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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요나라 사요나라 - 이 소설에는 자갈소리가 난다
    서재를쌓다 2009. 7. 6. 23:32

       
    밀려있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여름을 싫어하는 나지만, 집에 콕 처박혀 있길 좋아하는 나지만, 어쩐 일인지 유월이 마무리되는 시점부터 칠월이 시작되는 시간들까지 많이 돌아다녔다. 게으른 내 기준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요 저질 체력때문에 자꾸만 집에만 들어오면 바로 눕게 된다. 금방 골아떨어지고. 오늘은 몇 자라도 꼭 남겨야지, 하는 마음에. 요시다 슈이치 책 이야기. 


    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노블마인

     

       벌써 5월의 일이다. 신림의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 날 지하철을 잘못 타서 좀 늦었고, 표를 받기로 한 사람에게 미안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좀 놀랐다. (아무튼. 요시다 슈이치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다, 그를 만났다.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벗겨진 머리가 저렇게 깔끔할 수 있다니, 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사실 5월의 일이라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 날 나는 세 문장을 다이어리에 넣어뒀는데, 하나는 '장소도 성장해간다'. 두 번째는 '일상 속의 에피소드를 겹치는 것이 소설', 세 번째는 '물, 수영'이라는 단어.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수영을 좋아하는 요시다씨.

        친구가 이 책을 선물해줬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이 소설에는 자갈 소리가 난다. 정말 그렇다. 노오란 표지에 귀를 가만히 대고 있으면, 찌는듯한 여름날 햇볕에 바짝 말려진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나는 이 자갈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런 설정을 한 요시다씨가 더욱 좋아졌다. 이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때가, 막 더워지기 시작한 여름날 아침이었는데, 지하철을 갈아타는데 숨이 콱콱 막혔다. 비로소, 여름이구나. 2호선을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왔다. 창 밖으로는 여름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주 근사한 아침이었다. 나의 환경과 소설 속의 환경이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 그리고 요시다씨의 섬세한, 아주 디테일한 묘사들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싱크대 창문을 여는데, 식용유병이 놓여 있어 팔을 비틀어 열었다는 식의 표현들이 참 좋았다. 별 거 아닐 수도 있는 건데, 그냥 뭔가 진짜 같았다. 이 여름도, 이 소설도, 나도, 이 더위도 모두 진짜 같았다. 그리고 자그작자그작, 또 한 차례의 자갈 소리.

       친구랑 맥주를 마시면서 이 소설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요시다씨가 더 좋아졌다는 말을 했다. 친구와 나는 5월의 그 날, 신림의 극장에서 나란히 앉아 요시다씨를 만나고, 나란히 줄을 서고 기다려 사인도 받았다. 친구는 이 소설이 꼭 영화같이 자꾸만 '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이 소설이 일본에서 꼭 영화로 만들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필리핀 맥주를 마셨고, 친구는 미국 맥주를 마셨다. 한 병씩을 비운 뒤에는, 한국 맥주를 마셔댔다. 그 밤, 맥주를 마시면서, 그를 만나고 온 날의 이야기도 했고, 다른 밤의 이야기도 했고,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도 나눴다. 행복한 밤이었는데, 헤어질 때 친구에게 사요나라 사요나라, 라는 인사말이라도 해 줄 걸 그랬다. 한 번 하면 정이 없고, 두 번 하면 애틋하다. 어떤 말이든. 사요나라 사요나라. 

        소설에는 반전이 있는데, 반전이 있다는 말이 스포일러가 될 만큼. 소설을 읽다보면 그 반전이 뭔지 금새 알게 된다. 그러니 어쩌면 그 반전이 시시하다 생각될 수도 있는데, 나는 그 반전을 눈치채게 되었을 때부터 마음이 아팠다. 자갈 소리, 여름날의 뜨거운 온천, 다리 위, 이 모든 것이 위태위태하다. 자갈 위에 뿌린 차가운 물도, 온천의 뜨거운 증기도 모두 곧 증발해져버릴 것만 같다. 다리 위의 너도 곧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러니까 편안하다. 이제 '나'는 늘 위태롭고 불안해야 하니까. 요시다의 소설이 늘 그렇듯이 이 소설 또한 '사건'에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일이 있기 전의 나, 그 일을 저지른 순간의 나, 그 일이 있은 후의 나. 이건 자그작자그작 자갈소리가 들리는 슬픈 소설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을 떠올릴 때면 자꾸만 영화 <유레루>가 떠올랐다. <유레루> 속 다리 위. 그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사건들, 그들의 감정들, 눈빛들, 뒷모습.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유레루>의 감독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라면 자그작자그작 자갈소리며, 다리 위에 가만히 서 있었던 그녀의, 그의 마음이며, 마지막 사요나라, 사요나라라는 마지막 인사까지 잘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유레루>의 음악도 좋았는데, 마지막에 울려퍼졌던 그 주제곡. 집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나. 그녀라면 <사요나라, 사요나라>에 맞는 좋은 음악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왠지 다음 여름에도 이 소설이 생각날 것 같다. 왠지. 햇볕에 잘 말려진 자갈밭 위로 커다란 차가 덜커덩거리며 지나가고, 자그작자그작 어디선가 자갈소리가 들려오면 슌페이와 가나코가 떠오를 거다. 슌페이, 가나코, 사요나라,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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