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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에 우리 영혼은
    서재를쌓다 2017. 2. 27. 23:12




     


       제주도에 가져가서 다 읽고 오려고 했지만, 역시나 여행에서는 얼마 읽지 못했고 다녀와서 다 읽었다. 표지도 좋고, 크기가 작고 두께가 얇은 것도 좋은데, 글씨가 좀 크다. 글씨를 적당히 줄이고 더 얇게 만들어도 좋았을 텐데. 작가 소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콜로라도 주를 배경으로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만들고 쓴 소설 <이븐타이드> <베네딕션> 등, 총 다섯 편의 소설과 유작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남기고 2014년, 71세에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상의 마을을 만들고 그곳의 이야기를 연이어 쓰다니,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멋진 가상의 마을 '홀트'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며 오랜 시간을 보낸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의 남편도, 남자의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여자는 남자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과 자러 자신의 집에 와달라고. 혼자가 된 지 오래되어 외롭다고. 외로우니 밤에 자신을 찾아와 함께 잠을 자고,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아니, 섹스는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읽은 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 p. 9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낸다. 처음엔 어색하고 긴장했지만, 점점 편안해진다. 여자는 와인을, 남자는 맥주를 한 잔씩 하고 여자의 집 이층으로 올라가 이를 닦고 침대에 나란히 눕는다. 잠들기 직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 나눈 이야기들은 대체로 가벼운 것들이었지만, 함께 지내는 밤이 늘어날 수록 대화는 깊어진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서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밤에 그런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러면서 두 사람은 깊어진다. 벌레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아늑한 여름밤처럼 깊어진다.


        그러기를 원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미 말했듯, 난 더이상 그렇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잘 사는 길이 아니죠. 적어도 내겐 그래요.

        좋아요. 내게도 당신 같은 분별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말이 옳아요, 물론.

        이제 괜찮은 거죠?

        뭐, 거의.

        맥주 한 병 더 마실래요?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와인을 더 하고 싶다면 함께 앉아 있어줄게요. 그냥 당신을 보면서요.

    - p. 33


       홀트는 작은 동네라, 금새 소문이 돈다. 남자가 밤마다 여자 집에 가더라. 둘이서 그 집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걸까. 그러면 안되지 않나. 자식들도 있는데.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냐.


       그들은 상점에서 나왔다. 애디는 식료품들을 뒷좌석에 실은 뒤 운전석에 앉았다.

       루스는 고속도로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들과 가축이나 곡물을 실은 트럭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 여기가 정말이지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럴 수 있었을 때 떠났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 꼬딱지만 한 도시와 편협하고 짜증나는 주민들. 그녀가 말했다.

    - p. 41


        두 사람은 부모의 별거로 할머니 집에 맡겨진 손자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며 셋이서 함께 잘 지낸다. 정말 잘 지낸다. 마음을 닫고 있던 손자는 서서히 마음을 연다. 손자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남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캠핑을 하고, 남자가 손자를 위해 데려온 개를 마음 깊이 보살피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처음에 손자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빠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할머니도 자기를 떠날까봐 불안해했지만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 덕분에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끼는 개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믿게 된다.


       어두운 침실 바깥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열린 창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어오면서 커튼이 이리저리 펄럭거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는 게 좋겠어요.

       꼭 닫지는 말아요. 냄새가 예쁘잖아요. 지금 가장 예뻐요.

       정답이에요.

       그가 일어나 약간만 남기고 창문을 닫은 뒤 침대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 p. 109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두 사람을 바라봤고, 결국 여자는 남자와 더이상 밤을 보내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결국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 두 사람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다. 이 부분은 내가 이 소설 전체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누군가를 만난 후 그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그 순간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군요.

       네.

       두 사람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그들은 이야기를 조금 더 했다. 에미는 울었다. 그가 그녀의 몸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루이스가 말했다. 당신 덕에 나도 많이 변했고요. 고마운 마음이에요. 감사해요.

       지금 비꼬고 있는 거죠?

       그럴 생각 없어요. 진심이에요. 당신은 내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이상 더 뭘 원할 수 있겠어요? 당신과 함께한 후 난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 p. 182-183


       좋은 사랑을 하면, 좋은 이별을 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소설에 대화가 무척 많아서 꼭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영화보다 무대로 보고 싶다. 무대 위에 침대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다. 아, 여름밤 냄새와 여름밤 소리와 여름밤 풍경이 보일 창도 있어야지. 밤이 되고, 또 밤이 되고, 또다시 밤이 되는 연극. 이 책을 읽게 된 건 <시애틀 타임스>의 추천글 때문이었다. 내가 반한 문장은 이거다. "여름날 저녁 일몰 직후 아직 하늘에 빛이 남아있을 때, 제대로 들여다보면 볼 것들이 많은 그 순간을 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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