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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크 나이트 - 그는 최고의 조커다, 틀림없이
    극장에가다 2008. 7. 23. 19:27


       히스 레저가 등장했다. 그는 화장을 하고 다녀. 사람들에게 겁주려고. 히스 레저의 이야기다. 아니, 그가 맡은 조커의 이야기다. 새하얀 분칠을 하고 새까맣고 짙은 눈화장을 드리우고 흉터부위를 따라 새빨갛게 칠한 입술. 꼬들꼬들한 컬의 머리카락. 히스 레저의 모습이다. 아니, 그가 맡은 조커의 모습이다. 그가 그렇게 처음 등장했을 때, 커다란 총으로 같은 일(?)을 하는 동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면서 가면을 벗으며 등장했을 때, 나는 예상했던 것처럼 슬펐다. 그는 이제 이 땅에 없는 사람.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조커의 분장때문에 사람들이 낄낄거릴 때 나는 그 커다란 극장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고 싶었다. 여러분, 보세요. 히스 레저잖아요.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잖아요. 저 슬픈 모습을 봐요. 울고 있어도 웃는 커다란 입술을 가진 얼굴을 봐요. 새까만 눈화장 안에서 고통스럽게 빛나는 눈동자를 봐요. 히스 레저예요. 저 영화에 몰입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약으로 연명한 가엾은 히스 레저라구요. 저렇게 조커역할을 소름끼치게 잘 해내고 있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의 새로운 연기를 볼 수 없는 지독하게 안타까운 사람, 히스 레저라구요. 저렇게 슬픈 얼굴 본 적 있나요.
       
       생각해보니 나는 영웅을 그린 시리즈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다들 배트맨이며 슈퍼맨에 열광했을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박쥐의 형상으로 밤하늘을 날아다니고, 가슴팍에 S자를 새겨넣고 오른팔을 바짝 뻗어 팬티차림으로 구름 위를 날아다닌다는 것. 손목 끝에서 거미줄이 나오고, 악한 사람을 때리고 착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시리즈물의 전부다. 아, 슈퍼맨은 가장 최근 걸로 극장에서 보긴 했다.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도 극장에서 1편을 보긴 했다. 케이블에서 2편을 조금 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온전하게 극장에서 배트맨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다크 나이트>가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배트맨에 대해서는 조금 실망했긴 했다. 물론 영화는 대만족이었지만.

       나는 배트맨도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처럼 손목 끝에서 거미줄이 나오거나 오른쪽 팔을 뻗으면 지구 위를 무한정 날아다닐 수 있는 영웅의 태생적 기술 하나쯤 있는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처음 본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근육만 튼실튼실한, 강인한 체력에다 기계에 의존하는 한낱 배트'맨'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늘 자신이 더이상 활동하지 않는, 배트맨이 없는 도시를 꿈꾸고 있었다. 의상의 색깔도 타고 다니는 차의 색깔도 어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검정색. 검정색 가면 뒤에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이제 배트맨 일은 그만해도 좋으니 이 도시가 평화롭기만을 바라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영웅. 사나운 개에게는 꼼짝없이 당하는 배트맨은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인간'적이었다. (검색해서 보니 배트맨은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총격을 당해 죽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았단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고 배트맨이 된단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각종 장비와 사람을 구해 배트맨이 되었다는. 가엾은 아이구나. 아, 그래서 조커도. 아, 아. 그런 거였구나.)
           
       영웅시리즈를 꼼꼼하게 챙겨보지 못한 나는 최근에 관람한 몇 편의 영웅을 그린 영화들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그건 재미거리로만 생각했던 영웅영화에서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진중한 철학적인 물음들과 직면했을 때였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나는 이런 물음과 직면했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묻는다. 왜 다들 행복한데 나만 이렇게 불행해야 해? 그를 꼭 닮은 투페이스가 묻는다. 왜 다들 무사한데 나만 이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냐고! 그건 조커의 과거, 투페이스의 현재에 해당되는 질문이다. 왜 내가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어야만 하는지. 왜 내게만 불행이 찾아오는지. 왜 나는 울고 싶어도 내 입이 울지 못하는지. 왜 나만 하이드의 반쪽 얼굴을 가져야만 하는지.

        조커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섬뜩한 칼을 들이대면서 말한다. 내가 어떻게 이 흉터를 가지게 됐는지 말해줄까. 엄마를 내가 보는 앞에서 죽인 아빠가 나를 보고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냐고 웃으라고. 또 있잖아. 내 아내였던 사람이... 그는 웃으라고 만들어준 흉터때문에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이지만, 웃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 흉터때문에. 너무 깊어서. 너무 따끔거려서. 눈물을 흘리면 금방 짙은 눈화장이 번져버리는 불쌍한 사람. 입때문에, 눈때문에 울지 못하지만 늘 울고 있는 사람. 도시 전체가 자신이 그렇듯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고 폭력적이 되어 날뛰기를 바랬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5도 까닥이며 그럴리가 없다고 슬픈 표정으로 펄펄 뛰며 깔깔 웃던 가여운 사람. 세상에 거꾸로 매달려 내 불행이 너희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이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낄낄대는 사람. 웃을 수 없는 사람. 울 수도 없는 사람. 악당이 엉엉 울어버리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니까. 그는 그저 더럽고 쳐죽여야 마땅한 놈이여야만 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히스 레저가 이 영화가 끝나기 전에 갑자기 엉엉 울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 그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낄낄대면서 어깨 위에 조커의 짐을 가득 얹어 커다란 그가 구부정해보였는데 나는 그 모습이 참 슬펐다. 그가, 고담시의 최고 악당인 그가 엉엉 울어버린다면, 나도 그를 따라 이따위 세상 뒤져버리라고 엉엉 울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는 최고 악당인 주제에 울 수는 없었다. 그가 울지 못했기에 나도 울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닮은 다른 사람. 세상을 믿었으나 세상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사실이다. 이 세상엔 무능한 사람투성이니까. 경찰도 배트맨도 자신이 온전히 신뢰하는 세상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동전을 던진다. 세상을 믿을 적에 그의 동전은 양면 모두 앞면이었지만, 세상을 저버린 후 그의 동전은 앞과 뒤가 다른 동전으로 바뀌었다. 죽거나 살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배트맨이거나 조커이거나. 그는 조커의 여린 과거였다.

        이 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조커의 영화다. 배트맨은 조연일 뿐. 그러니 이 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히스 레저의 영화다. 히스레저의 유작. 그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가 한 편 더 남아 있지만, 그건 온전한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므로. 그가 '끝까지' 마쳤던 영화는 <다크 나이트>이므로. 이런 역할을 배트맨 의상처럼 그대로 떼어내어 자신의 몸이며 영혼에 붙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그는 최고였다. 나는 잭니콜슨의 조커를 보지 못했지만, 히스 레저의 조커가 최고라는 데 동조한다. 그는 이 작품을 남기고 이 땅에서 사라졌으니까.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보는 영화는 내내 슬펐으니까. 조커는 슬픈 사람이니까. 그는 최고의 조커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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