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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조로 - 조승우
    무대를보다 2011. 11. 13. 22:09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정확하게 기억하질 못하겠지만, 10월의 어느날 내가 한 시인을 만났던 것만은 분명하다. 홍대의 어느 카페에서였다. 시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작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해맑게 웃었다. 소년처럼. 시인에게는 덧니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웃을 때 덧니가 보였다. 어, 웃는다 싶으면 덧니가 보였다. 시인은 그날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는 나는 다 기억하지 못하고 딱 하나만 기억하고 있다.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시인이 말했다. 평소의 자신과 시를 쓸 때의 자신은 조금 다른 사람 같다고. 시를 쓸 때는 평소보다 더 발전된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더 용기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기억력이 나쁜 나는, 시인의 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0월이었지만 춥지 않았던 홍대에서의 일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는 동안 11월이 되었다. 11월의 주말, '마침내' 추워졌다. 나는 생선을 굽고 된장국을 끓여 늦은 점심을 챙겨먹고 조승우의 공연을 보러 갔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사람이 하나의 무대를 통해, 하나의 작품을 통해 성장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여러 감정으로 복잡해진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동안 뭐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무대 위에서 본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주말에 그냥 뒹굴기는 싫어 큰 맘 먹고 결제한 공연. 처음 조회해볼 때만 해도 자리가 없었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다는 마음으로 몇 번 조회하다 보니 어느 순간, 좌석이 와르르 나오더라. 냉큼 결제. 태릉입구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한강진역까지 갔다.

        아주 긴 공연이었다. <빌리 엘리어트>도 이만큼 길었던 것 같은데 사실 <조로>는 중간 중간 아, 길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복되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는 느낌. 이야기 구조도 단순하다. 좀더 깊게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대신 유머코드가 많다. 조승우의 익살스런 대사들이 끊이질 않는다. 진짜 많이 웃었다. 볼거리가 많은 무대였다. 조승우는 이번 무대에서 완전 액션배우. 내 그의 무대를 두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춤은 잘 추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춤 많이 춘다. 상체도 많이 드러내고. 재밌었다. 고민하다 결제한 공연비가 아깝지는 않았지만, 뭔가 조금은 아쉬운 무대였다. 물론 조승우는 완벽했다. 커튼콜 때 관객들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정말 대단했다. 중간에 대사 중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라는 대사가 있는데 이번 무대가 그에게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육체적 소모가 많은 작품이었다. 이제 공연 초반인데 마지막까지 체력이 받쳐줄까 걱정되기도 했다. 앙상블도 최고다. 밤볼레아 요 넘버 최고임. 정말 신나서 앉아서 이 노래를 듣는 게 좀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두 일어서서 엉덩이 정도는 들썩여줘야 할 것 같은 느낌. 아, 조승우 최고다. 진짜 멋지다.

       <조로>를 보면서, 가면 뒤에서 정의롭고 용맹스런 조로를 보면서, 10월의 홍대에서 시인이 말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6호선을 타고 태릉입구까지 와서 7호선을 갈아탈 때까지 내내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디에고는 피치 못할 상황이었지만 조로의 가면을 쓰면서 그 전과 다른 용맹스럽고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 물론 그건 디에고의 내면 깊숙이 있었던 거다. 그것이 조로의 가면을 씀으로써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도 그러한 거라고 생각한다. 11월부터 어떤 수업을 듣고 있는데, 그 수업의 선생님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내면의 나를 끌어올리는 일. 11월의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생각할 작정이다.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생각했다. 조승우의 <맨 오브 라만차>를 놓친 일에 대해. 그의 돈키호테를 꼭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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