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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첼, 결혼하다 - 내 친언니의 결혼식
    극장에가다 2009. 3. 14. 21:11


        다른 제목을 붙여본다면 '내 친언니의 결혼식'이랄까(갑자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보고싶어진다는). 영화제목의 레이첼은 앤 헤서웨이가 아니다. 앤이 맡은 배역명은 킴. 킴의 언니 이름이 레이첼이다. 영화는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서 치료받던 킴이 친언니의 결혼식을 맞이하여 집에 돌아와, 결혼식을 치르기까지의 이야기'랄까. 이렇게 요약해버리면 김이 팍 새버릴 정도로, 줄거리는 별 게 없다. 특별히 극적인 사건이랄 것도 없다. 많은 가족이 그렇듯, 킴의 가족도 평생 잊지 못하는 상처 하나쯤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야기. 어느순간 그 아픈 상처를 누군가 툭 건드려 오열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품었던 사소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울다 지쳐 잠들고, '그러면' 늘 그렇듯 아침이 오니까. 가족이니까.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덤덤하고 조금은 어색한, 그렇지만 실은 따스한 풍경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엉엉 울었다. (고백은 무슨. 맨날 우는 거 다 말했으면서) 눈물을 훔치느라 손이 얼굴을 떠날 새가 없었다. 관객도 얼마 없었던 극장이었고,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나 혼자 그렇게 엉엉 울었다. 내 옆에 누군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놓고 (단 소리내지는 않고, 어금니 꽈악) 엉엉 울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 원래 같이 보려고 했지만 '내'가 먼저 배신해버린 이에게 문자를 보내 '이건 자매가 있는 사람은 엉엉 울 수밖에 없는 영화예요', 라고 말했다. 걸레를 집어던지며 싸움 한 번쯤 해 본 자매라면, 한 톨밖에 안 되는 좁은 방에서 등 돌리고 씩씩거리며 잠이 든 다음 날 사과문자 하나로 어색함을 풀어버리는 자매라면, 이 영화를 보고 울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엔 그렇다.

       영화에는 킴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들이 몇 번 나온다. 재활원에서 아버지의 차를 타고 돌아올 때도 있었고, 중독자 모임이 끝난 뒤 자전거를 타고 혼자 돌아올 때도 있었다. 언니와 싸우고, 엄마와 뺨을 한 대씩 교환하고, 커다란 나무에 차를 처박았던 다음 날도 그랬다. 그 장면들에서 영화는 꽤 길게 킴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차들이 지나가길 기다린 뒤, 킴은 길을 건넌다. 넓디 넓은 정원을 지나 모두가 축제 분위기로 결혼식 준비 중인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 그 장면들은 지금의 날씨와 닮았다. 어디선가 봤는데 (누가 말해주었던 건지도 모른다). 봄이 싫은 이유가, 너무 갑자기 환해지기 때문이라고. 서서히 환해지는 게 아니라, 어두침침했던 세상이 갑자기 내장이 다 비칠 정도로 환해지기 때문에 나의 적나라한 치부가 드러나는 느낌이라고. 그래서 봄이 싫다고. 킴이 그랬을 거다. 나는 킴이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긴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딘가의 (누군가의) 그 말을 생각했다. 킴이 있었던 세상은 겨울이었는데, 이 도로만 건너면 화려한 꽃들이 만발하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봄인 거다.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킴은 건너고, 그래서 심통이 나고, 행복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고, 너무나 행복한 언니에게 질투가 나고, 깊은 겨울의 상처에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똑같은 상처를 공유했기 때문에, 오열하며 괴로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들도 엉엉 운다. 너만 힘든 줄 알아? 언니도 울고. 애들아, 제발 그만해. 아빠도 7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다. 니가 구했어야지! 영화 내내 냉정한 얼굴로 침착함을 유지하던 엄마 데브라 윙거도 결국 이성을 잃는다. 그건 누구도 평생동안 잊지 못할 상처이기 때문에, 언제고 또 다시 돋아날 자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또 묻어주고, 괜찮은 척 지내는 수밖에. 또 누군가 그 상처를 툭하고 건드리면, 다시 싸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바락바락 고함지르며, 엉엉 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오듯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를 외치는 수밖에 없다. 봄이 오고 아침이 오는 순간에는 겨울을 잃었다는, 밤이 가버렸다는 아쉬움에 쓸쓸해지지만, 곧 그 밝음에 익숙해질 테니까. 마지막 엔딩 씬의 햇살이 가득한 봄, 아니 아침의 풍경 가운데 있는 레이첼의 뒷모습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괜찮을 거예요. 킴을 부탁해요. 아침의 풍경 속에서 재활원으로 떠나는 킴에게도. 다행이야. 아침에 떠나서. 밤이 아니라서. 그러니까 넌 이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너도 행복해질 거야. 네게도 봄이 찾아올 거야. 힘내. 정말, 킴이 그렇게 차를 타고 스크린을 떠나 세상에 나와 잘, 아주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엔딩 크레딧이 떴다. 앤 해세웨이. 짝짝짝. 언니 역할 배우의 보조개와 커다란 미소는 어찌나 탐스러운지. 그녀가 너무 예뻐서, 행복해보여서 나도 킴처럼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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