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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모퉁이다방 2019.07.18 23:11

 

    엄마랑만 싸우고 아빠랑만 싸우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엄마랑도 싸우고 아빠랑도 싸우면 내가 정말 구제불능같다. 어쩌면 이렇게 못나서 이러나 싶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오늘은 아빠랑만 싸웠지만 얼마 전에 엄마랑도 싸웠으므로 구제불능과 같은 상태가 되어 운동을 하러 갔다. 땀을 닦고 눈물을 닦으며 러닝머신 위에서 임경선의 <다정한 구원>을 읽어나갔다. 임경선은 아버지가 마흔일 때 자식 셋과 아내와 나이든 부모를 두고 혼자 낯선 이국에 포르투갈어를 배우러 와 1년을 보냈던 리스본 대학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거닌다. 그곳에서 그 시절 아버지가 보았을 풍경들, 걸었던 길들, 먹었던 음식들을 상상해본다. 아버지는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마흔살의 남자가 자신의 어깨에 가득했던 짐들을 잠시 걷어내고 이국에서 혼자 살아가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지난주에는 남희언니를 만났다. 언니랑은 누룽지치즈콘닭을 시켜놓고 생맥주 여러 잔, 자몽소주 두 병을 마셨다. 2차를 가게되면 언니가 돈을 쓸까봐 이곳에서 끝을 내자고 했는데, 나와서 걸으니 바람이 통하는 괜찮은 2차 장소가 많아 후회했다. 분기 혹은 한 해에 한두 번 보게되는 언니는 늘 지난 여행 이야기를 해준다. 이번에는 친구들과 함께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고 했다. 아이슬란드는 물가가 무척 비싸서 먹을 것들을 잔뜩 싸갔단다. 오로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여행. 오로라가 나타날 곳을 예측하는 어플이 있는데 그걸 따라서 계속 갔단다. 산장 같은 곳에서 한국에서 싸간 얼큰한 음식들로 한끼 식사를 만들면서 오로라가 보이나 안보이나 점검하고, 그러다 오로라가 보이면 모두 하는 일을 멈추고 숙소 밖으로 나와 오로라를 올려다 보는 여행. 나는 늘 언니가 말해주는 여행을 언니와 만난 뒤에 가만히 떠올려보는데, 오늘 그 풍경을 다시 떠올려 보니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됐다. 언니는 북유럽풍 그릇을 선물해줬는데, 쓸 때마다 언니의 오로라가 그려질 것 같다. 

 

    운동 가는 길에 맥주 냉장고가 바깥에 나와있는 편의점이 있는데, 얼마 전에 오키나와 오리온 맥주가 진열되어 있는 걸 봤다.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가면 다 수입이 되는구나 생각을 하며 언젠가 세 캔을 사야지 생각을 했더랬다. 세 캔에 구천구백원이다. 오늘이다 싶어 편의점 맥주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불매운동 생각이 나서 그 옆의 익숙한 라벨에 눈이 갔다. 바르셀로나에서 마셨던 이네딧담이 있었다. 혜진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있는 줄도 몰랐던 맥주. 진짜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가면 다 수입이 되는구나! 세 캔을 샀다. 이것 역시 세 캔에 구천구백원. 그러고 집에 와 씻고 설거지를 하며 즐겨찾기 한 블로그 이웃님이 최근에 올린 효리네 민박 영상을 들었다. 요즘 곧 따로 떨어져 살 생각에 마음 한켠이 시큰해질 때가 있는데, 아빠랑 싸우고 울다 나간 못된 언니는 돌아와서, 인생은 혼자다, 라는 못된 말을 했더랬다. 동생의 훌쩍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물을 더 세게 틀었다. 동생은 요즘 어떤 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그 타들어가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한다. 동생도 그리 티내질 않는다. 내가 계속 지켜봐줄테니까. 이제 두사람이 되어서 엄청나게 잘 지켜봐줄테니까. 어떤 선택이든 결국엔 응원할 거니까.

 

    들어오는 길에 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았다. 책을 당분간 사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 책은 팔월 말이 되기 전에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주문했다. 이 책으로 내가 이해하는 세계가 조금 더 넓어졌음 좋겠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반지를 녹여 우리 두 사람의 결혼반지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는데, 무심하고 심플하고 두께가 얇은 반지를 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무척 기대가 된다. 내일은 잘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금요일이니까. 아, 한 캔 맥주가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