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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 잘 있나요, 훌리아 식구들
    서재를쌓다 2007. 11. 13. 01:32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1,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제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은 건 순전히 곡예사님 때문이예요. '울지도 몰라요' 요 한 문장때문이였죠. 요절복통으로 웃기다가 마지막에 더욱 쓸쓸해진다는 강추 멘트때문이였어요. 그리고 정말 곡예사님 말처럼 읽는 내내 히죽거리다가 마지막에 정말로 쓸쓸해져버렸어요. 울지는 않았지만요.

       예전에 하루종일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극장에서요. 시네큐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특집으로 하루종일 좋은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던 날이 있었는데 상영작 모두 보고 싶어서 다 예매를 해 버렸어요. 다행히 쉬는 틈이 길어서 중간중간에 나와서 커피도 마실 수 있었고 밥도 먹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루종일 조그맣고 어두운 극장에서 앉아서 이웃집 토토로며 원령공주며 인랑이며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다섯여 편의 영화를 줄줄이 이어서 봤죠. 밥 먹고 들어와서는 초반부에 나도 모르게 졸기도 하면서요. 돌아오는 길에는 하루종일 좋은 영화를 줄줄이 봤다는데 뿌듯하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 지나서 생각해보니 영화의 내용들이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줄거리는 이건데 제목이 이거였나? 이 영화는 분명히 봤는데, 내용이 뭐였지? 지금은 절대 그렇게 영화 안 보려고 해요. 내용도 뒤죽박죽이 되고, 영화마다 느껴지는 감흥이 제각각인데 그것들이 제 속에서 마구잡이로 뒤섞여버리는 거예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음미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거죠.

        <나는 훌리아...>를 읽으면서 그 때의 뒤죽박죽된 감흥의 영화감상 시간이 떠올랐어요. 소설은 18살 소년이 32살의 친척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에 성공하기까지의 과정과 주인공인 마리오의 방송국에서 일하는 인기 라디오 작가 페드로 카마초의 단막극 이야기가 한 챕터씩 번갈아가면서 나와요. 일본 소설도 그렇고 남미 소설도 왜 이렇게 등장인물 이름이 헷갈리는지 모르겠어요. 가끔 우리 소설도 그러는 거 보면 이름 외우기에는 제가 젬병인가봐요. 등장인물 이름 외우기도 힘든데 페드로 카마초의 단막극에는 매번 한 챕터씩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니까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리오 이야기와 단막극 이야기가 한 챕터씩 번갈아가면서 이어지니까 또 헷갈리고. 소설은 재밌는데 자꾸만 뒤죽박죽이 되어서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시간이 조금 오래걸렸어요.

        그런데 실제로 소설의 내용도 뒤죽박죽이 되어가요. 마리오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까지 골인하는데 척척인 반면 페드로 카마초의 단막극은 등장인물들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요. 실제로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타자기 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 일만 하고 있었거든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다보니 전편의 경찰의 이름이 이번에는 도둑으로 등장하고, 전편의 죽은 이름이 이번에는 당당히 살아있는 식이예요. 이로 인해서 책에서는 페드로는 당장 방송국에서 잘릴 지경이고 작가 자신도 미칠 지경인데 그걸 읽고 있는 저는 너무 재밌는 거예요. 처음에 읽었던 단막극의 재밌었던 캐릭터가 갑자기 등장해서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고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고. 이렇게 저렇게 헷갈리기는 한데 너무 낄낄 웃음이 마구 새어나와요.

        그리고 마지막이요. 그로부터 꽤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을 이야기하는 마지막 챕터요. 이 챕터의 첫 단락을 읽는 순간, 곡예사님 말처럼 정말 쓸쓸해져요. 맥주 한잔쯤 하다가 이 챕터로 넘어갔으면 정말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어요. 혹시나 읽으실 분이 읽으실까 스포일러로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좀 찡해요.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부터 그렇잖아요. 마리오의 나이처럼 '성장'한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지만요. 페드로나 훌리아의 나이처럼 '늙어'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조금 쓸쓸한 일인 것 같아요.

        이 소설은 실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남미 문학 작품이 그런건지 인물들이 굉장히 열정적이고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팔닥팔닥 뛰어요. 이 글을 쓰면서 그 두권의 책에서 만난 마리오며 훌리아며 페드로며 그의 친구들이며 단막극 등장인물들이며를 하나하나 떠올려보는데 갑자기 안부가 궁금해지네요. 다들 무사한지. 이 책은 곡예사님의 댓글 보고 바로 읽으려고 했는데, 1권이 품절이예요. 괜찮은 책인데 더이상 찍지를 않나봐요. 저도 멀리 부탁해서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거든요. 그게 조금 아쉬워요. 소장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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