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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볼루셔너리 로드 - 아저씨, 프랭크, 유키오, 나
    극장에가다 2009. 3. 2. 00:04


       한 주 늦게 씨네21을 샀다. 691호. 김연수의 칼럼을 읽기 위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동네 서점에 지난주 여분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영화잡지를 읽으며 외출을 했다. 대학로에서 약속이 있었다. 간만에 버스를 탈려고 하니 대학로로 가는 버스 번호가 기억나질 않았다. 약속시간에 이미 늦었는데, 272인지 262인지 가물가물하고. 종로라고 적혀져 있는 팻말을 보고 무작정 탔다. 버스 안에서 노선표를 보니 잘못 탄 거였다. 272를 탔었어야 했다. 노선표를 보고 동대문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기로 결심했다. 마침 자리도 났고, 엠피쓰리로 음악을 들으면서 기분좋게 잡지를 읽었다. 아. 김연수 칼럼은 정말 깔깔대며 읽었다. 

       한참을 있다 고개를 드니 버스가 익숙한 도로를 지나 낯선 거리로 들어서더라. 아뿔싸. 이미 한 번 시간을 미룬 약속이었는데, 더 늦어버렸다. 근처 지하철역이 있는 곳에서 무작정 내렸다. 양원역이었다. 생전 처음 와본 역. 게다가 중앙선. 중앙선을 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내가 아닌 외곽의 중앙선은 무척이나 한산하다. 열차도 늦게 오고. 다급한 마음에 십여분이 넘게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 양원역을 끝에서 끝까지 걷고 걸었다.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 나는 허탕질만 하고 있는 거다.

       십여분 뒤에 들어오는 열차를 타고 회기역에서 내렸다. 회기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동대문에서 내렸다. 동대문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대학로에 도착했다. 그렇게 뻘질을 하는 사이 지하철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잡지를 읽었다. 거기에 며칠 전에 본 <레볼루셔너리 로드> 관련 기사가 있었다. Must See. 그리고 이 구절.

        원작에는 없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있다. 에이프릴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올 때, 거기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바람만 분다. 바람이 에이프릴의 치맛자락을 흔들어놓고, 그녀는 허리를 펴고 멍하니 서 있다. 이 순간을 포착하는 로저 디킨스의 촬영은 숨이 멎을 정도다. 대사 한마디 없이, 카메라는 배우와 풍경을 담아내는 것만으로 그 순간 그녀의 어지러운 영혼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녀는 그때부터 파리를 꿈꾸기 시작한다. "여기 머물러 있을 수도, 여길 떠날 수도 없어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 p.32

       기사 속 그 장면을 기억한다. 미국 중산층의 교외, 그림같은 집이 즐비한 동네. 그 곳 중 한 집에서 에이프릴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다. 아무도 없는 텅빈 거리를 잠시동안 가만히 서서 바라본다. 그래,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흔들렸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그 날부터 그녀는 달라진다. 꿈을 가지게 된 것이다. '허무하고 희망이 없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곳에서의 행복을 꿈꾼다. 그 꿈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해진다. 그녀는 꿈꾼다. '허무하고 희망이 없는' 삶이 아니라, '새롭고 희망찬' 삶을.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열정적인 삶을. 꿈많고 활기넘쳤던 젊은시절의 그들로의 회기를.

        동생은 영화가 너무 현실적이라 별로였다고 했지만, 나는 이 영화가 지극히 현실적이라 눈물이 났다. 한때 격렬히 서로를 동경하며 사랑했던 여자와 남자는 부부가 된다. 그 때, 두 사람은 분명 특별한 이들이었다. 여자는 배우를 꿈꿨고, 남자는 전 세계를 떠돌며 인생의 매 순간을 맛보는 삶을 꿈꿨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동경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그러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며, 현실에 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꿈꾸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월급을 받으며 지금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사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휠러 부부로 정평이 나 있는 것. 그들은 때때로 그들을 찾아오는 허무하고 허전한 공허감을 그런 안정적인 삶에서 위안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불행하고, 때때로 행복하며, 때때로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이는 출근길의 평범한 가장과, 그를 배웅하고 아기자기한 집안일을 이어나가는 주부가 된 것이다. 그 날의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 날, 바람이 불었고, 에이프릴은 결심한다. 다시 특별했던 시절로 돌아가기로. 잃었전(혹은 잊었던) 꿈을 되찾기로. 에이프릴은 프랭크를 설득하고, 프랭크에게도 바람이 분다. 두 사람의 그런 꿈을 제대로 알아준 건 한때 정신병원에 있었던 존뿐이었다. 그는 지금의 삶을 '허무하고 희망이 없는'이라고 표현한 그들 부부의 말에 진심으로 동조한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파리로의 꿈을 포기한다는 프랭크에 말에 비웃으며, 분노한다. 존은 다 똑같다고 느꼈을 거다. 비루한 삶을 대단히 만족스러운 척 살아가는 너희들. 실은 괜찮지 않으면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다고 개폼잡는 너희들. 니네들 다 거짓말이잖아. 내가 다 아는데. 뻥쟁이들. 폼쟁이들. 내숭덩어리들. 이건 존이 내게 던지는 말인지도.

        이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케이트 윈슬렛 때문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아주 길고, 아주 높은 평균대에 올라선 사람같다. 양팔을 꼿꼿하게 올리고 발 끝에 힘을 꽉 주고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 자세는 무척 안정적이나(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나)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곧 추락할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모습. 그래서 그녀를 보고 있는 관객인 내가 자꾸만 눈물이 고이는. 고백하자면 나는 오래 전부터 그녀를 동경해왔다. <타이타닉>때 뱃머리 위에서부터 나는 그녀의 팬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최고다. 그녀의 주름살도,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등 근육도, 타들어가고 있는 담배를 쥐고 있는 손끝도. 아름답고 슬프다. 

        영화를 본 다음날에 교보로 달려갔다. 신간코너에서 <레볼루셔너리 로드> 책을 샀다. 표지에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살포시 놓여져 있었다. Must See 기사에 의하면 소설은 걸작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꼭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요즘 만화책 <BECK>을 읽고 있는데, <벡>은 평범했던 한 소년이 밴드를 시작하고 진정한 음악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이 <벡>에서 <레볼루셔너리 로드>와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의 출근길의 풍경. 디카프리오는 자동차를 타고 역까지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고 시내로 출근을 한다. 기차의 문이 열리고 우루루 쏟아지는 프랭크와 그와 똑같은 차람의 사람들.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똑같은 모양의 가방을 들고, 또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똑같은 스타일의 양복을 입고, 약속이라도 한 듯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이 카메라 앞으로 걸어나온다. 카메라를 벗어난 이들은 비슷하게 생긴 네모난 직장으로 출근해 일을 하고, 똑같은 모습과 표정 그대로 퇴근길의 기차를 탄다. 물론 프랭크가 파리로의 꿈을 가지고 난 후부터 그는 그들과 달라졌다. 표정과 몸짓이 가벼워졌다. 


       <벡>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여자친구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준 유키오는 똑같은 표정의 중년의 남자들이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새 무난하게 지내기 위해 억지로 남들에게 나 자신을 맞추는 인간이 된 건지도 몰라. 남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야. 그리고 텅빈 거리로 뛰어나온 유키오는 집으로 돌아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작곡한다. 물론 그 곡은 완벽하게 훌륭하진 않았지만, 좀 더 다듬으면 꽤 괜찮은 곡이 될 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게 소년은 성장해간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벡>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꿈.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고 계속 이 단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꿈. 꿈. 꿈. 며칠 전에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서 울고 있는 아저씨를 봤다. 한쪽 손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는데, 아저씨의 눈이 금새 빨개지더니 어느새 촉촉해지는 거다. 그건 영화 속 마지막 출근길에 눈가가 촉촉해지던 프랭크의 눈물과 닮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렵고 혼란스러운 나약한 눈물. 나는 아저씨를 훔쳐봤다. 아저씨는 눈물이 그치지 않는지 조용히 그리고 자주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아저씨의 발 옆에는 커다란 종이가방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 속에 약통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울고 있는 아저씨 앞에 서서, 아저씨를 조용히 훔쳐보면서 여러 생각들을 떠올렸다. 아저씨, 프랭크, 유키오, 나. 그렇게 우리 모두 위태위태로운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걸어가고 있다. 그 위에 놓여져 있는 꿈, 절망, 열정, 포기. 다시 꿈. 그 길 위에 또 뭐가 놓여져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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