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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째날 오전, 오키나와
    여행을가다 2016. 7. 7. 22:27



       겨울, 술을 마시면서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고 싶다고, 올겨울은 마음도 몸도 유난히 춥다고.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두고 있던 '따뜻한 남쪽'은 달랐다. 나는 통영과 제주를 이야기했고 그녀는 홍콩과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통영이든 제주든 홍콩이든 발리든 도착하는 대로 맥주를 마실 것이고 깊은 잠을 잘 것이었다. 그 다음날 그곳이 제주라면 모슬포에서 방어회를 먹고, 통영이라면 물메깃국을 먹는 상상도 했다. 가본 적 없는 홍콩과 발리에서의 여정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이곳에서 먹는 맥주보다는 더 맛있는 맥주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 박준, '우붓에서 우리는' <그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중에서







       오키나와는 구름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주도도 그랬는데, 오키나와도 그랬다. 섬의 구름들은 죄다 이쁜 걸까. 나는 마지막 날까지 오키나와 구름들과 사랑에 빠졌다. 얼마나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지.







       슈리성에 가기로 했다. 유이레일을 여러번 탈 예정이라 1일권을 끊었다. 유이레일은 모노레일인데, 작은 전철 같다. 지하로는 다니지 않고, 지상으로 높이 높이 다닌다. 그래서 나하를 계속해서 내려다 볼 수 있다. 출근하는 자동차들도 볼 수 있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볼 수 있다. 높이 다니니 구름도 좀더 가까이 볼 수 있다. 오키나와의 구름은 참으로 변화무쌍해서 그냥 올려다보고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더라. 아주 컸다. 그 큰 덩치로 자꾸자꾸 움직였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는, 성격이 좋은 아이 같았다.

     

       슈리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니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기사님들이 나와서 슈리? 슈리? 하고 물었다. 우리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는데, 방향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결국 택시 기사님에게 물어 봤다. 버스정류장은 어디입니까? 기사님이 가리킨 방향대로 뒤돌아 서니 정류장이 바로 보였다. 8번 버스를 타야 한다고 알고 왔는데, 하도 오질 않아 벤치에 앉아 있는 마음씨 좋아보이는 잘생긴(!) 일본청년에게 물어봤다.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열성적으로 알려줬다. 이 버스도 가고, 이 버스도 가고 등등. 질문은 할 수 있는데, 대답이 길어지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슬픈 현실. 표정을 보며, 중간중간 들리는 단어를 통해 유추를 했다. 청년은 우리에게 버스를 알려준 뒤, 벤치에 다시 앉지 않았다. 미안하게-

     
       버스는 계속 오지 않고, 벤치에 우리 둘만 남았다. 아침에 꽃단장하고 나왔는데, 더워서, 너무나 더워서 머리가 조금씩 축축해지고 있었다. 열심히 드라이했지만 앞머리들이 지멋대로 늘어지고 꼬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고운 양산을 쓴 할머니가 옆에 앉으셨다. 그리고 뭔가를 이야기하셨다. 죄송합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할머니는 더욱 반가워하시며 더욱 어려운 문장들을 이야기하셨다. 하이, 하이. 할머니의 표정을 보며 알아듣는 척을 해 보았다. 한국 얘기도 나오고, 할머니 어릴 때 이야기도 나오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자랑도 하신 것 같고. 핵심은 이거였다. 가방 단디해라. 오토바이가 와서 휙휙 훔쳐간다. 품 안에 넣고 조심히 다녀라. 하이, 하이. 드디어 버스가 왔고, 버스에 오르면서 기사님에게 물었다. 슈리성 갑니까? 할머니는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탔다.

















       예전에 이곳은 오키나와이기 전에, 일본이기도 전에, 류큐왕국이었다. 일본은 류큐왕국을 빼앗아 일본으로 만들었다. 내가 아는 류큐왕국은 나라를 빼앗긴 나라이다. 우리도 해방되지 않았으면, 그렇게 되었겠지. 그렇게 오키나와를 바라보면, 무척 아프다. 슈리성 공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 슈리성은 류큐왕국 시절, 정치와 의식 목적으로 이용했던 곳이란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엄청난 열기가 쏟아지는 와중에 공원을 구경했다. 아주 오래된 나무도 보고, 단단해보이는 성벽도 봤다. 키가 작은 야자수들도 봤다. 성의 계단을 오르니 나하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와! 여기, 꽤 높은 곳이구나 생각했다.

       너무나 더워서, 타죽을 것만 같아서 휴게공간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이런 표지판이 있었다. '열사병에 주의!' 열사병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던 걸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휴게공간의 팜플렛을 보니 11시에 광장에서 궁중무용 행사를 한다고 되어 있어 맞춰 나갔는데, 장소를 잘못 안 건지, 시간을 잘못 안 건지 아무 것도 안 하더라. 결국 못 봤다. 정전을 구경하려면 따로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해서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정전 건물에도 들어가보자 했다. 정전에서는 신발을 벗고 조심조심 돌아다녀야 했다. 정전에 전시되어 있던 옛 류큐왕국 사람들의 화려한 옷이 예뻐서 가만히 들여다 봤는데, 꽃이 보였고, 나무가 보였고, 나비가 보였다. 그리고 길도 보였다. 화려한 옷이라 생각했는데, 무늬를 들여다보니 수수했다. 그게 좋았다. 류큐 사람들은 순하고 활달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돈을 내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정전에 있었는데, 커피를 마시지 않았으면 여기서 좋은 차를 한 잔 마셨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정전은 대체적으로 고요했다. 그리고 시원했다. 안에서 내다보는 밖의 풍경이 좋았다. 꼼꼼하게 보진 못했지만, 꽤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구경을 했다. 동생도 나도 옛 사람들의 공간을 걷는 것이 지루하지 않았다. 중간에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분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됩니까? 라고 말하고 셋이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기념품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므로, 들러서 요리조리 구경을 하고 엽서 하나를 샀다. 우체국을 결국 가질 못해 쓴 엽서는 그대로 들고 왔다. 한국 우표를 붙여 보내야지. 정전 구경을 모두 하고 나오니, 또다른 팻말이 있었다. '강풍주의'. 바람에 날라간 사람이 있었던 걸까. 팻말 두 개로 무한한 상상을 펼치게 하는 곳이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무척 고팠다. 동생이 맛있는 소바집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딘지 찾을 기운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맛집을 찾아 헤매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는가! 미리 문장을 연습하고, 용기를 내, 슈리성 입구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갔다. 실례합니다. 근처에 맛있는 오키나와 소바 가게가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근처에 쉬는 가게가 꽤 있을 거라며, 슈리성 레스토랑에 가라고 했다. 거기서 오키나와 소바를 판다고 했다. 나는, 가게 이름이 무엇입니까? 다시 물었고 할아버지는 조금 어이 없는 표정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아, 이름이 슈리성 레스토랑이었다! 하하. 우리는 더우니까 소바를 먹자고 했고, 사진 메뉴판을 한판 들여다보다 세트 메뉴 두개와 생맥주 한 잔(내 꺼)과 오렌지 주스(동생 꺼) 하나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고서야 알았다. 오키나와 소바는 따뜻한 것이었다. 아, 아, 아. 따뜻한 거였어. 하하하. 아무튼 대단한 맛집은 아니었지만, 궁금했던 타코라이스와 오키나와 소바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을 고민하다가, 열사병에 걸릴 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쉬다 가자고 결론을 내렸다. 옆에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있어 이동했다. 커피 두 잔을 사러 갔는데, 거기에도 오리온 생맥주를 팔길래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자그만 안주도 함께 줘서 잘 시켰다 싶었다. 풍경이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좋은 풍경을 내다보며, 맥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엽서를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그래, 계획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게 여행이지. 나는 전날 망설였던 맥주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결국 슈리성 공원 기념품 가게에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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