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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옷과 전주
    여행을가다 2019. 4. 23. 23:40



      남을 쓰고 그리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나는 나만 아니까. 남은 모르니까. 타인에 관해서 쓰는 건 자주 실패로 끝났다.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 시도하고 썼던 대사와 문장들은 늘 어설폈다. 어설프지 않으려면 아주 주의싶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했으나 나는 남에 대해 쓰는 일에 성급하고 게을렀다.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인지 독자들에게 뽀록나며 창피를 당했다. 매 문장에서 밑천을 들켜버린다니 글쓰기란 두려운 일 같았다. 

    - 181-182쪽


      누구나 남을 자기로밖에 통과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나는 조금 위안이 되었던가, 아니 조금 슬펐던가.

    - 183쪽


      별수없이 각자의 돈벌이는 계속되었다.

      대학생과 잡지사 막내기자와 누드모델을 병행하는 동안 나는 틈틈이 글을 썼다.

      주로 누드모델 일의 디테일에 관한 수필들이었다.

      서럽고 고단했던 순간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모두 밑천이 되는 것 같아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 214쪽


       그러다가 이야기가 목까지 차오르는 날에는 글을 씁니다. 

       이야기를 파는 상인을 여전히 잊지 않았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이야기에는 맨 아래부터 저 꼭대기까지 모든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돈을 내기만 하면 상놈이든 귀족이든 극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첫 세대의 작가였습니다. 너무나 다양한 계층이 그의 연극을 보러 왔기 때문에 그는 여러 계층을 포함한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장사꾼보다 더 많은 장사 밑천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 233쪽



       우리는 전주에 있었다. 각자의 시간으로, 각자의 방법으로 전주에 모였다. 조용한 카페의 한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각자의 커피를 마셨고, 각자의 방법으로 읽어 온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 이슬아가 어린 시절 사랑을 무척 많이 받은 사람 같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 같다고도 했다. 모두들 이슬아가 무척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조했다.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 기억들이 일부 창작된 것이라 해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맞겠다. 사랑이 많아 어린시절 구석구석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무척이나 성실한 사람. 그녀와 소통한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도. 우리는 그녀의 이십대 초반 사진을 찾아보며 책 얘기를 마무리했는데, 사진 속 그녀는 아주 귀여웠다. 


       그날의 전주를 생각하면, 무척 맛있었던 에그 샌드위치(곱게 다진 달걀과 고소한 마요네즈, 잘게 썬 사과, 달달한 잼이 들어간), 함께 걸었던 전주의 길들(카페로, 가맥집으로, 숙소로), 쌓여가던 술병들(황태 부스러기와 함께), 모과의 그 분(누군가를 모임에 데려오는 건 애정어린 일), 소주맛이 1도 나지 않는다는 꿀주를 전파한 한나(봄이랑 나는 소주맛을 느끼고), 나란히 놓인 이부자리들(잠자기 전 급 요가타임도), 정말이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조림이의 깜짝 아침 방문(니카라과에 있어야 했는데), 아침의 해장국과 올해 첫 팥빙수(나눴던 대화들도), 교통법규를 위반하고 꽉꽉 채워 탔던 민정이의 자동차 안 풍경(미안합니다), 늘 리액션 최고 김소윤(애정표현도 최고), 또띠아 피자와 함께한 우리들의 고민들(소윤이의 농협 상품 추천), 그리고 한나가 혼자 남아 선물한 한옥마을의 근사한 일몰까지.


        제일 좋았던 건 함께 걸었던 길들. 나란히 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고, 야밤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이런 소소한 것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조림이. 조림이는 예전보다 일찍 니카라과에서 돌아왔는데, 모임날 서프라이즈로 놀래켜주려고 좋아하는 SNS도 끊고 두문물출하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서울에서 당연히 모임을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주를 내려간다고 하네, 그것도 잔뜩 가네, 전주를 가야겠네, 하면서 새벽 기차를 탔고, 숙소 방을 알아내기 위해 이곳저곳 연락을 했단다. 우리는 평온하게, 나란히 누웠던 숙소 방에서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니카라과에 있어야 할 조림이가 표범털옷을 입고 까르르 웃어대며 나타난 것. 


       우리는 서프라이즈를 위한 그녀의 수고를 생각하며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진짜 대단한 사람! 시크한 척하면서 잘 웃지 않지만 실은 마음 속에 엄청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사랑을 보여주면 마주앉은 사람 또한 사랑을 주게되고 그러면 그것은 엄청나게 큰 사랑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러니 우리의 사랑이 앞으로 더욱더 커질 것도. 나의 삼십대 중후반을 함께한 시옷. 좋은 사람들과 좋은 책을 읽고(잘 읽읍시다), 고민과 사랑을 나누면서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다. 












    포토바이 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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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에서도 사먹은 공주밤빵. 여러분 전라도 갈 때 꼭 사먹어야 합니다. 따끈따끈한 것이 최고.

    조림이가 원조알림이를 헷갈리긴 했지만(나라구!), 결론은 정말이지 J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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