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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을 위한 다짐
    모퉁이다방 2016. 8. 29. 21:47



       쉬는 날 아침에 보는 영화를 좋아한다. 제일 좋은 건, 이른 새벽에 보기 시작하는 영화. 휴일인데 일찍 일어났고 다시 자버리기는 아까울 때,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찾아본다. 너무 밝지 않고, 너무 어둡지 않은 그런 영화. 그런 영화를 찾아냈으면, 이불을 다시 덮고 비스듬하게 누워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거다. 너무 느리디 느린 영화를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게 되는데, 그런 일이 참으로 많았다. 지루하지도 않고, 마음 깊이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하나 이상이 되는 꽤 괜찮은 영화도 있었다. 영화가 끝날 즈음 해가 완전히 뜬다. 그렇게 되면 아침도, 그날 하루도 뿌듯하다. 그런 이유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도 조조가 좋다. 아침에 부지런을 떨며 황급하게 나가는 일도 좋고, 아침 할인이 되는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사는 일도 좋다. 사람이 거의 없는 상영관도 좋고, 앞머리 까고 두터운 안경 쓰고 가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좋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는 난처하지만) 그러다 좋은 영화를 만나게 되고, 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으면, 집까지 걸어오는 데 그 날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성공한 휴일인 거다. 오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났고, 감동했고, 그로 인해 오늘부터 조금 달라져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지난 주말, 그런 영화를 만났다. 틸다 스윈튼은 존 버거와 함께 만든 사과파이와 같은 음식의 레시피를 읊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식욕

    좋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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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구월이 올 거니까, 여기에 구월을 위한 다짐들을 나열해본다.


    좋은 책을 읽는다.

    마음이 움직이는 음악을 듣는다.

    소중한 사람에게 엽서를 쓴다.

    마음이 담긴 영화를 본다.

    좀더 수다스러워 지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

    언젠가를 위해 일본어 단어를 외운다.

    무인양품에서 얇은 수첩을 여러 권 사서 표지에 리장, 나가사키, 치앙마이라고 적어둔다.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신다.

    그 사람 욕을 하지 않는다.

    정말 하고 싶을 때는, 한 번, 아니 세 번까지 생각해본다.

    일주일에 두 번, 요가를 빠지지 않는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날은 만보를 걷는다.

    고기를 줄이고, 일주일에 한번 샐러드를 주문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 병원에 갈 때, 여유롭게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   

    추석을 잘 보낸다.

    바다를 보러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언니에게 편지를 쓴다.

    부여에 가서 탑을 보고 올 날짜를 정한다.

    아침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매일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어 간다.


       오늘은 친구가 여름이 시작될 때 선물해 준 '썸머 위시'라는 이름의 초를 켰다. 아마도 합정에서 맥주를 마신 날일 거다. 기분 좋게 마시고 헤어지려는데,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하철 화장실을 다녀왔다. 친구가 양키 캔들 가게 앞에서 조그만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여름초라며, 좋은 날 켜라고. 향이 좋다. 오늘 새 손수건을 썼다. 빨래를 돌려 널었고, 방을 닦았다. 설거지도 했다. 이번주 샐러드를 주문했고, 돌을 맞은 친구의 아이에게 얼마 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그림책을 보냈다. 선물 받은 서점이 배경인 책은 오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보고 싶어했던 영화는 결국 함께 보지 못했다. 영화를 선물했고, 내 것도 다운받고 있다. 함께 보지 못했지만, 각자 보고 만나 얘길 나눌 거다. 호란의 새 앨범에서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했다.


       틸다 스윈튼이 나오는 존 버거 다큐에 이런 나레이션이 있었다. 계절은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름을 살아내었고, 가을을 살아나갈 것이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괜찮은 여름이었다. 가을은 흠, 좀 멋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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