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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금요일이라는 이유로 맥주를 잔뜩 샀다. 금요일이면 약속이 없는 날에도 맥주 한 잔쯤은 꼭 해줘야 될 것만 같다. 간만에 밑반찬이 많아져 저녁을 넘치게 먹었고,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맥주를 꾸역꾸역 넘겨넣었다. 아, 금요일인데. 이 밤을 맘껏 즐겨야 하는데. 스르르 잠이 왔다. 먹고 바로 자면 살 찌는데. 기대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요즘 살이 쪘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동생은 언니도 더욱더 살찌워 같이 운동하러 나가자고 조를 속셈으로 친절하고 아주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주었단다.

   사온 맥주도 다 마시지도 못하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그 시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김동률이 나왔단다. 러브레터에 나올 때가 됐는데, 라며 지지난주부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출연자 리스트를 확인했는데. 마침 확인하지 못한 어제, 김동률이 러브레터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겨울이 한창일 때, 김동률의 다섯번째 앨범이 나왔다. 나는 그걸 엠피쓰리로 듣다가 하루도 못 가 씨디로 주문했다. 가지고 싶어서. 이 앨범을 가지고 있다 아무때고 생각날 때 꺼내 듣고 싶어서. 아주 오랜 뒤에도 문득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아,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 어떤식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겼을지 쌩스투도 궁금했다. 앨범 속에 담긴 열 곡을 들으면서 중랑천을 열심히 걸어다녔던 그 밤들. 너무 추워서 코가 빨개졌는데 노래가 좋아서, 그것이 담고 있는 가사가 마음에 닿아서 찌릿해지던 밤들이 오늘도 생생하다.

   모놀로그. 올 겨울은, 아니 지난 겨울은 루시드 폴에서 시작해서 김동률로 끝맺었다. 겨울에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 루시드 폴과 김동률이다. 김동률이 내는 낮은 독백들을 눈이 오고 겨울이 지나가는 동안 열심히 들었다. 산뜻한 출발을 하고, 아직도 널 그리워하고,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고, 지루한 일상을 떨쳐 버리려 하고, 웃게 만들어주는 사랑에 감사하고, 무대 위의 나를 느끼고, 그녀가 친구의 여자친구가 되어버린 현실이 원망스럽고, 어떤 뒷모습을 놓쳐버리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늘 힘을 주는 멜로디에 감사하는 그의 열가지 독백을 부지런히도 들었다.

   특히 좋았던 곡은 '오래된 노래'. 처음 들었을 땐 이 노래가 타이틀인 줄 알았는데. 오래 전 내가 그립고, 부럽다는 노래. 오래 전 내가 '부럽다'는. 이 가사에서 찌릿찌릿했다. '점프'도 좋고. 토마스랑 목소리가 잘 어울리더라. 진짜 그의 이야기같은 조금 가벼워진 김동률의 독백을 듣는 일. 이 노래들이 조금 부풀려지고 꾸며진 말들이더라도 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가사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듣다보면 이 노래들은 그의 이야기가 되었다가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아득해진다.

   오늘. 토요일 밤에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나온 김동률을 찾아서 보고 있다. 토요일 밤이니깐. 오늘은 맥주 없이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약간 긴장한 듯한 그의 라이브를 듣는다. 뭐랄까. 다행이다. 여전히 그의 노래들같은 그로 남아있어줘서. 깊은 짝사랑을 노래했던 그가 너무나 행복하다며 결혼을 해버렸다면 그가 부르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나 '취중진담'은 예전의 그를 추억하는 노래가 되어버렸을테니까. 당분간 결혼 생각은 없다는 그의 말이 고마운 건 팬으로써의 욕심이겠지. 하긴 그의 노래들엔 김동률만 담겨져 있는 게 아니니깐. 벌써 많은 누군가가 담겨져 있는 곡들이 많으니깐. 어떤 사람은 김동률 노래만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듣는 것조차 무척 힘들다고 한다. 다들 진심을 담아서 노래하고, 듣고 있다는 거다. 다행이다. 정말.

  1. BlogIcon 멀리서 2008.03.02 00:2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늘 멀리서 글만 보고 마음이 따뜻해져서 돌아가곤 했는데,
    오늘 이 글은 정말 댓글을 안달수가 없더라구요 ㅠ_ㅠ
    정말 어쩜 그렇게 같은 마음이었는지 김동률씨의 음악은 정말 그 무언가가 있어요
    이제 고등학교 들어가는 제 동생조차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배경음악으로 등록하고 싶다고 졸라대는 걸 보면
    그의 음악에는 다른 가수들보다 그 '진심'이라는 게 더 진하게 있는거 같아요:)
    그래서 어제 러브레터에 나온 동률오빠를 보고 왈칵 눈물이 나올뻔 했던거겠죠?
    너무 좋아요, 그는. 로맨틱한 그의 목소리가 이 밤을 가득 메우네요 :)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2 16:41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감사해요. :)
      좋아요. 이번 5집 노래들만 듣고 있었는데, 러브레터에서 예전 노래들을 들으니깐 마음이 막 설레였어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사랑한다는 말. 그러고보니 사랑이 들어가는 옛 노래만 불렀네요. 희망도 있었지만. 좋았어요. 정말.

  2. BlogIcon 비디 2008.03.02 01:4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김동률 좋아하시는 분들은 꾸준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
    금요일날은 맥주한잔 해줘야 한다에 공감합니다. 후훗~ 마셔줘야죠~ ㅋ

  3. BlogIcon comodo 2008.03.02 08:1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앗 저도 이노래 굉장히 좋아해요. '오래된 노래'
    김동률만의 음색은 듣는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부드럽고 편안한(혹은 안락한?) 그러한 말로는 잘 표현 안되는 느낌을 가져다 주어서 되게 좋아라 한답니다 :) 앗 그리고, 러브레터에 출연했었나봐요 저도 찾아봐야겠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2 16:43 신고 BlogIcon GoldSoul

      오래된 노래, 불러주었음 정말 좋았을텐데. 다시 시작해보자, 도 좋아요. 아. 한번만 한다던 콘서트 정말 가고 싶은데. 왠지 엄청 비쌀 것 같아요. ㅠ

  4. BlogIcon keiruX 2008.03.02 11:00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랑 비슷한 밤을 보내셨군요.ㅎㅎ
    역시 금요일밤은 그냥 자기엔 아쉽죠..

  5. BlogIcon 소심쟁이 2008.03.03 02:3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얼마전 토이 6집도 그렇고 동률이형 5집도 그렇고, 이런 앨범은 정말이지 들을때마다 마음이 참 흐뭇해 집니다. 저도 요즘 토이 6집과 더불어 가장 많이 듣고있는 앨범중 하나에요. 저도 골드소울님 덕분에 갑자기 맥주가 당기네요^^;

  6. BlogIcon 마기 2008.03.03 08:54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동생에게 사육당하시고 계시군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계속 들어도 지겹지 않은 노래
    글 내용 공감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3 09:52 신고 BlogIcon GoldSoul

      사육. 크- 맞아요. 저는 동생이 그렇게 잠들어버리면 살 찐다고 일어나라고 한마디쯤은 해주는데 동생은 환한 웃음으로 잘 자라고 말해주었죠. ㅠ 예전 김동률 노래들은 어느날 문득 듣게되면 마음 한 켠이 시큰해져요. 왠지 눈물이 글썽거려지고.

  7. 곡예사 2008.03.04 17:1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지난주였나. 해질녁에 새로 오픈한 집 앞 커피빈에 나갔는데 김동률이 앉아 있는 거예요. 그렇게 가까이, 무대 아닌 곳에서 본 건 처음이라 일요일 오후 한산한 커피숍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려던 저의 계획은 무산되고, 무슨 얘기를 하나 신경쓰느라 정신을 잃었어요. 근데 생각보다 초라한 입성(ㅋㅋ)으로 나와주신 탓에 김동률이 맞는지 몇 번이나 돌아봤답니다. 헤.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5 09:16 신고 BlogIcon GoldSoul

      정말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가요? 저도 곡예사님 댓글에 막 솔깃해지는데요. 왠지 커피마시러 갈 때도 뿔테 안경이랑 목도리 하나 멋지게 둘러주시고 예쁘게 입고 갈 것 같은데 아니였나봐요. 초라한 입성이라니. 궁금해지는데요. 일요일 오후 한산한 곡예사님의 커피 계획은 한 문장으로도 근사한걸요. 저희집 앞은 커피빈따위가 없어요. 그저 롯데리아가. 아세요? 롯데리아 아메리카노가 의외로 맛나다는 걸. :)

  8. 곡예사 2008.03.05 15: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물론 뿔테 안경을 착용중이셨죠. 초라하단 건 과장이고, 생각보단 간지가 흐르지 않아서. ㅋ
    롯데리아 커피맛이 아주 궁금해졌어요. 요샌 별일없는 주말이면 대학로 학림다방에 나가 스트롱을 리필까지 해서 마시곤 했어요. 이렇게까지 커피를 좋아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겨울이 하도 추워서 그 독약처럼 시꺼멓고 뜨거운 것에 위로받았나봐요. 이젠 봄이 됐으니 좀 줄여야겠죠.
    참참, 책 한 권 추천하고 싶어요. <차가운 피부>라는 스페인 소설인데, 특이하고 재미도 있어요. 골드소울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6 00:34 신고 BlogIcon GoldSoul

      학림다방 한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인터넷 검색하다가 사진은 많이 봤는데. 다음에 대학로에 가게 되면 한번 들러봐야겠어요. 스트롱이 뭘까 생각하다가 검색해보니깐 굉장히 진한 에스프레소인가봐요. 롯데리아 커피맛은 그렇게 진하지 않고 약간 연해요.
      <차가운 피부> 접수했어요. 곡예사님이 추천해주는 책이라면 언제나 좋아요. 대출한 책 빨리 읽고 후다닥 읽어볼께요. 고마워요. :)

  9. 달빛아래 2008.03.06 16:3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찬 바람이 얼굴을 훑고 가면 수 많은 추억들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겨울엔
    약간 넉넉하게 기름진 듯한 동률오빠 노래가 제 격인 것 같아요 :)
    어우 그 차가운 마음에 알맞게 덥혀진 오일을 스르르 촤아..발라주는 듯한 목소리란...하하
    전 "출발" 너무 좋아서 배경음악으로 해놨답니다 :)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7 12:12 신고 BlogIcon GoldSoul

      기름진. 크크- 아, 김동률 노래가 기름지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요. :D '출발' 너무 좋죠? 정말 떠나고 싶어지는 노래예요. 저는 러브레터보고 '희망'이 좋아서 반복해서 들었어요. 그리고 윤도현과 얘기하면서 말한 '동반자'요. 그거 콘서트 영상 찾아서 봤는데, 울뻔했어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