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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핑 베토벤 - 신을 듣는 남자
    극장에가다 2007. 10. 24. 10:44

      저는 클래식의 클자도 몰라요. 베토벤인지 모짜르트인지 헷갈리기 일쑤구요. 엘리제를 위하여인지 월광인지 매번 헷갈려요. 일부러 찾아서 듣는 것도 아니구요. 그냥 듣게되면 어디선가 들어봤던 선율이구나, 좋다, 라는 정도예요. 그러니깐 클래식 음악에 관해서 개뿔도 몰라요.
      
       <카핑 베토벤> 봤어요.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말년을 다룬 영화예요. 베토벤의 이야기지만 다이앤 크루거가 연기하는 안나 홀츠라는 인물은 백퍼센트 가공된 인물이라고 해요. 한 리뷰기사를 보니까 영화 속에서도 공연되어지는 '9번 교향곡' 초연 당시에 무대에 올라가 귀가 안 들리는 베토벤을 돌려 세워 환호하는 객석을 보게 만들었던 여성이 있다는 짤막한 기록에서부터 시작한 감독의 상상력이 안나 홀츠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해요. 무례하고 포악하고 신경질적인 청력을 잃어버린 말년의 베토벤과 젊고 따뜻하고 똑똑한 또 다른 베토벤을 꿈꾸는 안나와의 우정이랄까, 소통이랄까. 이 영화는 베토벤의 말년의 음악과 더불어 그들의 소통을 다루고 있어요.

       베토벤은 말해요. 자신은 신과 소통을 한다고. 신이 내 귀를 멀게 했다고. 어떤 날은 신이 내게 재능을 주고 내 귀만 멀게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다 듣는 음악을 자신만 듣지 못한다고 울먹이고, 어떤 날은 신이 내 귀를 멀게 만들어 사람들은 모두 내가 적막 속에서 지내는 줄 알지만 작곡할 때만 빼고는 머릿속으로 24시간 선율이 흐른다고 스스로를 축복해요. 그리고 고독하다고 읊조려요. 고독이 나의 종교라고. 


       이 영화에서 소통하는 것은 음악뿐만이 아니예요. 듣는 것과 더불어 보는 것. 듣지 못하는 베토벤은 눈을 통해서 소통해요. <카핑 베토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빛이였어요. 18세기를 배경으로 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빛이 꽤 아름다워요. 촛불과 햇빛, 따스함을 머금은 이 두가지 빛이요.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도, 베토벤의 피아노 위에서도, 베토벤의 선율이 흐르는 악보를 그려넣는 종이 위에서도 따뜻한 주황빛의 촛불이 비추고 있어요. 특히 청각을 잃은 베토벤이 안나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그녀의 입을 바라보는 순간의 눈을 머금은 촛불의 느낌. 굉장히 따뜻하지만 외롭고 고독하고 슬픈 눈동자. 그 순간, 애드 해리스의 연기도 만점이였지만 촛불도 연기를 하는 듯 했어요. 그리고 햇빛. 촛불이 켜있는 밤이 아니면 영화는 거의 햇빛이 아늑한 오후의 느낌이예요. 오후의 따스하고 나른한 느낌있잖아요. 그 햇빛이 집안 구석구석, 피아노 구석구석 스며들면서 나쁜 마음, 차가운 감정들을 없애주는. 그 위로 베토벤의 음악들이 흘러가요.  

       저는 이 영화가 그냥 좋았어요. 광기 어리고 무례한 베토벤이 안나를 만나 서서히 촛불처럼 햇빛처럼 따스해져가는 느낌,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항상 함께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고독하고 쓸쓸한 베토벤의 눈동자(이 눈동자를 연기한 에드 헤리스는 정말 최고예요), 배우들의 흠잡을 데 없는 연기, 그 위를 흐르는 베토벤의 음악들. 사실 저는 엘리제를 위하여나 월광같은 곡이 로맨틱하고 더 좋지만, '9번 교향곡' 초연 장면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어요. 지나치게 감동한 것도, 지나치게 슬픈 것도 아닌데도 눈물이 주르륵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넘치는 눈물 있잖아요. 연주를 끝내고 진동만 느껴지는 무대 위의 베토벤을 안나가 뒤돌아서게 하면서 박수소리와 갈채소리가 한순간에 쏟아졌던 순간까지 계속 흘러 넘쳤어요.

       클래식이란 거 잘은 모르지만요. 영화의 첫 장면처럼요. 안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베토벤의 푸가를 어느 순간 마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함께 있던 사람들 속에서 그 선율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소통할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그래서 다시 한번 듣고 싶어지는 그런 거 같애요. 창문은 하나도 없지만 빛을 머금은 베토벤의 음악을 항상 듣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그의 옆집에 사는 할머니처럼요. 개뿔 아무것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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