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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서재를쌓다 2019. 5. 16. 17:55



      동생이 이 책을 무척 좋아해 호텔에서 하는 북토크 신청을 했다. 언니와 함께 살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적었다고 한다. 동생이 먼저 읽고, 다음에 내가 읽고, 그렇게 둘다 읽고 북토크에 갔다. 북토크에 가서 좋았던 점은 책과 인스타로만 보았던 두 작가님의 실물을 직접 보았다는 것. (김하나 작가님은 정말 자그마한 사람이었다) 그 날의 북토크는 책에 있던 에피소드를 한번 더 이야기하는 거여서 좀 아쉬웠다. 어쨌든 북토크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독자의 질문은 "그 아파트는 어디에 있나요?"였다. 동생은 창밖으로 플라타너스 잎이 물결 치는 두 작가님의 망원동 집을 무척 궁금해해 인터넷으로 망원동 아파트를 검색해 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분이 또 계셨다! 김하나 작가님이 "그냥 아파트예요. 어느 동네에나 있는 평범한."이라는 답변을 했는데, 그 말이 선명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의 집을 어떤 집으로 만드느냐는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다. 한없이 작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집이지만, 사람도 그렇듯 모든 집도 장단이 있다. 예전에 살던 면목동 집은 낡은 다가구 주택이었다. 번듯한 대문이 없었다. 검정색 페인트로 칠해진, 잠금장치가 단 한번도 작동하지 않았던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 가게 뒷마당이 나왔다. 그 옆으로 작은 통로가 있었는데, 그 통로 안의 계단을 올라가면 첫번째에 있는 문이 우리 집 문이었다. (2층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고, 한 개의 문은 3층 주인집으로 이어졌다) 화장실과 부엌이 따로 있는 투룸이었는데, 처음 이사왔을 때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는데 오래 살수록 오래 산 티가 났다. 청소해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집이었다. 나중에 동생은 그 동네와 그 집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집이 나쁘지 않았다. 길 건너에 전통시장이 있었고, 지하철 역까지 걸어서 3분이면 충분했다. 2층이라 해가 잘 들었고, 투룸이라 방 하나에는 책과 옷을 보관할 수 있었다. 길 모퉁이에 있는 집이어서 옷방 창문 하나를 활짝 열어놓으면 초여름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창문 앞에 컴퓨터 책상을 두었는데, 거기서 바람을 맞으며 블로그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백수 시절 매일 도서관에 가 책을 읽었더랬다. 물론 그것은 추억이고, 다시 그와 같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겠냐라고 하면 흠, 흠, 흠 그러지 못하겠다. 그래,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다른 이유로 플라타너스 출렁 집이 있을 수 있다는 거다. 고가의 집이 아니더라도, 넓지 않더라도, 모두 각자의 플라타너스 출런 집을 가질 수 있다. (흠. 그래도 고가의 넓은 집에 살게 된다면 정말 좋겠지.)


      아무튼 책은 무척 재밌었다. 깔깔거리며 재미나게 읽었다. 인스타에서 김하나 작가님의 일상을 구경하곤 했었는데, 늘 정돈된 좋은 집에서 쿵짝이 잘 맞는 룸메이트와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부러웠었다. 내 일상은 싸우고 멍드는 투성인데.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었더라. 그래, 사람 사는 거 다 비슷비슷하지. 잘 싸우고 잘 화해해야 잘 살 수 있지. 남녀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김하나 작가님은 집이 무척 깔끔하다는 독자의 말에 인스타에 매번 같은 곳만 올라오지 않나요? 저희 집에도 보여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보여질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또한 집 뿐만이 아닐 거다. 



       강습을 마친 저녁에는, 동해안이니 역시 회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코스를 1인분으로는 내지 않는 곳도 많아서, 몇 군데 횟집에 전화를 한 다음 겨우 예약에 성공했다. 혼자 차를 몰고 가서 맛있게 먹은 다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모든 게 예정대로 순조롭고, 착착 빠르게 돌아갔으며, 새로운 경험으로 꽉 찬 2박 3일을 보냈다. 경탄의 순간에도, 좌절의 순간에도 언제나처럼 혼자였다. 그러고 나니 이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라서 못하는 일이 있는 게 싫어서 뭐든 혼자서도 해왔고 또 꽤 잘해왔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럿이 해야 더 재밌는 일도 존재한다는 걸.

    - 16-17쪽


       "친구들은 사회적 정서적 안전망이다." 김하나가 늘 강조하던 이야기처럼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고 있다. 다른 온도와 습도를 가진 기후대처럼, 사람은 같이 사는 사람을 둘러싼 총체적 환경이 된다. 상대의 장점을 곧잘 발견하고 그걸 복돋아주는 김하나의 '칭찬 폭격기(김하나가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에서 얻은 별명이기도 하다)'적인 면모에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술을 마시고 어처구니없는 추억들이 쌓인다. 요리를 잘하고 또 잘 얻어먹는다. 이런 데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는 사실을 나는 동거인에게서 배워간다. 김하나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서 열린 새 세계다.

    - 26-27쪽


       어떤 차이는 이해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나는 김하나를 통해 세상에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잊어버리고 살다가 같이 장을 볼 때마다 새롭게 놀란다. 그리고 한 알 한 알 먹어치우는 동안 의아하다가 조금 슬퍼진다. 어떻게 이런 게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같은 걸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서 꼭 가까워지지 않듯,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곁에 두며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는 건 공존의 첫 단계다.

    - 34-35쪽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과연 함께 살기 좋은 대상이었을까? 아마 가슴속 깊이 이해하면서 진절머리를 내고 도망쳤을 것 같아. 참 다른 김하나와 함께 살면서 나는 조금은 욕심이 줄고, 얼마간 정돈되었고, 약간은 느긋해졌다(고 믿고 싶다). 이렇게나 다른 나와 같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 그렇듯이 김하나에게도 때때로 찾아오면 기쁘겠다. 과육이 단단하고 탱글한 육볼보라든가 달콤하고 새콤한 향이 조화로운 죽향 같은 딸기 종류를 새로 알게 된다거나, 치킨을 같이 먹을 때 내가 좋아하는 다리, 김하나가 좋아하는 날개와 목을 서로 양보라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거나, 그런 작은 여백이 채워지는 것처럼.

    - 36-37쪽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 좋은 점은, 세상이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거다. 그게 뭐냐면, 결혼을 안 해도 별일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결혼 안 해봐서 아는데, 정말 큰일 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생길 수 있을 별일 큰일을 곰곰 생각해봐도, 앞으로 점저 더 결혼할 확률이 낮아질 것 같다는 정도 외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 78쪽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불안하고 초조했던 건 결혼을 못 해서라기보다 '결혼 못 한 너에게 문제가 있어' '이대로 결혼 안 하고 지내면 너에게 큰 문제가 생길 거야'라고 불안과 초조를 부추기고 겁을 줬던 사람들 때문이라는 걸. 오지라퍼들이 아무리 까아내린다 해도 나는 내가 하자가 있는 물건도, 까탈스럽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안다. 다만 몇 번의 연애가 잘 되지 않은 시간이 있었고, 일이 너무 바쁘거나 재미있어서 새로운 사람 만날 시간이 없던 시기가 있었고, 결혼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소개팅을 나갔지만 번번이 상대와 가치관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와 이제 결혼하지 않은 채로도 잘 살아가고 있음을. 나만이 나는 나의 길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나는 남의 입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는 사람이며, 미안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행복하다.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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