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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서재를쌓다 2018. 1. 4. 23:23



        집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창문을 연다. 현관을 연다. 그러면 바람의 움직임이 생긴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살랑살랑 가늘게, 어떨 때는 두껍게, 가끔은 몰래, 또는 세차게 다양한 바람이 지나간다. 거기 어디쯤 장소를 정해서 가늘게 자른 무, 푸른 잎, 배를 가른 생선, 작은 베리류, 고깃덩어리 등등 생각나는 대로 뭐든지 말린다. 요즘은 배추꼬랑이에 푹 빠져 있다. 채에 펼쳐서 며칠 동안 말린 다음 그것을 잘게 채 쳐서 된장국에 넣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 43-45쪽


        어른들의 여름이라면 역시 아이스케키가 아니라 하이볼이다.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긴자의 바 '록피시'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바텐더인 마구치 씨가 직접 만든 하이볼이야 당연히 끝내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나는 이 바의 메뉴를 읽는 것이 너무나 좋다. 지나치게 간결하다 싶을 정도로 한 줄 또 한 줄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걸 보면 상상력이 샘솟고, 마치 깊은 맛이 나는 장편소설처럼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 59쪽


       식은밥은 그런 것이다. 차갑게 식어버려서 밥솥에서 굴러다닌 밥. 금방 지은 그때의 따끈따끈함도 광택도 완전히 사라져서 딱딱하게 뭉쳐져 있다.

       그것을 그릇에 담는다. 약간의 조림이나 절임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훌륭한 반찬은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꾼이 될 뿐이다. 식은 채로 그릇에 담아 체온을 전달하듯 들고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여서 입으로 운반한다.

       그때 깨달았다.

       어느 늦은 오후, 혼자서 식은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밥맛이 좀 달랐다. 금방 지은 뜨거운 밥과는 맛이 전혀 달랐지만, 그전까지는 몰랐던 맛, 여태껏 깨닫지 못했던 맛있는 맛이 찬밥에서 느껴졌다.

        밥은 식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저금이 줄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고마움을 알 듯. 무겁고 차가운 밥에는 씹으면 씹을수록 올라오는 듬직한 단맛이 난다. 점성이 좋고 아밀로오스가 낮은 것이 특징인 쌀이 식은밥에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이건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밥이 식으면 쌀알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정체를 드러낸다.

    - 76-77쪽


       설거지를 한 후에 늘 하듯이 수건으로 깔끔하게 닦는다. 힘을 약간만 더 줘 열심히 닦는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주문을 외우면서.

       "빨리 자라라."

       그렇게 3년, 4년... 세월이 지난 후의 어느 날 아침, 평상시처럼 천으로 닦는데 손가락 끝에 갑자기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미끄르르, 주르르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감각에 나는 별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그릇으로 시선을 던졌다.

       "앗!"

       숨이 멎을 뻔했다.

       밤나무 결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밤나무의 연륜이! 빛나는 흑색 옻칠 속에서 나뭇결에 조각되어 있던 아름다운 모양이 청명한 아침 공기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 124쪽


        제일 처음에 사용한 것은 겨울에 귤 목욕을 할 때였다. 바짝 말린 귤 껍질을 주머니로 된 무명천으로 싼 뒤 욕조에 띄운다. 그러면 흰색 무명천 주머니에 공기가 들어가서 뜨거운 물 위에 두둥실 뜬다. 뜨거운 물에 감도는 귤 향기, 정말 기분이 좋다.

    - 207쪽


       그러나 고생도 인내도 다 갚아주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철 주전자는 준비하고 있었다. 끓인 물을 먹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달콤하다. 달콤한 이슬이 혀 위에서 데구르르 굴러가는 듯 부드럽고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촉감이다. 물이 이렇게 맛있다니,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철 주전자를 사용하고 나서부터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을 석 잔이나 마신다. 느긋하게 철 주전자로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몸이 기뻐한다. 물론 센차도 호지차도 메밀차도 보리차도 훨씬 맛이 좋아졌다.

    - 226쪽


       "주방에서 사용하는 행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답니다."

      아까워하지 않고 마구 사용한다. 많으면 그만큼 쉴 수도 있으니까 덜 닳는다. 다시 말해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뜨거운 냄비를 잡을 때 쓰기도 하고, 냄비 받침의 대용으로 쓰기도 하고, 갓 구운 빵을 싸기도 하고, 주방에서 사용할 만한 곳에는 눈치 볼 것도 없이 막 사용한다.

       30장이나 되는 리넨은 출신이 참 다양하다. 다국적이다. 아일랜드를 필두로 벨기에,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등. 각각 미묘하게 분위기도 다르고 짜임새도 다르다.

    - 232쪽


       어둠을 되돌리고 싶다. 어둠 속에 봉인되어 버린 비밀스런 숨결을 일상 속으로 다시 가져오고 싶다. 촛불의 불빛을 고집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친숙한 어둠의 기억을 더듬는다. 저녁 하늘에 쏘아 올리는 불꽃, 반딧불의 불빛, 은하수, 축제의 초롱, 등롱, 모기향 끝의 빨간 불꽃...

       모두 여름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여름의 어둠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다. 거기에 촛불이 함께한다면 달콤한 허무함이 깃든다. 그것은 흐릿한 겨울 촛불의 무게와는 또 다르다.

       전등을 하나 끄자. 그 대신 빛을 하나 더하자. 몸을 숨기고 있던 어둠 속 이야기가 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 285쪽


        선물은 가끔 귀찮다. "어머, 고마워." 하고 순수하게 기뻐하고 싶은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휩싸인다. 종이 가방 채로 건네지는 것보다 풀기 쉬운 보자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과자가 훨씬 고맙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보자기에 싸기만 한다고 다 좋다는 건 아니다. 싸고 비싸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건 상관없다.

    - 289-291쪽


       무게감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지만,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은 되어 보고 싶다.

    - 324쪽




       두번째, 아니 두번째 반반의 히라마츠 요코 책이다. (이전의 한 권은 읽다가 중단한 상태) 병원에 있을 때 읽었는데, 그때는 첫 책보다 심심하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옮겨 적다보니 역시 좋았네. 아침에 일어나 맑은 물을 세 잔 연거푸 마시고 싶어지고, 여행지에서 행주로 쓸 린넨을 하나씩 사오고 싶어지네. 시원한 바람이 불 초여름이 기다려진다. 좋아하는 이에게 줄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선물 포장을 상상해본다. 어제 불광의 북카페에서 산 옥빛의 작은 빈티지 접시를 잘 써야지 생각했고, 내일부터 먹는 귤은 껍질을 잘 말려 보아야지 생각했다. 욕조가 있는 숙소로 여행을 갈 때에 무명천이랑 같이 가져가야겠다. 입맛이 없을 때 (사실 그런 날은 없다) 식은 밥에 미지근한 물을 말아 먹어봐야지. 그러려면 좋아하는 낙지젓을 사두는 게 좋겠다. 올 여름에는 시원하고 진한 하이볼을 간단하지만 좋은 안주를 두고 마셔야지. 좋은 사람이 함께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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