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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부천, 반딧불 언덕에서
    극장에가다 2012. 7. 25. 22:17

     

     

     

        올해는 부천영화제에 다녀왔다. 지난 토요일. 딱 한 편만 보고 바로 올라왔지만, 대만족. <반딧불 언덕에서>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영화는 두 시였고, Y언니랑 만화박물관에서 두 시 즈음 보기로 했다. 부천까지는 머니까 여행하는 기분으로 가자. 기분 좋을만한 책도 골랐다. 이걸 전철에서 다 읽어버리자며 룰루랄라 챙겨두었지만, 토요일 나는 늦잠을 자고, 늦게 준비를 시작하고, 동생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어 보여서 짜장 컵라면에 신김치를 곁들여 한 컵 해치우고 나섰다. 당연히 늦었다. 여유있게 책을 읽으며 여행하는 기분을 내기는 커녕 조마조마해서 자리가 났는데도 앉지도 못하고 서서 계속 발만 동동 구르면서 지하철 네비게이션 앱 검색만 해댔다. 그 앱에 의하면 나는 1시 53분에 부개역에 도착한다. 거기서 버스로 10분 거리라니까,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 2시 조금 넘어 도착하겠지. 영화제에서 10분까지는 들여보내줬었나, 아니다. 아예 시작하면 안 보내줬었나. Y언니랑 조마조마한 메세지들을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송내역. 거기에 택시승강장이 있다고 해서 내렸는데, 택시 타려는 사람들 줄도 길고, 택시를 타니 엄청 막히고.

     

        Y언니는 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예 안 들어올까봐 걱정했단다. 언니는 나를 잘 아는 거지. 사실 진짜 그러려고 했거든. 2시 10분쯤 도착해서 완전 뛰어서 상영관 도착. 다행히 들여보내준다! 대신 자봉아이가 안내해주는 자리에만 앉을 수 있단다. 상영관 안은 아주아주 깜깜해서 한 치 앞의 계단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자봉 '남자'아이가 제 손을 잡으세요, 한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를 안내해준다. 내가 넘어질 거 같으면 더 손을 꽉 잡아주고, 발을 못 디디고 있으면 한 계단만 더요, 바로 지금 계단이요, 이제 다 왔어요, 한다. 아, 친절한 남자'아이'. 그렇게 어렵게 보게 된 <반딧불 언덕에서>. 불빛이 너무 환해서 방해될까봐 핸드폰도 못 꺼냈다. 그래서 Y언니에게 들어와 보고 있다는 문자도 못 보냈는데, 언니는 영화가 계속 될수록 걱정했단다. 이 좋은 걸, 이 아이가 못 보고 있으면 어떡하지, 하고. 나도 같은 상영관에서 언니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이 좋은 걸 놓치지 않고 보아서.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이 영화, 정말 좋다, 라고.

     

        영화에도 내내 여름이었다. 옛날 우리의 시골같은 풍경이 영화 내내 펼쳐진다. 댐이 들어서기 직전 어느 일본의 산골 마을. 반딧불이 별처럼 반짝이는 그 곳으로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한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짧지만 깊은 우정도 만들어가고, 함께 다이빙도 하고, 함께 수영도 하고, 함께 달리기도 하고, 함께 목구멍이 뻥하고 뚫릴만큼 시원한 냇물을 벌컥벌컥 들이키키도 하고, 그 냇물 위에 동동 띄워놓은 토마토를 한 입 깨물어 먹기도 하고, 마을의 마지막 축제를 위한 등을 만들기도 하고, 불꽃놀이도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도는 이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사한다. 사요나라. 짧지만 길었던 나의 여름방학아, 안녕. 마지막 엔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것만 빼면 영화는 정말 좋았다. 나도 이번 여름에 저렇게 인사를 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벅차고 서운한 마음을 가득 담아서, 안녕, 올 여름아. 내년에는 오질 않을, 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단 하나 뿐인 올 여름아, 안녕. 그렇게 인사할 수 있으려면 지금쯤 뭔가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하고 있어야 하는데. 쩝.

     

        언니와 나는 부천으로 갈 때와는 달리, 여유롭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서울로 왔다. 시내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와 현대백화점에서 화장실에 들르고,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하나씩 사들고 좌석버스를 탔다. 정말 쾌적하고 안락한 좌석버스였다. 파주의 이천이백번 버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맥주집을 검색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 날 맥주를 마시면서 한 얘기 중 제일 많이 한 건, 오늘의 영화가 얼마나 좋았는지. 언니는 이 영화가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베스트 2라고 했다. 내게는 몇 위쯤 되나 점수를 매겨보려고 해도,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은 왠지 기억에 남는 게 그리 많지가 않다. 어쩜 내게는 베스트 1인지도 모름. 올 여름에는 반딧불을 보아도 좋겠는데.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더라도 한 마리 혹은 일곱 마리 정도여도 충분할 텐데. 아, 맞다. 연필도 샀다! 취미가 영화제 연필 모으는 건데, 지난 부산이랑 전주에는 연필이 벌써 다 팔렸거나 아예 만들질 않아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구입 완료. 아, 정말 짧지만 알찬 부천 여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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