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디카페인
    모퉁이다방 2021. 7. 14. 16:15

     

     

      점심으로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디카페인 커피. 출산하고 커피는 두 번째다. 조리원에서 원장 선생님이 작은 종이컵에 따라준 걸 아껴 마셨더랬다. 수유를 끝내고 잠든 아이를 보듬어 트림을 시키려 노력한 뒤 침대에 눕혔다. 밤낮을 구별하게 하려고 낮에는 아기침대가 거실에 있다. 문밖으로 옅게 부스럭 소리가 났고 연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문할 때 이렇게 남겼다. 아기가 있어 문앞에 두고 노크해주세요. 오늘은 커피가 간절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 그동안 참았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을 보니 그제서야 구름이 보였다. 초록으로 물든 산 위에 짙고 풍성한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근사한 구름이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구름을 만났더라면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겠지 생각했다. 요즘 핸드폰 메모장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다른나라로 갈 수 있다면 사올 것들 목록을 적어두고 있다. 그 나라 비누 사오기. 요거트 사먹기. 특이하고 자그마한 접시 사오기. 그 나라 맥주 마시기. 잔뜩 사놓고 미처 못 마신 맥주는 트렁크에 담아오기. 요즈음 집에서 온종일 생활하면서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물건을 자주 쓰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떠올린다. 샤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 수제비누를 쓰며 B를 생각하고, 접시에 음식을 담으며 S와 B를 생각한다. 잠옷을 입으며 M과 S를 생각하고, 화분에 물을 주며 H를 생각한다. 아직 몇일 쓰지 못한 5년 다이어리로 S를 생각하고, 아가에게 옷을 입히며 H씨를 생각한다.

     

      낮에 트림을 시켜줄 때 넷플의 영상을 조금씩 보고 있다. 갓 육아를 시작한 엄마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재밌어서 트림을 시키지 않을 때도 보고 있다. 1시즌 마지막에 이런 대화가 나왔다. 실수투성이 초보엄마 주인공과 느긋한 나이의 육아교실 선생님과의 대화이다. 

     

    -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요. 사람들이 운동하거나 제러미가 숨 쉬는 소리도 짜증 나요. 괴팍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아요.

    - 당연히 그렇겠죠.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 전 엄마가 되기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지난주에 애랑 떨어져 있었는데 정말 편안하더라구요. 마루를 닦고 엄마랑 싸우는 것조차 괜찮았어요.

    - 정상인 거죠. 진짜예요.

    - 이러다 늘 애가 뒷전이 되면요?

    - 어떻게 될 지 미리 사서 걱정하지 마요.

    - 저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 그것도 정상이죠. 에스터가 이번주에 그러더군요. 엄마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라는 걸 깨달았대요. 그게 사실이구요.

    - 맞아요. 에스터는 똑똑하니까요. 정말 똑똑하죠. 좀 재수없긴 하지만.

    - 그래도 에스터는...

    - 정말 재수없죠.

    - 맞아요.

    - 영리하긴 해요.

    - 계속 과거만 돌아보면 잃게 된 것만 자꾸 떠오를 거예요.

    - 남편이랑은 어때요? 이름이 뭐였죠? 제러미였나요?

    - 네. 사이가 좋진 않아요.

    - 아기가 울면 꼭 안아주잖아요. 무슨 이유로 울건 간에 아기를 이해하려 하고 또 안심시키려 노력하죠. 그렇죠. 스스로나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봐요. 우린 그냥 다 큰 아기들일 뿐이에요.

     

      그리고 육아교실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사람들과 계속 대화하라고 말한다. 육아교실 내내 시크한 태도를 유지하던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는 주인공의 등을 톡톡 두드려 준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