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천십이년, 그리고 서른셋
    모퉁이다방 2012. 1. 1. 21:18

       무슨날 챙기는 거 뻔하지만 먹는 거는 꼭 챙겨야 한다는 문자친구의 말에 시장에 가서 굴 오천원치와 가래떡 삼천원치를 사왔다. 멸치랑 다시마 넣고 국물을 내고 굴과 떡을 넣었다. 멸치액젓 한 숟갈 넣고 계란을 풀어 넣었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마지막에 파 송송 썰어 넣고 맛있게 냠냠. 한 살이 더해졌다. 이제, 서른셋. 외로움이 쓰나미처럼, 아니 메뚜기떼처럼 오는 나이. 술자리에서 낄낄대면서 이야기하던 그 나이가 되었다. 떡국을 먹고 동네에 새로 생긴 이디아 커피집에서 산 라떼를 마시면서 케이블에서 연속으로 해주는 하이킥을 봤다. 드디어 지석이 하선에게 고백을 했다. 이제 더이상 늦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뒤였다. 새해가 되는 시간에. 사실은 박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아아, 내일 꼭 챙겨봐야지. 

        십이월에 영화를 좀 많이 봤다. 좋은 영화들이 떼지어 개봉했다. 어느 날 일요일에는 혼자 광화문에 나가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셨다. 끝나고는 택시를 타고 이태원에 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아주 추운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Y언니를 만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봤다. 이 영화는 올해 내게 최고의 영화. 보는 내내 미소가 절로 났다. 서서히 눈물이 차 오르는 영화였다. 기적을 대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자세에 무한한 박수를. 이 영화를 보면서 화산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그 손가락을 허공에 댄다. 그걸로 오늘 재가 날리는구나, 오늘은 재가 안 날리는구나 안다. 그런 도시에서 기적을 바라며 사는 아이들이 있다. Y언니와 나는 영화를 보고 샤브샤브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조용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2011년 마지막 날에는 M을 만나 <메리와 맥스>를 봤다. 십이월이었지만 그리 춥지 않은 오후였다. 호주에 사는 메리와 미국에 사는 맥스는 우연한 기회에 펜팔 친구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담긴 사진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초콜렛을, 자신들의 삶을 공유한다. 메리는 8살이고, 맥스는 44살이다. 메리는 궁금한 것 투성이다.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사랑은 어떤 감정인지. 맥스는 두렵고 불만 투성이다. 사랑이 두렵고,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거리에 그냥 버리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이 친구가 되었다. 22년 동안. 그들은 그동안 무언가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서로로 인해 기쁘기도 하고, 절망스러워지기도 한다. 어느 날, 맥스는 화가 나 타자기에 있는 M을 빼내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그것만 넣어 보낸다. 영화의 마지막, 맥스는 다시 편지를 보낸다. 너를 용서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겉봉투에는 'ary'이라고 씌여 있었다. 내 옆자리에 있던 이도 M이었다. 그렇게 2012년이 왔다.

       십이월에 읽었던 책 중에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읽었던 구절. "한마디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강이뼈가 뚝하고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2011년의 나는 여전히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을 이어갔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는 사람도 생겼다. 어떤 날은 기뻤고, 어떤 날은 행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슬펐고, 외로웠고, 우울했다. 그래서 좀더 많은 책을, 좀더 많은 영화를, 좀더 많은 음악을 찾으려 했다. 어떤 책은 실망스러웠지만, 어떤 책은 내 인생의 책이 되었다. 어떤 영화는 내 삶을 0.00000000001% 변화시키기도 했다.  <비기너스>에서처럼 2012년에는 나도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꿈꿔 보겠다. 이건 이완 맥그리거처럼 정리해 본 나의 서른 둘, 2011년. 


    2011년의 커피.

    2011년의 봄.

    2011년의 길상사.

    2011년의 영수증.

    2011년의 와인.

    2011년의 택배.

    2011년의 맥주.

    2011년의 빙수.

    2011년의 음악.

     
    2011년의 밤.

    2011년의 바다.

    2011년의 딸기.

    2011년의 아침.

    2011년의 외로움.

    2011년의 기차.

    2011년의 결혼식.

    2011년의 하늘.

    2011년의 산책.

    2011년의 아이스크림.

    2011년의 햇살.

    2011년의 드라마.

    2011년의 눈.

    그리고 2011년의 시.

    산다
    다니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려보는 것
    재채기하는 것
    당신의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륨
    그것은 요한 슈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아름다운 모든 것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감춰진 악을 주의 깊게 막아내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태아의 첫울음이 울린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병사가 다친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이 흘러가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새가 날갯짓 한다는 것
    바다가 일렁인다는 것
    달팽이가 기어간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당신의 손의 온기
    생명이라는 것

    .
    .

    살아 있다는 것. 단순하고 행복한 삶. 어느새 2012년이 왔다. 아자아자 화이팅. 새해 복, 많이 받자아.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