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낭독회에 갔을 때 <혀> 표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낭독회에 참석했던 어떤 분이 표지가 참 마음에 듣다고 하셨어요. 연주빛이며 보라빛들도 마음에 들고 그림도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요. 제목과 달리 익살스런 그림이라면서요. 그러자 조경란 작가님께서 아, 그렇게 느끼셨나요, 저는 이 눈을 보고 너무 슬퍼보였는데, 라고 나즈막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도 이 표지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요즘 읽을 때 불편한 띠지가 많은데 이 책은 띠지인 것 같은데 하나의 표지가 접힌 거예요. 그래서 접혀있는 표지종이를 쫙 펼치면 예상외의 그림이 펼쳐져요. 꼭 껴안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뜨거운 스튜 냄비 안에서 펄펄 뜨겁게 달구워지고 있고 슬픈 눈을 한 요리사는 마지막 향신료를 넣는 거예요. 코는 이 요리의 냄새를 잔뜩 들이 마시고 있는 듯 살아있구요. 이 책은 마지막 결말에 반전이라면 반전이랄 수 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데 이 접혀져 있는 표지 속의 그림이 힌트가 될 수도 있어요.
작가님의 말씀대로 <혀>는 벼랑 끝까지 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혀>는 사랑이 끝난 남자와 여전히 그 사랑이 진행 중인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정원은 그것을 요리로써 극복하려고 해요.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열었던 쿠킹 클래스를 접고 예전에 일했던 레스토랑으로 돌아가 끊임없이 요리를 만들어요. 이 이야기는 이별을 한 차가운 겨울 1월에서 시작해서 그를 위해 마지막 요리를 준비하는 더운 여름 7월에 끝나요.
1월에 그녀는 남자에게 버려지고, 2월에 그녀는 더이상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는 순간들을 견뎌요. 3월에 그녀는 남자와 남자의 새 여자를 위해서 요리를 하고, 4월에 그녀는 그래도 좋은 순간들이 있었을 거라고 다독여요. 5월에 그녀는 아끼던 개의 죽음과 마주하고, 6월에 그녀는 사랑으로 가득 찬 남자의 새 여자의 부엌을 마주해요. 7월에 그녀는 남자에게 마지막 요리를 해 줘요. 영원히 잊지 못할.
책 구석구석에는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요리들이 많아요. 먹어보지 못했지만 왠지 맛이 그려지는 그런 고급스런 이탈리아, 프랑스 요리들이요. 푸아그라, 캐비어, 우설 요리 등등. 그것들은 조경란의 손 끝에서 그저 씹어서 식도로 넘겨지는 음식이 아니라, 혀 끝에서 시간을 두고 음미해가면서 먹어 넘어야 할, 재료들 저마다 한 가지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사과가 사각거리면서 말을 건네고 거위의 간은 고통스럽게 노려보고 바질은 뚝뚝 눈물을 떨어뜨려요. 그리고 그것들이 작가의 손 끝에서 어우려져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아프고 슬프고 아린 요리 한 접시를 만들어내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혀 끝으로 음미해가며 맛있게 먹어 치우구요.
이 책에서 사랑으로 인해 극한으로 치달은 정원과 삼촌이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와 사랑하는 행위를 마주한 여자와 사랑하는 사람이 대롱대롱 줄에 의지해 세상을 등진 모습을 마주한 남자요. 어쩐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사랑이란 거요. 한 때는 보잘 것 없지만, 한 때는 우리에게 전부인 그거요. 왠지 혀 요리만큼 징글징글해져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극한의 행복과 극한의 슬픔을 동시에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다고 깨달은 어느 순간처럼요. 극한의 행복도 극한의 슬픔도 시간을 따라가다보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이 지나고 보면 분명한데 왠지 그 순간만큼은 그걸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찔해져요.
빠르게 읽히고, 마지막에 무척이나 놀랬고, 입과 머리가 무척이나 즐거웠던 소설이였어요. 읽으면서 내내 작가님이 차려주신 요리들로 배불렀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냉장고를 열어서 지금 있는 재료들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시작했어요. 냉동실에서 다진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꺼내고 마늘을 다지고 청량고추도 하나 잘게 썰었어요. 양파 하나도 가늘게 다진 후에 가스 불을 크게 올리고 냄비 위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그것들을 달달 볶아요. 물에 카레가루를 풀고 그 물을 잘 볶은 재료위에 부어요. 찌찌찍. 맛있는 소리가 나요. 그리고 가끔씩 저어주면서 완성된 카레를 공기에 꾹꾹 눌러담은 밥을 접시 위에 공기모양 그대로 놓고 그 위에 잔뜩 뿌려요. 그리고 쓱쓱 비벼서 잘게 썬 깻잎과 함께 우걱우걱 씹어서 넘겼어요. 이번 요리는 소설 <혀>를 위한 요리니까 먹는 내내 소설의 이야기를 생각해요. 결국 벼랑 끝에 떨어진 정원과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가 겨우 올라와 한 발 내딛는 삼촌을요. 나는 정원이 잘 살아나가주기를 바랬는데. 최고의 요리들을 만들어내면서 행복하게 그 시간들을 극복해주길 바랬는데. 왠지 그렇게 되어버린 정원이가 가엽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가득했던 접시가 깨끗해졌어요.
다시 타이머가 울리는 소리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유백색 즙이 종아리에 튄다. 붉은 표면에 V자로 파낸 자국이 표백해도 지워지지 않는 흰 얼룩처럼 보이는 사과를 테이블 밑에 얌전히 엎드려 있던 폴리가 덥석 물고 나가버리는 걸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꼭지가 있는 부분을 위로 향하게 놓고 사과 중간을 가로로 반듯하게 자르면, 수박씨만한 다섯 개의 씨가 둥근 표면 한가운데 별 모양으로 박혀 있다. 은밀히 혼자만 알고 있는 어떤 징표처럼, 나는 아직도 사과는 정말 그냥 사과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바삭바삭 잘 구워진 피자를 오븐에서 꺼내며 지금은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멀리, 라고 생각한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말한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입니다."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곤 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사랑이 끝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식도락가라는 이유만으로 한때 열심히 읽곤 했던 헤밍웨이가 한 말은 틀렸다. 물리적인 고통을 견디고 나서야 자신을 알게 되는 건 남자만이 아니다. p.14-15
. . . 그런 어느 날,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그와 폴리를 보며 차를 마시다가 지금 나를 둘러싼 이 저녁의 풍경이 백금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내 삶의 결정이기도 하다는 걸 문득 깨닫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갖추고 싶은 것을 다 갖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아직 너무나 젊었다. 이제 이야기는 그 남자와 여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하는 마지막 문장 하나만 남겨둔 것 같았다. 공을 따라가는 활기찬 폴리의 몸짓과 휙! 휘파람을 불어대던 그의 청명한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저녁으로부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공을 따라가던 폴리와 지금 내 손바닥에 있는 이 공 하나가 전부다. p.104
오븐에서 음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대개는 함께 모여 앉아 차를 마시거나 간단한 파스타나 국수 같은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그가 이층 작업실에 있을 땐 모두 키친에 모여 함께 밥을 먹게 되는 셈이다. 그녀가 그를 처음 봤을 때를,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그녀는 재빨리 눈썹을 들어올리며 한순간 눈을 크게 뜨곤 얼굴을 살짝 돌려 시선을 다른 데로 던지는 척했다. 그러곤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부드럽게 돌리고 위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눈꺼풀을 올리며 미소지었다. 대담하고 화려한 웃음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그녀의 웃음이 너무나 솔직하고 당당해서 그때 나는 그만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간 공기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고 그녀는 그를 보고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슥 스쳐갈 때 그녀에게 풍기던 향수 냄새가 말로만 듣던, 매우 강한 향기를 풍기는 허브의 일종인 마조람의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였다. 다음날이 되어도 그 냄새는 내 키친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가을이 막 시작되던 무렵의 일이다. p.108-109
당신은 삼촌이 자꾸만 넘어지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의사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삼촌 곁에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그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이 작은 보온병밖에는. 이렇게라도 말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눈엔 안 보이지만 남들에겐 어딘가 틀림없이 모자란 데가 있는 쌍둥이처럼 보일까봐. 적어도 삼촌은 그렇게 보여서는 안 된다. 삼촌은 시든 것, 떫은 것, 너무 익은 것, 썩은 것도 사랑의 맛이라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p.124
"어려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문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냥, 다. 사는 게." 다는 아닐 거다. 어렵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다. p.137
추엇이란 것은 마치 모서리가 세 개인 뽀족한 삼각형처럼 생겼을 것 같다. 어떤 기억을 떠올리면 그것은 가슴속에서 빙빙 돌기 때문에 모서리에 찔린 마음이 너무 아프다. 계속 떠올릴수록 그것은 바람개비처럼 더 빠르게 빙글빙글 돌아가게 되고 마음은 점점 더 아파진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간 모서리가 다 닳아져서 더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게 될까. 그런 날이 올까. 그런데 나는 내가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모서리에 찔리고 있는 이 아픈 상태가 나를 깨어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 . p.146
. . . 기껏 흔하디 흔한 검은 비닐봉지 하나 때문에 균형을 잃다니.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 쯧쯔 혀를 찼다. 비닐봉지를 비둘기로 착각한 것도 멍청한 짓이었지 뭐야. 숙면을 취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럴 거야. 내가 두 개라면 이럴 때 하나의 내가 다른 하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을 것 같다. 혼자 오래 있으면 나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p.175
땅에 뿌리를 내리기만 하면 어떤 바람도 이겨내고 초록색 열매를 맺는 올리브나무 같은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지금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 사랑이 더 이상 올리브나무도 음악도 그리고 맛있는 한 접시의 음식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씁쓸하다. 그러나 땅속의 뿌리처럼 이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태어나 맨 처음 본 것이 트랙터라고 할지라고 말이다. . . p.255
그, 사, 람. 나는 천천히 삼촌을 따라 해본다. "묻어두는 거야." "......" "그래야 내가 다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이 바라는 건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닌 것 같아서 말야." "사랑은 바질 같은 걸까, 삼촌?" "무슨 소리야?"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의 몸을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머리를 베어내서 바질이 심어진 단지에 묻었대. 여자는 눈물을 물처럼 주다가 찢어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서 결국 죽고 말아. 거기서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싱싱하고 향이 강한 바질들이 자라나기 시작해서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찾아왔대. 그러니까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죽고, 여자가 미치고, 눈물이 떨어지고, 식물이 자라고, 뭐 이런 게 결국 사랑의 모습인 걸까." "사랑한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진 않아." "뭐가 사랑이고 진정한 건지 잘 모르겠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다 평정을 잃어버리게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꼭 광기처럼 말이야." "그 광기라는 말은 강력한 힘이라는 뜻이잖아, 삼촌." "......" "사랑은 강력한 거야. 삼촌." "그래, 어쩌면." "바질에도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성분이 들어 있다잖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내 말에 삼촌은 슬쩍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잘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다. "......" "우린 왜 이렇게 된 거지?" p.278-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