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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월 사일
    모퉁이다방 2017. 10. 10. 21:54






        우리는 장유의 임시 시외버스정류소 바깥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으로 장유에서 고성으로 가려면 창원으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야 했는데, 작년부터 바로 가는 버스가 생겼다. 그 버스는 김해에서 출발해 장유를 거쳐 배둔에서 한번 서고, 고성에서 또 한번 선다. 그 다음 번에는 어딜 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저녁 7시 반에 출발하는 막차를 타려고 왔다. 임시 정류소에 근무하는 얇은 가디건을 걸친 직원이 나와 지금 김해에서 차가 많이 막혀 제 시간에 버스가 도착 못하고, 많이 기다려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류소까지 차로 데려다 준 숙모와 사촌동생은 같이 기다려준다고 했다. 괜찮다고 우리끼리 기다리면 된다고 몇번을 말했지만, 숙모는 니네랑 이렇게 잠시동안 여유롭게 앉아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숙모는 정말 그런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고맙다고 말했다.


        취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촌동생이 날짜를 잡았다. (그 사촌동생과 정류소에 함께 온 사촌동생은 형제이고) 추운 1월에 강원도 삼척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단다. 숙모는 집에서 명절음식을 준비할 때는 별말씀 하지 않으셨는데, 조금은 쌀쌀한 밤공기가 가득한 버스 정류소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뭔가 이야길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건 사촌동생한테는 비밀인데, 라며 운을 떼셨다. 사실은 걱정스럽기도 하다고, 마냥 해맑게 오빠야를 보고 달려 오는 그 마음이 언젠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한다고, 조용히 간직해 온 어떤 마음을 슬며시 꺼내놓으셨다. 우리는 그렇기도 하겠지만, 밝은 아이니까 혹여 어려움이 닥쳐도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한 숙모의 어린 시절 꿈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나는 그 이야길 다 듣고 숙모에게 말했다. 그러면 숙모는 꿈을 다 이루셨네요. 숙모는 자상하지만 너무나 꼼꼼하신 아버지 때문에 좀 널널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고 (삼촌을 만났다), 친척이 거의 없어 늘 명절때는 가족들이랑만 지내서 복작복작한 대가족으로 시집가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들'을 만났다)


        버스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뒤에 도착했다. 삼촌이랑 사촌동생이 왜 이렇게 안 오나, 걱정하겠다고 하니, 니네 삼촌은 그냥 늦게 오는 가보다 생각하고 야구나 보고 있을 거다고 하셨다. (그렇다, 진정 꿈을 이룬 숙모인 것이다)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보름달이니 소원을 빌자 라고 숙모가 말씀하셔서 다 같이 달을 올려다봤다. 우리 중 누군가는 소원을 빌었을 거다. (나는 빌었다) 내가 말했나, 숙모가 말씀하셨나. 둘 중 누군가가 말했다. 오늘 이 벤치에서의 밤이 언젠가 많이 그리울 거라고. 늦게 오는 버스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고.


        정류소 밖에서 수다가 무척 는 아버지의 긴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팔 차림의 사촌동생이 춥다며 유리 가림막 안으로 들어왔고,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지셨다. (삼촌보다 훨씬 더 널널해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아버지인 것이다.) 가디건을 걸친 임시 정류소 직원이 나와 이제 버스가 거의 다 도착했다네요, 라고 말해주고 들어갔다. 다급해진 동생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플라스틱 믹스 커피컵이 세 개 들려 있었다. 버스가 곧 온다는 전화에 뜨거운 물도 못 붓고 계산만 하고 그냥 왔다며 숙모에게 집에 가서 마시라고 드렸다. 숙모가 집에 커피 많다며 아주버님이 가져가서 드세요, 라고 다시 주셨다. 버스가 왔고, 우리와 숙모와 사촌동생은 추석인사와 밤인사를 따뜻하게 나누고 헤어졌다. 아버지가 가져온 커피믹스는 다음날 아침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채워가 남산 벤치에서 책을 읽으며 잘 마셨다. 다가오는 1월에 삼척에 간다. 겨울바다 보고 올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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