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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서재를쌓다 2017. 6. 6. 03:09



       지금 시간 새벽 2시 20분. 정말정말 오래간만에 잠이 오질 않는다. 사실 아까 한 차례의 고비가 찾아왔는데, 영화를 보던 중이었고, 내일 쉬는 것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러고나니 잠이 달아났다. 한때 내가 사랑하던 새벽 시간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열 두시 되기 전에 잠들어 푹 자는 것이 가장 큰 행복. 간만에 새벽의 행복을 맛보고 있다. 잠이 확 달아나버려 아예 일어났다. SNS에서 오지은이 알려준 뒤로 냉밀크티를 종종 해먹는데 맛있다. 우유에 홍차잎을 가득 담아 냉장고에 밤새 넣어두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단 걸 안 좋아해서 시럽도 안 넣고 그냥 마신다. 내일 아침에 마셔야지. 그러고 물을 끓여 차를 우려냈다. 우유도 살짝 섞었다. 노트북을 켜고 책장에서 책을 가지고 왔다. 올해 시작하며 읽었던 책. 소설 속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사실 빗소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서울에는 큰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 시원한 장대비가 내일 쉬는 내내 내려주면 좋을텐데. 오늘은 퇴근을 하고 합정의 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여러 권 팔았다. 다 팔고 이만 삼백원의 현금을 받았다. 가지고 간 책 중 한 권은 매입을 못한다고 했다. 직원이 말해서 보니 음료자국이 책귀퉁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라. 아무래도 유용할 것 같아서 어제, 아니 그제 마트에서 아이팟 셔플을 샀는데, 그 가격을 충당해야 한다. 정말 뜻밖에도 자주 애용하던 블로그 의류 마켓에서 그동안 잘 모르고 받았다던, 자기네 이익으로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던, 카드 수수료를 돌려준다고 했다. 이렇게 저렇게 모으면 셔플 가격이 나올 것 같다.

        내게 귀중한 새벽 시간이 있었을 즈음엔 돈은 없고 시간은 무척 많을 때여서 매일 도서관에 갔더랬다. 읽고 기록을 남기는 일이, 아무 대외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을 때였으니까 소중했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하고 있다, 라고 스스로 위안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반납을 해야 하니까, 언제고 읽어보고 싶은 좋은 구절들은 표시해뒀다가 다 기록해뒀었다. 나중에 읽어보니 참 좋더라. 그때보다 시간은 없어지고, 돈이 좀더 생기자, 도서관까지 가는 일이 귀찮아서 읽고 싶은 책이 있음 무조건 사게 된다. 그러다보니 기록하는 일에 게을러지고. 돈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은데, (무척 좋았지만 한번으로 되었다) 그때의 기록에 대한 집착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리하여, 잠이 깨어버렸고, 내일은 황금같은 공휴일이고, 빗소리를 좀더 기다려보자 생각하며 좋았던 구절들을 옮겨 적어본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추천받은 대로 참 좋은 책이었다. 좋은 기록을 남기고 싶었는데, 미루다 미루다 구체적이었던 마음들이 둥글둥글해져 버렸다. 흠. 이 소설을 생각하면 나무들이 무성한 좋은 숲길을 걷고 싶어지고, 방금 끓인 물로 만든 몽글몽글한 밀크티에, 지금 막 구운 "밝고 마른 햇볕 냄새가 나는" 스콘을 잼과 크림을 듬뿍 발라 먹고 싶어진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어지고, 지금 내게 중요한 일들이 훗날 희미하게 잊혀지거나 되려 선명하게 새겨지겠구나 생각도 한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이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작가 소개에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은 이렇게 축약된다.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로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며 뒤따르는 주인공 청년의 아름다운 여름날."

    *

    선생님은 산책을 가신 것 같다. 밤의 숲에서 차가워진 공기가 망사문을 통해 천천히 들어온다. 여름 별장은 다시 조용해진다. - 9쪽

    우체통 바닥에 편지봉투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남았다. - 17쪽

       나는 나한테 배정된 이층 서고에 짐을 갖다놓고는 양말을 벗고 맨발이 되어보았다. 나무 바닥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다. 여름 내내 맨발로 보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을 열자, 눈앞에 커다란 계수나무가 보였다. 늦게 온 치프 격인 가와라자키 씨 차가 계수나무 밑을 빙 돌아서 주차하는 참이었다.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간다. - 27쪽

      런던 식료품 가게 로고 마크가 작게 인쇄된 캔버스지 에코백은, 물렁하고 부드럽게 손에 녹아들었다. 여러 번 빨았는지 가게 전화번호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이 에코백은 내가 모르는 마리코의 시간을 알고 있구나. - 97쪽

       "남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돼오는 것을 좋아해. 빙빙 돌리거나 복잡한 것은 싫거든. 새들도 세력 범위라든다 사랑이라든가 심플한 것을 노래하니까 순진하고 예쁜 소리를 내는 게 아닐까?"

        커브가 끝나도 똑바른 길이 앞에 펼쳐지고 뻗어 있다. 마리코는 다시 가볍게 액셀을 밟는다.

        "순진하고 밝은 것은 탁해지지 않아."

        "밝고 낭랑하게 노래하지 않는 새도 있어요." - 98쪽

    나는 이 너무 조용하지 않은 고요함이 좋았다. 우치다 씨 목소리도 큰 상수리나무 부근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겹쳐서 아마 나한테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 104쪽

       선생님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 180~181쪽

       여름 별장에 들어가자, 유리창이 열려 있는데도 벌레 소리가 썰물처럼 사라졌다. 식당에는 우치다 씨가 구운 어린양고기 로스트 냄새가 로즈마리 향과 섞여 여유롭게 떠돌고 있었다. 암흑은 집 밖에 머물러 있었다. 집은 옛날부터 이렇게 어둠의 압력에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을 것이다. 난로 앞 소파에는 이구치 씨와 마리코, 그리고 선생님이 계셨다. 식당에 들어가자 마리코가 우리를 보고 "어서 와"하고 말했다. 이야기 소리가 한순간 그치고 세 명의 시선이 우리에게 부어졌다. - 248~249쪽

        선생님은 노안경을 벗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 286쪽

       "그게 재미있는 점인데 뻔뻔한 꽃에 한 해 줄기나 잎사귀는 패기가 없어요. 줄기에 맥이 없거나 잎사귀와 잎사귀 사이가 이상하게 휑하거나 뭔가 전체적으로 감칠맛이 없고 힘이 없지요. 꽃이 에너지를 다 뺏어간 것처럼. 큰비라도 내리면 제일 먼저 고개를 숙여버리고, 한 송이만 잘라서 꽃병에 꽂으면 그 순간 의기소침해진 것처럼 생기가 없어지죠. 뻔뻔한 꽃들은 떼를 지어요. 고독에 약하지." - 316쪽

      "꽃은 그냥 사랑하면 되지만, 계통을 더듬어가거나 번식하는 지역이랑 기후를 조사하다 보면 그런 모양이 된 이유와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돼요." - 320쪽

       "우치다는 그만 됐어요. 요컨대 사카니시 군에게 선생님이 반한 거니까." 후지사와 씨는 그렇게 말하고 명랑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결정하는 것은 슌스케 씨가 아니잖아요. 사카니시 군하고 마리코지.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둘 다 아직 황당할 만큼 젊으니까."

      나는 되돌릴 말을 못 찾은 채, 후지사와 씨 댁을 나왔다.

      "잘 가요. 오늘은 고마웠어요."

       헤어질 때 후지사와 씨는 여느 때의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 369쪽

    *

      스콘 먹는 부분들은 다 좋은데, 너무 길어서 옮길 수가 없네. 맛있는 스콘 먹을 때마다 이 소설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러면 집에 와 다시 그 구절들을 들춰볼테지. 오늘 새벽시간이 찾아온 덕분에 좋은 기운이 담긴 곳을 발견했다. 여름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D-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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