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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극장에가다 2013. 3. 17. 20:36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 오늘밤부터 월요일까지 비가 온다고 했지. 올려다보니 비를 머금은 구름이 보였다. 월드컵경기장에서 나와 불광천을 따라 걸었다. 날은 흐리고, 걸으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어제 공연에서 들은 박경환의 새앨범을 틀어놓고 '새 길'을 걸었다. 처음 걸어보는 길이다.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라는 생각. 혜원이 아니라 해원이라 다행이다. 혜원은 여리고 예쁘기만 할 것 같은 느낌인데, 해원은 단단한 느낌이다. 튼튼한 느낌이다. 실제로 스크린을 통해 만난 해원이 그랬다. 예쁘고 단단한 사람.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될 해원을 생각하면, 왠지 안심이 되는 사람. 해원이 그랬다. 잠깐만 있어봐요. 괜찮아질 거예요. 거의 대부분의 슬픔이 그렇고, 거의 대부분의 아픔이 그렇다. 죽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내가 본 해원은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십여 분 넘게 불광천을 따라 걸으니 동네에 도착했다. 사실 극장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막걸리 생각이 났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해원은 남한산성을 걷는다. 그 전에 와서 걸었던 길보다 더 가본다. 해원은 지금 막 그와 또 한번의 이별을 했다. 숨이 차게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걷다, 전에 보았던 아저씨가 막걸리를 혼자 마시고 있는 걸 본다. 다가가 인사를 하고, 자기에게 술 한 잔만 줄 수 있냐고 한다. 아저씨는 그러라고 하고, 종이컵에 가득 막걸리를 따라준다. 해원은 새하얗고 투명한 두 손으로 막걸리를 쭈욱 들이킨다. 그리고 한 잔만 더 주시면 안되느냐고 한다. 아저씨는 아가씨 잘 마시네, 하면서 한 잔 더 따라준다. 해원은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양팔을 길게 뻗고 커다랗게 숨을 쉰다. 한숨이 아니라, 커다란 숨이다. 아, 이제 살 것 같다,는 그런 숨. 그 시간, 남한산성 어딘가에 있는 깃발에 바람이 불었을 거다. 예지원의 말대로, 깃발이 있어 바람이 보인다. 그 깃발이 말해준다. 그래, 별 거 없어. 잠깐만 있어봐. 괜찮아 질 거야.

     

        영화를 먼저 본 친구가 말했다. 해원이가 만난 남자들 다 너무 찌질하지 않냐고. 그래, 그러네. 그 말을 듣고 보니 다 그러네. 교수님도, 그 남자선배도. 그러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사람들도 그랬네. 별 거 없는 사람들이었네. 그렇게 보니 우리도 그러네. 우리도 별 거 없이, 찌질했지. 현명하지 못하고. 단단하지 못하고. 그랬네. 해원이가, 이제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그 미국 교수가 해원에게 좋은 사람일까. 친구의 그 사람이 친구에게 좋은 사람일까. 그 사람이 내게 좋은 사람일까.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들이 이제,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잠깐만 있어봐, 괜찮아 질 거야, 라고 말해줄 사람. 해원은 정말 이쁘더라.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결국 동네에서 서울생막걸리 한 병과 번데기 통조림을 샀다. 물잔에 한 잔을 따르고 해원처럼 쭈욱 마셨다. 한 잔을 더 따르고 쭈욱 마셨다. 그리고 커다란 숨을 쉬었다. 걷다 보니, 봄이 왔더라. 영화를 보고 나니, 봄에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 남한산성에 가는 일, 사직동 그 가게에 가는 일, 잼통을 커피잔으로 쓸 수 있게 코바늘 뜨개질을 배우는 일. 결국 모든 게 꿈이었을까. 걸으면서 생각했다. 꿈이여도 좋다. 그 꿈 또한, 그녀니까. 내게도 잊지 못하는 어떤 꿈들이 있는데, 그 꿈들은 나 같다. 그래서 슬플 때가 많다. 깃발이 있어야 바람이 보이는 것처럼. 그 꿈이 있어 내가 보인다. 8시 35분, 비가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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