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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포선셋
    모퉁이다방 2017. 12. 6. 22:00



       지난 주의 일. 연차였고,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충무로의 병원에 갔다가 광화문까지 걸었다. 든든한 걸 먹고 싶어 광화문 국밥에 갔다. 깔끔하게 맛나더라. 좋아하는 오짓어 젓갈도 반찬으로 나왔다. 바 자리에 앉아 그릇을 싹싹 비웠다. 영화를 바로 볼까 커피를 한 잔 마실까 고민하다가 테라로사에 갔다. 그 전주에 친구랑 처음 갔는데 엄청 맛있는 머핀을 발견했거든. 그날 친구는 십년도 더 된 일을 말하면서 그때의 생각들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때는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 친구에게도 찾아왔다고. 그때 그 일이 내 일이 아니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사람인 거라고 말해줬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그때 함께 먹었던 머핀을 하나 시키고, 그때 마셨던 핸드드립커피도 시켰다. 머핀은 세 개를 더 포장했다. 하나는 동생을 줬고, 두 개는 주말에 친구집에 놀러갈 때 가져갔다. 머핀에는 단호박과 크림치즈가 들어가 있다. 단호박이 맛있을 때여서 머핀이 이리 맛있는 건가. 창가 바 자리에 앉아 소윤이가 작년 생일에 선물해준 책을 꺼냈다. 연두색 어여쁜 표지의 <브루클린>. 책장에서 오랫동안 묵혀둔 뒤, 영화의 영상들이 희미해질 때쯤 꺼냈는데 읽기 시작하니 영상들이 금새 또렷해지더라. 아일리시가 미국에 입성도 하기 전인데 벌써 세 번이나 울어버렸다. 책 선물은 어쩜 이럴까. 고작 만원 남짓인데, 그 책이 품고 있는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깊어서 나는 그 세계 전체를 선물받는 거다. 그러니까 고작 만원 남짓이 아닌 거다. 잠시 책을 덮어두고 그 광활한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극장 시간표를 보고 전철을 탔다. 두 개의 영화 중에 고민하다가 울적한 영화는 오늘 보고 싶지 않다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골랐는데. 흠흠흠. 한때 나는 영화관에서 쿨쿨 잘도 자는 아이였다. 돈을 내고 봐도 잘도 그랬다. 최근에 그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모든 영화시간들이 내게 소중했는데. 자고 말았다. 아침 일찍 나와서 추운데 많이도 돌아다녔지. 따뜻한 극장에 들어오자마자 노곤함이 느껴졌지.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 기대를 해서 그런지, 영화가 별로였다. 지루했다. 옆옆 자리의 여자 아이도 계속 몸을 비꼬는 걸 보았다구. 기억나는 건 몇밤을 자는 기차여행의 낭만, 깜깜한 밤과 눈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광경, 우리의 탐정 선생님이 찰스 디킨스 소설을 읽으며 너무나 재밌다는 웃음소리를 내던 장면들, 그 문고판의 자그마한 책을 항상 손에 쥐고 있던 식당칸 풍경. 아무튼 나는 잤다. 그러고 나와 춥지만 오늘 끝까지 걸어보자며 집까지 불광천 길을 걸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분홍빛으로 예쁘게 바뀌고 있었다. 아, 이뻐라. 사진을 찍었지만, 역시나 실제 빛깔만큼 잘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걸으면서 눈에 계속 담아뒀다. 그렇게 40여 분을 걷고 응암역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틀다가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봤는데, 아아, 거기에 더 예쁜 빛깔의 하늘이 있었다. 지금까지 본 여리여리한 분홍빛이 아니라, 선명한 주홍빛의 노을과 곧 다가올 짙은 밤의 어둠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이런 거구나. 뒤돌아보면 더 아름다운 발자욱들이 새겨져 있겠구나. 등 뒤에서 말없이 따라와 준 하늘이 정말,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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