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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닷마을다이어리 - S에게
    극장에가다 2015. 12. 31. 23:14

     

     

     

       우리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만나기로 했습니다. 내가 먼저 일본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죠. 영화를 각자 보고 토요일에 만나 함께 돈까스를 먹기로 했습니다. 나는 간만에 칼퇴를 하고 극장 시간표를 봤습니다. 마침 시간이 맞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추웠지만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S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 지금 보고 나오는 길이라고. S가 먼저 영화를 보고 보낸 메시지가 있는데,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다고요.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져서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의 나는 너무 피곤해서 집에 돌아와 메모도 하지 않고 씻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기억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우리는 토요일에 만났고, 돈까스 대신 치즈찜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의 조금은 허름한 투다리에 들어가 조금 이른 맥주를 마셨습니다. 이번에는 정확히 세 잔의 맥주를 비슷한 속도로 마셨습니다. 영화에 대해 S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쩐 일인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아, 나의 하찮은 기억력을 믿고 있었다니. 매번 배신 당했으면서. 나는 S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S는 똑부러진 아이예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게 건넸습니다. 이 감독은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것 같다고 했고, 첫째와 막내의 이야기도 했습니다. 다들 너무 예뻐서 너무 비현실적이다, 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맥주를 달고 사는 둘째가 그리 날씬할 수가 없다구요!)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어쩐지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불광천을 걸으면서 떠올랐던 생각. 그래, 그거였어,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던 생각. 결국 생각이 안 난다, 며 맥주잔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건배를 하고, 각자 한 모금씩의 맥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새해를 앞둔 오늘. 2015년의 마지막 날,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이요. 갑자기 불현듯 떠오른 것이 아니라 아지랑이처럼 조심스럽게 스물스물 피어나더니 어느 순간 또렷해졌습니다. 그건 이런 거였어요. 요즘 부쩍 그럴 때가 있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이건 내가 싫어했던 우리 엄마의 행동인데, 이건 내가 싫어했던 우리 아빠의 행동인데.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엄마와 아빠의 모습. 사실 그건 좀 드문 일이에요. 그런 건 그냥 '내' 잘남으로 알고 지나가곤 하거든요. 아무튼, 그럴 때 깜짝 놀랍니다. 내가 분명 절대 따라하기 싫었던 모습인데,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내가 그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셋째는 낚시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마루에 앉아 낚시대를 허공에 두고 낚시 연습을 합니다. 아주 재미난 표정으로요. 나중에 가족이 된 넷째가 그래요. 아빠가 낚시를 아주 좋아하셨어. 맨날 나 데리고 낚시하러 가셨어. 셋째는 정말? 하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습니다. 셋째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든요.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내 어미아비가 늙어가고, 내 단짝친구가 애기를 가지고, 애교라곤 찾아볼 수 없던 친구가 애기를 낳아서 애기 앞에서 끊임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점점 더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는 그냥 이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요. 엄마가 있었고, 아빠가 있었고. 두 사람이 만나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 전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고, 그 전에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전과 그 전과 그 전의 사람들에게 무언인가를 조금씩 전달받아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나는 그냥 내가 아니라 많은 것들이 총총히 쌓여 이루어진 나입니다. 영화 속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모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을 보고 그녀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어요.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영화를 보고 입김을 내뿜으며 불광천을 걸으며 새삼 아, 맞아, 그런 거였어,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워 했고, 이걸 토요일 S를 만나 재미나게 이야기해줘야지 생각했는데, 하찮은 기억력 때문에 생각이 나질 않았던 거였습니다.

     

       나는 그녀들의 집이 부러웠습니다. 오래된 집. 좋고, 나쁜, 오래되고, 새로운 기억과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집. 마당도 있고, 계단도 있고, 이층도 있고. 무엇보다 이층의 창문에 바람이 불면 높고 상쾌한 소리를 내는 풍경도 달려 있고. (나의 로망입니다. 풍경 달린 마당이 있는 집.) 그 집을 이루는 하나의 기둥에 첫째와 둘째, 셋째의 한 살 한 살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넷째의 한 해가 또렷하게 새겨졌습니다. 그렇게 네 사람은 가족이 되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목욕을 하고, 함께 매실을 따 매실주를 만들고, 함께 불꽃놀이를 하면서. 만화를 보고 영화를 봐서, 또 그 만화가 아끼는 작품이라서,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었지만, 여러 생각을 하게 해준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나도, S도, 우리 모두 새해 복을 많이 받는 겁니다.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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