트 망쳐놓았다. 설마, 설마, 이번에도? 싶을 때, 루이 16세는 그래, 그래 이번에도 내가, 이러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을지는 몰라도, 무능한 왕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총명했던 형이 죽으면서 그를 왕위에 올려 놓았다. '오직' 루이 16세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결정적인 요인을 한 것은 분명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직 왕실 안에서 곱게 보살펴진, 그래서 불운했던 왕비였지만, 혁명이 발발하고 현실에 직면하자 의연하고 단단해진다. 

     

       이건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문장들.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앙투아네트의 편지)

    - 74쪽

     

       애초에 앙투아네트는 용모가 단정하다기보다 그 훌륭한 자세와 우아하면서도 발랄한 태도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터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는 회화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쿠차르스키는 슬픔에 빠진, 젊음을 잃어가는 그녀의, 저녁노을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미완성의 이 초상화를 보면 앙투아네트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건 페르센의 마음 한구석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79~80쪽

     

       그런데 방에 있던 사람 모두가 왕의 한심스러움을 말없이 비난하고 있을 때, 긍지 높은 왕비는 놀라울 만큼 스스로를 억제했다. 초조해하고, 절망하고, 체념한 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그것은 신하가 왕을 경멸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결의였다. 왕권은 흔들림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려는 일념으로 표정도 온화함을 되찾고, 거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일 만큼 상냥한 태도로, 슈아죌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왕은 가족 때문에 하는 수없이 이러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유부단한 왕을 감쌌다.

        왕비의 의향이 충분히 신하들에게 전달되었음은, 신하들이 왕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왕비와 만나기 전까지는 왕당파조차 그녀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았다. '사치스럽고 교만하며 왕을 쥐고 흔드는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편견 섞인 이미지는 그렇게나 강렬한 것이었다. 만약 루이 16세가 선앙 루이 15세처럼 화려한 애첩이라도 데리고 있었더라면 정치에 대한 불평불만은 왕비가 아니라 그 애첩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외국인 왕비 앙투아네트는 떄로 자진해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됨으로써 왕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 283쪽

     

        흥미를 가지고 있는 소재라 그런지, 재미있게 읽혔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책이 말하는 바도 흥미로웠다. 이 도주에 성공했더라도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 페르센의 예상대로 프랑스의 왕권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거. 역사는 이미 이쪽으로 기울었고,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그게 다른 쪽으로 기우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성공했더라도 목숨을 건지고 오래 살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에서는 무심히 잊혀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의 극적인 죽음이 아직까지도 그들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은, 지도자는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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