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채식주의자, 라고 할 순 없지만
    모퉁이다방 2008. 5. 14. 14:0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휴가 지나고 동생이 무거운 종이 가방을 안고 돌아왔다. 그 안에 고추장으로 볶은 크고 작은 멸치볶음,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고추장 진미채볶음이 락앤락에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군침을 돌게 한 건 팔뚝만한 애호박 세 덩이와 굵기로 소문난 내 손가락보다 더 굵고 큰 풋고추'들'.

       셋이서 자취를 처음 시작하던 때에 우리는 삼겹살을 구우면서 흥분했다. (그렇다고 지금 삼겹살에 흥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노릇노릇해질 정도로 바삭 구워 참기름 장에 찍어서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 소리를 연발했다. 정말 맛있었다. 그 꼬글꼬글한 삼겹살의 육질. 우린 진정한 육식주의자였다.

       그러던 우리가 이제는 저런 알찬 채소에 흥분한다. 예전엔 시장에서 쇠고기 덩어리를 보고 저건 얼마나 비쌀까, 도리도리질 했었지만 이제는 고추, 나물, 양파가 얼마나 비싼지 혀를 내민다. 그래서 고마운 분이 싸 주신 저 커다란 고추와 호박이 얼마나 값이 나가고 귀중한 것들인지 안다. 정말 한 가득 싸 주신 고추들을 보고 어찌나 감사한지 동생과 나는 눈물을 흘리는 시늉까지 했다. 너무 좋아서. 요즘은 정말 간절하게, 예전에 엄마가 고기보다는 야채라며 나물을 조물조물 만들어 한 상 차려내어주던 (당시에는 영양가 없다고 생각했던) 건강한 밥상을 그리워진다. 아, 부엌에 들어가서 뭔가를 만들어 차리지 않아도 맛있는 집밥이 엄마 손에서 후다닥 차려져 나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었던 옛시절이여.  

       어제 저녁은 푸짐한 한 상을 차려냈다. 손목만한 애호박 한 덩이를 꺼내 총총총 썰어 놓고(귀트머리 부분을 그냥 주워 먹어도 아삭한 것이 참으로 맛나다), 양파도 채 넣어 넣었다. 말린 표고버섯을 꺼내 물에 물리고 간장과 설탕 약간 넣어 간 해 놓았다. 이것들을 후라이 팬에 모두 넣고 볶으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다진 마늘과 액젓, 파를 넣고 호박이 숨 죽을 때까지 열심히 볶았다. 그리고 맛있게 접시에 담아 고추장과 함께 풋풋한 풋고추랑 밑반찬을 놓았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내 손가락보다 더 크고 굵은 고추를 고추장에 살짝 묻혀 한 입 깨무니 아삭거리는 소리가 입 맛 가득 퍼졌다. 짭짤하게 간 된 호박과 버섯맛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

       아, 채소로 차린 반찬들이 이리 건강하고 맛나다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면 그 시절 엄마의 밥상도 좀 더 열심히, 맛나게 먹었을텐데. 그러면 엄마를 방실거리며 다음 날 밥상에 더 맛난 야채들을 올려놓았을텐데. 흠. 아무튼. 이제 우린 진정한 채식주의자, 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고기를 좋아하지만 채식이 얼마나 좋은지는 고기만 잔뜩 주워 먹은 저녁에 기름지고 더부룩한 속에 잠도 오지 않는 어느 밤에 확실히 느끼게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