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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잔상들
    서재를쌓다 2019. 1. 13. 21:29


     

       12월 15일 토요일이었다. 일찍 일어났고 상암 메가박스 상영시간표를 검색해봤다. 조조 <갈매기>가 있었다. 망설이다 일어났고 세수를 하고 커피를 내렸다. 상암 메가박스에는 맛난 라떼를 파는 커피집이 있는데 조조 시간대에는 문을 열지 않더라. 겉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영화 시작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극장 한 켠에 앉았다. 12월 어느 날,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다정한 추천 메일을 받았더랬다. 작고 단단한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야근중인 사무실 책상에서, 극장 안에서, 밤거리에서, 새벽녘의 작은 방 안에서 나는 발표할 기약 없는 이 글들을 십 년간 조금씩 써나갔다. 그러면서 차츰 투명한 응시가 과거를 미래로부터 발견해내는 일임을, 다가올 이미지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써나가는 작업, 글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영속시키는 일이 사랑의 행위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취하는 하나의 간절한 자세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내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었듯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러하길 바라며.

       이제 내가 겪고 느낀 그날들의 반짝임을 전하려 한다." (16쪽)


       프롤로그였다. 토요일 이른 아침의 공기과 글의 고백이 내게 어떤 기운을 전해주었다. 약간의 용기.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덮고 상영관 입구에서 표를 보여주고 9관 F열 통로 바로 옆자리에 앉아 오래 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았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고, 서로 사랑했고, 질투했고, 배신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다. 어떤 인물이 어떤 인물의 미래 같기도 했고, 어떤 인물이 어떤 인물의 과거 같기도 했다.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었다. 이 영화를 보았다는 나의 메시지에 S는 김영하의 추천 영상을 보내줬는데, 김영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읽지 않은 사람을 나는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읽고 나면 인생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은 여러모로 완벽했다. 


       혜령의 <사랑의 잔상들>도 영화 <갈매기>도 내게 쉽지 않았는데, <사랑의 잔상들>은 어떤 이야기보다는 읽고 난 뒤 마음에 생긴 조그만 물결 같은 것이 책의 제목처럼 흐리게 남아 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 봐, 하면 어쩐 일인지 설명이 잘 안 된다. 그녀의 시를 한 편도 읽지 않았지만, 시인의 산문집 같았다. 작가소개에 따르면, 십 년간 발표가 기약되지 않은 글을 써 온 그녀는 2017년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 잔상(殘像) : 시각에서, 외부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잠깐 지속되는 상. 잔류 감각.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지난 가을 당신이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어쩌면 당신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혼자 마음을 다스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늦은 밤이 다 되어 나타난 당신은 미안하다거나 왜 늦었는지에 대한 설명 하나 없이 이제 나갈까, 한마디 말을 내곤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우리는 오래 알았지만 어떤 사이도 아닌 관계였다. 누군가 내 손을 그런 식으로 잡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모르는 손에 이끌려 가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손을 따라갔다. 그는 알지 못했겠지만 눈앞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12쪽)


       그들은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를 곁으로 끌어들이기보다 그저 고독 안에서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이는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조차 지켜야 할 거리가 있음을 아는 자의 태도를 뜻한다. (67쪽)


       호세 루이스 게린의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영화 <실비아의 도시에서>(2007)가 떠오른다. 감독은 예술학교를 다닐 때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십수 년이 지난 어느 외국의 거리에서 발견하고 따라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따라간 것은 자신처럼 나이든 여성이 아니라, 사랑에 빠졌던 그때 그 나이의 여자아이였다. (94쪽)


       사진가로서의 낸 골딘을 세상에 알린 작업은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은 그녀 자신의 얼굴 사진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그를 애증했던 자신의 시간을 낱낱이 기억하고자 셔터를 눌렀다. 어떤 사람을 사랑했다면 그와의 좋았던 시간만이 아닌 모든 시간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처럼 주어진다. 그녀는 사진을 찍어 자신의 기억을 수정할 수 없는 것으로 고정하고자 했고, 그러자 비극을 걷어낸 자리에는 가차없는 한 장의 이미지만이 남았다. (116쪽)


       빛은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도 결국 지나간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데는 어떤 시간이 필요하다.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집 <사랑의 방>에서 '첫번째 사랑의 방'은 뒤엉켜 있는 밝은 방 안의 연인들로 시작된다. 그러나 '마지막 사랑의 방'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방의 한 모서리를 보여주며 끝난다. 금간 벽 한 귀퉁이, 모서리들이 만나는 한 점으로 눈길이 모아진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 우리가 한때 서로의 모서리가 닿았던 지점을 가만히 응시하듯이. (125-126쪽)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반딧불의 잔존>을 통해 말한다. 오늘날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어두운 곳에 있지 못한 거라고. 그러니 반딧불을 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상한 말이었다. 어떤 것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충분히 어두워져야만 한다는 것은, 그렇지만 뒤늦게 도착한 극장의 어둠 속에 서 있을 때면, 이해하지 못한 영화 앞에서 잠들고 난 다음이면, 왠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45쪽)


       영화 속 두 사람은 어렸을 적 프랑스의 작은 도시 셰르부르에서 만났다. 여자는 어머니 몰래 남자를 만나며 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고 그들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결별을 맞는다.

       여자는 남자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믿었으며 그와의 하룻밤에서 생겨난 아이를 받아줄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그러나 슬픈 기적처럼 남자는 살아 돌아온다. 그는 애인이 배신했다는 쓰라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기다려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이후 그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서로가 연인이던 시절 그들의 아이 이름으로 생각해두었던 이름을 붙인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그들이 사랑을 떠나보내는 동시에 그것을 자기 안에 존속시키는 방식이었다. 눈 오는 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주인과 손님으로 수 년 만에 재회한 연인은, 담담한 태도로 서로의 아이 이름을 확인하고 그저 안부를 묻고는 헤어진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말을 보며 영사 사고가 난 것이라 믿었다. 오래도록 영화가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도 영화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될 때 이전의 감정을 떠올릴 수 있도록 보았던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다시 찾아보는 법을 알지 못했다. 또 그때까지의 영화라는 건 쉽게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이미지들이 나에게 남은 전부였다.

       그것은 아날로그의 마지막 시대에 있었던 일.

        그 시절의 기억과 이미지는 얼마간의 부재로 채워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기억이 언제나 재생 가능하고 그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마저 늘릴 수 있기에 이미지에 대한 절박함이 사라진 지금과는 다른 시절의 이야기다. (176-177쪽)


       그해 여름 몰리노는 내게 현실의 공간이었지만 한국에 돌아오자 그것이 비현실적인 이름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무렵 나는 배수아의 <이바나>란 책을 읽었고, 작가가 독일에서 이바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보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바나. 그것은 오래되고 붉은 자동차의 이름이거나, 내가 앞으로 여행하려는 곳, 또는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의 이름. 나는 그녀가 이바나를 특정한 대상의 이름으로 쓰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바나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돌아와 몰리노를 이야기하거나, 몰리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몰리노를 말한다 해도 당신은 내가 보았던 그 도시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몰리노가 허구의 이름으로 들린다면, 나는 허구의 몰리노들을 지어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편에 더 사실적인 감각을 전할지도 모른다. 

       여행이 끝나자 내게는 몇 가지 비밀이 생겼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먼 곳으로 떠나본 사람은 누군에게나 각자의 몰리노가 있음을 알게 된다. (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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