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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딩, 턴
    서재를쌓다 2018. 2. 15. 00:19



       책을 먼저 건넨 뒤, 친구는 내 얘길 가만히 듣더니 말했다. 그 책이 지금 너한테 좋을 것 같아. 잘 읽어 봐. 친구는 두 권을 사서 한 권에는 내 이름을, 다른 한 권에는 자기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단다. 어떤 부분은 정말 설레였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친구가 한 말이 맞았다. 후반부는 좀 아쉬웠다. 후반부에 내가 한 생각은, 아, 소설이구나. 소설을 읽어도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 좋다. 지어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설. 요즘 내가 계속 찾고 있는 소설. 마음에 툭툭 걸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우리가 함께 춤추는 순간들은 정말이지 행복했는데,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렇지만 춤추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함께 한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 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여자에게 처음 만났을 때 부터의 마음에 대해 고백한다. 단둘이서 술을 마시게 된 봄밤에. 여자는 남자가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요새 직장 문제로 힘이 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MP3 플레이어에 음악을 담아 마음을 전하고, 일에 지친 여자는 플레이어를 내내 가지고 다니기만 하다 야근을 하던 어느 밤에 듣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만나기로 했는데, 여자가 야근 때문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남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말한 밤이다. 여자는 음악을 듣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움직이고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겠어, 생각하며 약속장소였던 카페로 간다. 남자가 있다. 여자가 들어온 지 모르는 남자는 컴퓨터를 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는 지 문쪽을 보고, 또 컴퓨터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지 않고 건너편에 앉아 남자를 가만히 지켜본다. 다음은 소설의 문장,


       영진이 빈 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걸 보고 지원은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대각선을 봐요.

       영진이 노트북 화면과 출입문을 차례로 본 뒤 지원을 쳐다보기까지 몇 분이 걸렸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지원은 환하게 웃으려고 했으나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뜻밖의 상황에 영진과 지원 모두 당황했다. 영진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지원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웃으려 애썼지만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사 일에 지쳐서 몇 달 동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빗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영진이 지원의 등을 토닥이다가 팔을 둘러 가볍게 안았다. 지원은 영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왜 울어요.

    - 고마워서 그래요.

    - 뭐가 고마워요.

    - 기다릴 줄 몰랐어요. 

    -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 카페 안에 흐르던 음악과 소음, 그들을 둘러싼 것들이 모두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둘만 남고 둘만 보일 때, 세계에서 분리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한다는 고백뿐일 것이다. (142-143쪽)



    그리고, 마음에 툭툭 걸렸던 문장들.


    - 그때 우리도 일찍 와 있었잖아. 그런데 30분 내내 '사랑의 인사'가 흘러나오는 거야. 아, 결혼생활이 이렇다는 거구나. 제일 좋아하는 시디를 한 장 고른 다음 평생 들어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쉽더라고.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메타포였던 거야. (10쪽)


       7년 전에 연애를 시작하면서 영진을 소개했을 때 이나는 착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고 했고 승아는 반듯하고 소신 있는 사람 같다고 했다. 언니는 순한 것 같지만 고집스러운 면이 느껴진다고 했다. 대체로 영진의 소탈함과 모범생 기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지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든 말이 모여 영진의 된다는 걸 알았다. (121쪽)


       취객들의 대화에 지원은 소리 내어 웃었다. 흩어지고 사라질 웃음이지만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무너질 때 사람을 끝까지 지탱하고 보듬어주는 게 있다면 유머와 애정일 것 같았다. (123쪽)


       결혼생활 내내 지원은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생각했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진다. 그나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해도 그 앎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보석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130쪽)


       나이가 먹어갈수록 호감이 반감으로 바뀌는 건 쉬워도 무감이나 비호감이 관심과 애정 쪽으로 돌아서기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진에 대한 감정은 처음 손을 잡은 봄밤 이후로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싫은 건 아닌데 영진이 더 만나자고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너편에 홀로 앉아 있는 영진의 허기와 고단함과 외로움이 이쪽으로 건너왔다. 오지 않아도 기다리겠다고 하는 마음과 실제로 기다리는 마음, 기약 없음을 견디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해보았다. (141-142쪽)


       언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인생의 어떤 순간에 접어들 때마다 그런 가정을 해봤다. 결론은 사는 게 심심했겠지, 인생의 많은 부분에 대해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로 모아졌다. 점점 더 언니가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니는 지원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현지인 가이드처럼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학년과 학교의 삶에 대해 알려주었고 선진 문물을 전수하듯 좋은 노래와 영화를 소개해주고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저만치 앞서가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지원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인생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축복이라는 걸 어른이 되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162쪽)


    ... 시간과 물질과 감정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164쪽)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자정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여름밤의 공기는 서늘했고 수박 냄새가 났다. 음악 잘 들었다고, 힘들었는데 위로가 됐다고 하자 영진은 말없이 웃었다. 오랜만에 지원은 자기 손이 아니라 맞잡은 영진의 손에 집중했다.

       그 뒤로 사귄다거나 애인이라고 말할 때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 사이는 좁아지고 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었다. 영진과 함께 있는 게 자연스럽고 제 옷을 입은 것처럼 편했다. (197-198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뭘까. 지원은 자주 영진에 대해, 영진을 사랑하게 된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때면 사랑을 마법에 비유한 표현들에 수긍이 갔다. 그날 카페에서 영진을 만난 이후로도 일상은 똑같고 인생의 구성요소는 그대로인데 감정의 결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 일의 순서를 조정하고 먼 길을 달려가고 오래 기다렸다. 그런 장애들이 사랑의 방해물이 아니라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다. 별것 아닌 일도 상대에게 얘기하고 의견을 물어보고 반응을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울어지고 그와 겹쳐졌다. 그동안 삶의 중심에 있던 것들이 영진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번에는 온도와 색채가 달랐다. (198-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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