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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진 하루 - 아주 사랑스런 남자를 만나고 왔다
    극장에가다 2008. 9. 27. 16:10



       전도연이 나온 '영화' 중에 보고 실망했던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나는 <접속>을 사랑하고, 고등학교 때 <약속>을 극장에서 보고 엉엉 울었다. <내 마음의 풍금>을 보면서 전도연의 동안과 연기력에 감탄했고, <해피엔드>를 보고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는 좋아하는 장면들이 아주 많다. <스캔들>도 좋았고, <인어공주>는 말할 필요도 없지. 이 영화는 나와 내 친구를 많이 울게 만들었다. <너는 내 운명>도 나름 좋았다. 아, <피도 눈물도 없이>랑 <밀양>은 아직 못 봤다. 그렇지만 전도연은 '영화' 보는 눈이 좋으니깐, <멋진 하루>를 보고 확실히 그렇게 믿기로 했으니까, 못 본 두 영화도 분명 좋을 거다. 

        사실 전도연이 나오는 영화니까, 그리고 이윤기 감독 영화니까 보러 간 거다. 하정우는 글쎄, 좋은 배우라는 건 알지만 그 때문에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말은 못 하겠다. 그런데 <멋진 하루>는 하정우 영화였다. 올해 본 영화 중에서(많이는 못 봤다)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 캐릭터상이라는 걸 주는 시상식이 있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하정우에게 줄 거다. 응. 정말 그럴 거다. 

        원작 소설이라는 게 있다는데, 영화를 본 날 아침 뉴스에서 전도연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는데, 전도연이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는 망설였는데 시나리오를 보니까 원작 소설 생각이 안 나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로 말한 걸로 보아 왠지 그 틀만 따온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 1년 전에 헤어진 남자를 찾아가 예전에 빌려줬던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 남자와 하루종일 돌아다닌다는 이야기. 골프를 치고 있던 여사장(회장이었나?)에게 100만원, 술집 여자에게 70만원, 우연히 만난 아는 동생에게 10만원, 그런 식으로 350만원을 채워가는 이야기. 그러다 아침의 여자의 마음이 밤에 조금 달라졌다는 이야기.

       나이가 들면 눈물만 많아진다고 나는 요즘 잘 운다. 이건 내가 여러 번 말했겠지만, 아주 잘 운다. <텐텐>을 보고도 울었고, <멋진 하루>를 보고도 울었다. 아, 미리 말하지만 <멋진 하루>는 아주 유쾌한 영화다. 유머러스해서 많은 부분에서 관객들을 웃게 만든다. 이윤기 감독 영화 봤나,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발랄하고 유쾌한 영화였다. 내가 울음을 터뜨린 부분은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 울었던 부분보다 조금 빠른 시점이었다. 전도연은 지하철 안에서 결국 울어 버렸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좀 시니컬하고 차가운 면이 많은 사람으로 나오니까 엉엉 운 건 아니다. 그냥 조금 울었다. 하정우가 효도르 이야기를 한 후였다. "내가 좀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 때 꿈에 효도르가 나와서 한국말로 그러는거야. 너 괜찮아? 너 정말 괜찮아? 그러는데 이상하게 그 말을 들으니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이런 식의 대사였다. 나는 좀 뜨금없는 이 대사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이건 스텝 중에 누군가가 직접 겪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맞았다. 감독의 경험담이었다. 

        영화의 시작을 보고 영화 <돈 컴 노킹>을 생각했다. 그 영화에서 나는 잊지 못할 장면과 마주했는데, 아주 오래 전 옛 연인을 술집에서 목소리만 듣고 알아차리는 중년 여자의 표정때문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마치 오래 전 두 사람이 사랑하던 그 시절의 어느 한 순간으로 돌아가는 놀라운 표정을 여자는 짧은 순간 짓는다. 전도연은 사람이 많은 경마장에서 하정우를 그렇게 찾아냈다. 물론 <돈 컴 노킹>에서처럼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은 아니었고, 짜증과 이제서야 찾았다는 안도감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하정우는 여자 관계도 복잡하고, 싫은 소리를 들어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옆에서 쉬지 않고 쫑알쫑알 수다를 떨고, 허풍을 떠는 캐릭터다. 영화의 첫 부분에 350만원을 지금 달라는 전도연에게 자기 지금 그만큼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전도연이 돈도 없는 사람이 경마장을 다니냐고 타박한다. 그 때 하정우가 하는 말이 기수가 말을 타고 바람같이 달리는 모습이 정말 좋아서 경마장에 온다는 거다. 돈을 따려는 게 아니고. 그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전도연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하정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캐릭터냐 하면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정말 그 말을 믿게 된다. 정말 돈을 따려는 게 아니라, 예전의 꿈이었던 말을 탄 기수의 모습이 좋아서 보러 간 거였구나, 그런 사람이구나, 믿게 되는 거다. 이 사람, 좋은 사람이구나, 진짜구나, 라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울어버린 건 그 타이밍이었다. 이 사람이 진짜라는 걸 처음 느끼게 된 순간. 사촌형을 만나고 나오는 순간. 이건 영화를 보면 안다. 

        이윤기 감독의 인터뷰를 봤다. 마지막 대답이 너무 인상적이여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감독은 이 영화에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가 좋았구나, 생각했다. 나는 이 영화가 꼭 성공했음 좋겠다. 오늘 동생은 무대인사가 있는 상영시간에 맞춰 예매를 하고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데이트 하는 동생, 생일파티에 가는 동생 덕분에 나는 또 주말에 혼자 집에 남겨졌지만, 뭐 괜찮다. 좋은 영화가 있고, 이렇게 그 기억을 쓰고 있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가을이 왔으니깐. 애인따위, 약속따위 없어도 주말이 견딜만 하다. 

        이건 이윤기 감독의 인터뷰 중 마지막 답변이다. 내가 좋아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한 음악을 썼고(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내가 좋아하는 동네를 담았고(로케이션 장소의 70퍼센트가 감독이 사는 용산구), 내가 좋아하는 길을 담았고(두모개길과 남산 순환로), 내가 잊고 싶지 않은 곳들을 남겼고(낡았지만 아름다운 아파트와 철도 건널목, 비좁은 골목), 내가 좋아하는 이종격투기 선수 얘기를 했고(표도르로 둔갑한 효도르), 내가 좋아하는 이름을 붙였고(희수와 병운은 모두 감독의 지인. 특히 故 조병운은 이제껏 모든 작품에 등장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캐릭터에 담았고(감독의 친구, 인척들), 내가 좋아하는 술집(이태원 사케집)을 대사에 넣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따뜻하고 영화다운 영화.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름 재미있게 따라간 영화. 관객이 공감하고, 공감하는 만큼 판타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영화. 가벼운 도피처가 되어주는 영화. <멋진 하루>는 병운이라는 좀 덩치 큰 팅커벨을 통한 현실적인 판타지다." 

       이 홍보 사진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꼭 두 사람이 많이 사랑했을 때 그 때의 사진같다. 어제 김혜순 시인이 그런 말을 한 것과 같이. 낮이 오고, 밤이 오고, 사랑이 오고, 이별이 오니, 팔, 다리를 가졌으니 당신은 내게 도망을 가고. 어쩜 이렇게 표정이 좋은지. 전도연은 영화 내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과거와 재회하는데, 그 장면들이 꽤 좋았다. 나는 요즘 막내동생에게서 내 과거의 모습을 마주하곤 하는데, 그건 좀 슬프다. 마음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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