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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술 - 술 한 잔도 안 마시고 취하고 싶은 날
    극장에가다 2009. 3. 8. 17:38

     
       <낮술>을 마시고 취해 버렸다. 아니, <낮술>을 보고 취해 버렸다. 술 한 잔도 안 마시고 취하고 싶은 날,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영화의 초반. 주인공 혁진은 실연을 당한 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선으로 여행을 가자는 약속을 한다. 아니, 약속을 당한다. 왜 의례 술자리의 여행 약속이 그렇지 않나. 가자, 가자. 꼭 가는 거다. 그러고 술 깨면 땡. 바쁘니깐, 돈이 없으니깐, 너무 머니까. 그런데 이 정직한 혁진만이 약속을 지킨다. 강원도 정선까지 가서야 그 약속이 그냥 입바른 소리였다는 걸 알게 된다. 참 융통성 없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 융통성 없음은 영화의 끝까지 쭉 이어진다. 

        그렇게 혼자 정선으로 간 혁진은 끼니를 때우러 들어간 식당에서 낮술을 한 잔을 한다. 처음처럼이었나? 소주 뚜껑을 따는 소리. 그리고 그 소주를 소주잔에 꼴꼴꼴 부어넣는 소리. 캬. 이 때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따끈한 국물에 소주 한 잔. 저거 한 잔 하면 방금 전까지 열 받았던 감정들이 다 누그러지겠지. 캬캬. 그리고 이어진 팬션에서의 하룻밤. 아니, 이틀밤이었나? 아무튼 혼자 티비보면서 마시는 소주. 약간 맛 없어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뭐. 여기까지는 소주 맛이 달았다. 커플과의 동석으로 마시게 된 노래방의 맥주까지. 그 뒤부터는 주인공의 속도 뒤집어지고, 보는 내 속도 뒤집어지는 거다. 주인공이 속이 안 좋아서 못 마시겠다고 거절하면 옆 사람은 한 잔만 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면 나도 속으로 외치는 거지. 걔 지금 속 무지 안 좋다고! 그만 먹이라고! 끝까지 거절 못한 주인공이 또 한 잔을 입 안으로 털어넣으면, 읔. 그 술이 마치 내 몸 속을 타고 들어가는 듯 속이 쓰리다. 쓰려.
     
        얼마나 웃었는지. 정말 깔깔거리면서 웃어댔다. 나는 이런 유머가 좋다. 찌질한 사람이 찌질한 짓을 하는 유머.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게 꼭 나같은 순간이 있다. 그럼 그 찌찔한 사람이 측은해지는 거지. 주인공 혁진의 그 찌찔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혁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여행도 물거품. 친구가 소개해 준 펜션에서 구워먹는 고기의 꿈도 물거품. 고마운 미모의 옆방녀와의 로맨스도 물거품(이 부분에서 쯧쯧. 혀 차는 소리를 추임새로 넣어줘야 한다). 트럭을 얻어타고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서울로 올라가는 것도 물거품. 그림같은 펜션에서의 편안한 휴식도 물거품. 인어공주도 아니면서 물거품에 물거품이다. 단 한번도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 이 영화와 홍상수의 영화가 다른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상수 영화도 찌질한 주인공에 찌질한 짓거리를 하지만, 어느 한 순간만큼은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시키지 않나. 대부분 여자들과의 잠자리에서 그랬지만.

        아무튼 요즘 볼 영화가 많아서 신나고, 본 영화들이 대부분 좋아서 신났다. 아. 예외도 있었다. <인터내셔널>은 기대를 했었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스릴감 제로의 본 시리즈 느낌이랄까? <낮술>에서는 거의 모든 캐릭터가 웃겼다. 하이쿠녀가 단연 최고였지만. 아마도 남자한테 크게 혹은 작게 데인 뒤에 하이쿠를 읊으면서 십원짜리 욕을 한 이력이 많은 여자일 거다. 아. 이 영화와 함께 씨네21의 김연수가 쓴 <낮술>관련 칼럼을 함께 읽어줘야 한다. 왜냐. 재밌으니깐. 흐흐- 아. 봄에는 술 좀 자제해야지. 봄에는 꽃이며 공기며 볼 게 많아지니까. 아니다. 그러면 또 그 분위기에 취해 더 마시게 될라나. 술 마시는 사람에겐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가 많다. 뭐든 대기만 하면 이유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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