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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퉁이다방 2012. 4. 15. 15:25

      

        살아가면서 막연하게나마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데, 불과 작년 말까지만 해도 이런 소설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원래 다 그래요. 그냥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정된 눈들의 이미지가 떠올랐을 뿐이에요. 거기에 팔을 내밀어 허공에 매달린 그 눈을 만져보는 소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럼 그 이야기에 대해서 써볼까고 생각한 게 결국에는 <원더보이>가 됐습니다.

     

       처음에 제가 생각했던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며칠 정신없이 쓰다보니까 이런 소설이 나왔어요. 쓰는 게 하도 즐거워서 더 쓰고 싶었는데, 곧 잡지가 나와야 한다고 해서 그만 여기서 멈췄습니다. 다음에는 마지막까지 다 써서 왕창 실을지도 몰라요. 마음 같아서는. 연재를 시작하는 마음만은 꼭 그렇네요.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럴 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서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저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외롭지도 않구요. 연재를 시작하면서 앞으로 써나갈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먼저 내미는 따뜻한 손 같은 게 됐으면 좋겠다고 바란답니다.

     

        멀리 지구 바깥에서 바라보면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사람도,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숙인 사람도, 끝이 없이 텅 빈 우주공간 속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들 같아 보이겠죠. 뭐라고 해도 이건 멋진 여행일 수밖에 없어요. 누구나 사랑은 할 테니까요. 우리는 다소 최소한 한 번은 사랑하는 사람과 우주 최고의 여행을 한 거예요. 이게 제가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랍니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 좀더 쓰고 싶네요.

     

    - <원더보이> 연재를 시작하며, 김연수.

     

     

        일을 하지 않았던 때. 집과 도서관을 주로 오고갔을 때가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도서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집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케이블에서 해 주는 옛날에 본 영화를 다시 보기도 하고, 요리를 하고, 학교에 간 동생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돈이 생기면 그 돈을 쪼개 동네 고기집에서 술을 마셨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을 쪼개 화분을 사던 때가 있었다. 매일 동네 꽃집 앞의 화분들을 구경하던 때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노원이며 건대에 있는 극장에 조조영화를 보러 가던 때가 있었다. 차비가 아까워 청량리까지 걸어가던 때도 있었다. 그때 나는 분명 가난했었는데, 가난하지 않았다. 그때도, 나는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풍요로웠던 시간들이었다.

     

        '연재를 시작하며'는 잡지 <풋> 2008년 봄호에 있던 글. 수납장과 벽 사이에 끼여져 있었는데, 오늘 청소를 하다 발견했다. 그 사이 벌써 네 번의 봄이 지나갔다. 네 번의 봄이 지나고, 다시 만난 2008년의 봄.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따뜻한 손이 되었다. 겨울이 길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동안, <원더보이>를 읽었고, 그 전에는 작가님을 만났다. 싸인을 받을 때 내 나이를 적어달라고 했더니 작가님은 벌써 이렇게나 되었냐고 했다. 그 밤, 나는 내가 가난하지 않았던 시절, 작가님을 만나러 일산이며, 남산이며, 혜화동이며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내가 걸었던 그 길들이 생각났다. 그 길들이 그 밤, 내게 따뜻한 손이 되어주었다.

     

        다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동안, 따뜻한 손들을 많이 만났다. 어느 날에는 혼자서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고, 어느 날에는 혼자서 <건축학 개론>을 보았다. <흔히 있는 기적>도 이번 주말에 마쳤다. 커피소년 공연에도 다녀왔고, 효자동에서 맥주도 마셨다. 술을 마시고 넘어지기도 했고, 지하철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일요일 아침에 <비포선라이즈>를 다시 보았고, <언 에듀케이션>이라는 영화도 무척 좋았다. <울분>이라는 소설도 읽었고, <화성의 인류학자>라는 인문서적도 읽었다. 친구와 함께 버스커버스커 앨범을 사고, 하늘색 반팔 티셔츠도 하나씩 샀다. 새 운동화를 신고 어린이 대공원 동물원에 갔고, 머리 염색도 했다. 몇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언젠가 주문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2주 넘게 착실하게 도시락을 싸 다니고 있다. 새 도시락통을 샀고, 매일밤 반찬을 만들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샤워하기 전에 취사 버튼을 눌러 매일 새로 한 밥을 먹었다. 양배추와 참치를 함께 볶으면 맛있는 반찬이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서른 셋,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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