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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월에 만나요
    서재를쌓다 2017. 2. 25. 10:43





        요즘은 집에 늦게 들어올 때도 꼭 뭘 먹는다. 배고픔을 참질 못하겠다. 이러니 살도 찐다. 집에 만들어놓은 음식이 없으니 뭔가를 사온다. 이 날은 떡볶이 생각이 간절해서 단골 튀김집에 갔다가 떡볶이와 튀김을 사왔다. 다 먹진 못하고, 다음날 못 먹을 지경이 될까봐 튀김만 해치웠다. 예전엔 그렇게 먹고 자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속이 부대끼는지 새벽에 종종 잠이 깬다. 조용한 새벽에 가만히 앉아서 왜 배가 아픈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각의 끝에 전날 잠들기 직전에 먹은 자극적인 음식들이 있다. 아, 나도 늙어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새벽 5시 즈음에 눈이 떠졌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더 잘 생각이 안 들었다. 스탠드를 켜고 10여 페이지가 남은 <13월에 만나요>를 펼쳤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새벽독서란 이렇게 좋은 거구나.


        출간되었을 당시에 사놓은 책인데 손이 가질 않았다. 작가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한 권 선물했고, 몇 페이지 읽다 다시 책장에 넣어뒀다. 친구는 나중에 이 책을 가지고 유럽을 여행하며 조금씩 음미해가며 읽어내려갔다고 이야기해줬다. 사람이고, 책이고, 때가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느 날, 쓸쓸한 이야기가 읽고 싶었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 마침 보였다. 구입했을 당시에 얼마 읽히지 않던 책이 술술 읽혔다. 어느 날 아침,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눈물도 훔쳤다. 실은 실제로 한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의 유럽 여행을 상상해봤다. 여행 중간중간 책을 조금씩 읽어나갔을 모습을.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생경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들도. 우리도 언젠가 때가 되면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포스트잇,


    관계의 궁극적 결말은 영원이 아니다. 결말이 영원이었던 관계가 있다면 믿지 않을 작정이다. 내 결말이 늘 영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28


    추억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소중하다. 소중해진 것 다음에는 그것이 어떻게 내게서 멀어지는지를 겪는 것이다. 견디어보는 것이다. 견딜 수 있어도 견딜 수 없어도 사랑이다. 서로 기도 같은 것을 하고 살다가 기도를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을 때쯤, 윤은 녹사평으로 이사를 했다면서 전화를 해왔다.

    - p. 49


    함께 있어보면 그 사람 안의 나의 무게를 가늠하게 될 때가 있는데 여행이 그렇다. 여행이 동거와 다른 점은 집중력에 있다. 집중력이 생활에서는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일은 지루해지고 어려워진다.

    - p.70


    장의 담배 연기에서 박하향이 난다.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웃으니 나도 기쁘다.

    - p. 94


    진주는 진주 사람만큼 멀었다. 나는 땅을 가끔 옮겨 사는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여기저기 낯선 곳을 찾아다니는 나를 걱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가만히 잘 살다가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는 편인데, 이번이 진주였다.

    - p.131


    "그렇게 보이는 게 불편해요?"

    "불편해요. 그 사람이 그냥 말하면 생각 없어서 불편하고 그 사람이 의도가 있어서 말하면 솔직하지 못해서 불편하고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부담스러워서 보기 싫고 그 사람이 나를 경계하면 섭섭해서 슬프고요. 그러니까 불편해요."

    - p. 145


    지연씨는 아버지 이야기를 가끔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성큼성큼 걸어와 나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검은 한복을 입은 지연씨와 손을 잡고 있었고, 무뚝뚝한 지연씨는 내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위로하러 와서 위로를 받고 가는, 경우 없고 사람 노릇 못하는 족속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것은 처음의 일이 아니다. 이처럼 세상을 떠나는 순간 속에서 보여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일이다. 내가 처음보다 나중에 함께 남는 손님이 될 수 있을 때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느낀다.

    - p.187


    아침마다 눈 떠지는 일이 막막할 떄가 있다. 또 눈을 떴구나... 이런 현상은 가장 좋은 계절에 몇 번씩 찾아오곤 한다. 오래된 아파트, 웃바람으로 싸늘한 아침, 생강차를 끓여 마신다. 어릴 적 김장철 심부름으로 생각을 깔 때는 그렇게 지독하더니 어른이 되어 생강 향이 좋아진다. 생강 향은 고급스럽고 맑고 맵고 청아하다. 무척 진하게 만들어 먹으면, 죽고 싶은 아침 죽어버리고 싶은 그 아침이 한 번 더 살아보는 아침으로 변하는 약차 같은 것이 된다.

    - p. 250



       그러니, 생강차를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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