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도 성격이 있을까. 계절 앞에 '초'라는 글자를 붙이면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 중 제일은 초여름. '초'라는 글자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런 뜻이다. 어떤 기간의 처음이나 초기. 그러니까 여름의 처음이나 초기를 생각하면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린다.
포르투갈에 가기로 한 건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때문이었다. 동생과 영화를 본 뒤 배경이 되는 곳을 찾아보니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다. 여행 프로그램 리스본 편을 죄다 찾아봤다. 노란 전차가 좁은 골목길을 덜컹거리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근사했다. 오래되었고 낭만적이었다. 그 다음해, 휴가날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동생이 말했다. 언니, 우리 포르투갈에 가자. 우리는 초여름에 출발하는 일정으로 예산을 무리해 준비를 했고 어이없게도 동생이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우연한 사고로 발가락 뼈에 금이 잔뜩 갔다. 동생은 울며 깁스를 했고 나는 내 생애 최초로 혼자 해외여행을 가게됐다. 유럽도 처음이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혼자 숙소를 찾아가고 혼자 식당에 갔다. 혼자 길을 걷고 혼자 맥주를 마셨다. 2인용 침대에서 혼자 잠들었다. 좋은 풍경을 보는 것도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혼자였다. 여행할 당시에는 참 많이 외롭고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수없이 생각했지만 여행이 끝나고 여럿 속에서 혼자였던 당시를 떠올려보니 참 좋은 시간들이었다. 여행 후 나는 내가 조금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지금 이곳에서, 이전보다 좀더 용기를 내게 되었다.
계절에도 성격이 있다. 각자가 기억하는 각자의 계절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 초여름은 곧 다가올 열기로 무모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용기로 가득한 계절이다. 어떤 도전을 할 수 있고 어떤 실패도 할 수 있는 계절. 저녁에 부는 선선한 바람으로 그 실패를 위로받을 수 있는 계절. 또다른 용기를 북돋우는 계절. 무엇보다 시원한 맥주가 정말 맛있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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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과 7월이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어서 조금 수월해질 것만 같은 8월에는 뭔가 나를 위해 힘쓰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매일 조금씩. 나는 의지박약이니까 강제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아 한달 내 짧은 글을 매일매일 쓰면 그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주는 곳에 7만원을 쓰기로 했다. 나는 의지박약이니까 강제성이 있어도 강제성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면 되므로 결국 실패를 했다. 몇 편 쓰다 더이상 쓰지 못했다. 아침 8시에 그 날의 키워드가 전달이 되는데 매일 그 키워드에 맞는 글을 생각하고 쓰는 게 쉽지 않았다는 핑계. 그럼 시작하지를 말지. 그래도 몇 편 쓰면서 옛추억들을 곱씹어봤다. 지나고 난 뒤라 그렇겠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훗날 그렇겠지. 한 권의 책은 물 건너갔고 하나뿐인 블로그에 지금의 이야기들을 많이 남겨둬야지.
(...) 네번째로 자동차키를 잃어버린 날, 나는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실패를 한 적이 없어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한테 가봐야겠어. 그제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62쪽, 날씨 이야기
(...) "손바닥에 적은 그 단어 스펠링 틀렸어요." 여학생이 말했다. "i가 두 개여야 해요." 그는 한 달만 더 학원을 다녀보자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정말 버스에서 졸지 않겠다고. 학원에 갈 때 스무 개. 돌아올 때 스무 개. 보란듯 외우리라고. 결심대로 그는 정말 버스에서 졸지 않았다. 그러자 평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학원까지 가는 길에는 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나무 그늘 아래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자아이를 같은 버스에서 보았다. 그보다 세 정거장 먼저 내렸다. 늘 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무얼 듣는지 혼자 피식 웃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뭘 들어요? 하고 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여자아이의 뒷자리였다. 어쩌다 여자아이의 앞에 자리가 비어도 그는 앉지 않았다. 자신의 뒤통수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에 앉아 여자아이와 도시락을 나눠 먹는 꿈을 꾸었다. 어쩌다 여자아이가 버스에 없으면 그는 그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탔다. 그러면 어김없이 여자아이가 거기 앉아 있었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면 고백을 하리라. 그는 영어 단어를 외우고 또 외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난 뒤 버스에서 여자아이를 만났을 떄, 여자아이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잘랐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아이가 창밖을 내다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걸 보았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더이상 설레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그는 여자아이가 버스에서 내리고 난 다음에야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아차렸다. 눈 밑의 점. 그 점이 없어졌다. 점 하나 뺐을 뿐인데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니. 그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
- 143-144쪽, 팔 길이만큼의 세계
(...) 아빠와 외할머니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셨다. 술을 마셔서인지, 딸이 태어나서인지, 비가 온 다음이어서인지, 그날 아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구름은 하얀색으로 보였고, 하늘은 파란색으로 보였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아이의 어깨 위에 단풍잎 하나가 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 꼭 그림책을 오려놓은 것 같아요. 아빠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그러네, 하고 대꾸했다. 커피가 달아요, 아빠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그러네, 하고 대꾸했다. (...)
- 169쪽, 낮술
계절이 오고가는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니. <노포의 영업비밀> 통닭 영상을 보다 갑자기 통째로 튀긴 닭이 먹고 싶어졌다. 남편이 거래처 사람과 술을 한 잔 하고 들어온 뒤 앱으로 닭 한 마리를 주문을 했다. 통째로 튀긴 닭을 파는 닭집이다. 20분 안에 가지러 오라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은 비가 그쳤다고 했는데 혹시나 싶어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선우정아'로 검색을 하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잘 지내니.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우산을 펴고 걸어가는데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조금 쓸쓸해졌다. 이런 날 쓸쓸해할 사람 생각을 했다.
친구가 아기 낮잠 잘 시간에 읽으라고 보내준 책을 천천히 읽었더랬다. 아기 재우고 얼마 못 읽고 자기도 하고, 아침에 반신욕을 하면서 읽기도 했다. 날씨 이야기, 팔 길이만큼의 세계, 낮술에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좋았던 부분을 옮겨 적다 보니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대단하게 변해버린 것에 내가 공감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이었다.
어제는 동생이 회사창립기념일이라 오전 근무만 한다고 오후에 놀러왔다. 서울 동쪽에서 경기도 아래쪽으로 오는 거니 거리가 꽤 되는데도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요즘엔 누가 와주면 그렇게 고맙다. 이번주에 지안이가 지금까지 나름 규칙적이었던 흐름을 깨고 자주 울고 계속 안고 걸어달라고 해 힘들었는데 잠시라도 놀아주고 나와 말상대 해 줄 사람이 와준 것이다. 남편은 부랴부랴 육아책을 찾아봤는데 지금이 새로운 도약의 시기란다. 약 2주동안 지금까지와 달리 신생아 시기로 돌아간 것처럼 아이가 변할 수 있는데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이라고 되어 있었다. 다행이긴 한데 또 힘들기도 하겠다 싶었다. 그래도 2주니까. 새벽에 어김없이 한번씩 깨서 다시 잠들지 않고 울어댄다. 남편은 다시 아이를 데리고 거실 소파로 나가 안고 재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자는데 남편의 수면의 질이 말이 아니다.
친구는 지난 주말에 와 지안이를 안아줬다. 졸려하자 안고 자장가를 불러줬는데 친구의 아들이 어, 그건 내 자장간데, 라고 했다. 찬이야 좋다, '내' 자장가라는 말. 들어보니 우리가 알고 있던 자장가와 달리 경쾌한 리듬의 곡이었다. 친구는 사진관에서 50일인가 100일 사진으로 영상을 만들어줬는데 거기에 있던 노래라고 했다. 음원으로 발매는 안 된 것 같다고. 한 블로그에 영상이 있었다. 가사가 참 좋았다. 친구들아 친구들아 우리 아가 코코자게 너희들도 이제 그만 코코자장하거라. 곰돌이 친구들도 토끼 친구들도 코끼리 기린 개구리 사자도. 밤하늘의 별들과 얘기도 하고 저 하늘의 구름 타고 훨훨 날아도 보렴. 아가아가 우리 아가. 예쁜 아가 우리 금동. 이제 그만 코코자장 코코자장하거라. 얼른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날이 왔음 좋겠다. 친구랑 예전처럼 둘이서만 만나 허물없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도 없이 얘기할 수 있었으면. 친구가 만삭일 때 하루 날 잡아서 호텔에서 자고 오자고 했는데 그걸 못해 못내 아쉽다. 뒤돌아 보니 다시 못 올 시간이네.
동생은 전화영어 때문에 남편이 오자마자 집에 갔다. 오늘이 금요일이면 좋았을텐데 이틀이나 회사를 더 나가야 해, 라며. 동생은 지안이를 안아준다고 오자마자 내 잠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잠시 입은 그 옷을 빨래통에 넣어뒀더라. 동생은 기억 안 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동생이 와서 자기가 하루 입은 옷을 내가 빨래통에 바로 넣길래 좀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같이 살 때는 입던 옷 또 입고 또 입고 했는데 한번 입은 옷을 빨래통에 바로 가져다 놓는 내 모습이 좀 멀게 느껴졌나보다. 어제는 동생이 그러길래 내가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따로 산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예전에 이사하기 전 동생이 혼자 살 모습을 상상하며 펑펑 울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이 마음이 허해지더라. 형부가 역까지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꼰대말 안했냐고, 잘 도착했냐는 내 메시지에 지하철이 시끄러워 부러 신용산역에서 내려 걸으면서 전화영어를 했다는 씩씩한 답이 왔다. 동생은 아마 집에 가 씻고 친구와 통화를 하고 유투브를 보다 일찍 잠들었을 거다. 나는 남편과 저녁밥을 먹고 잠시 침대에 누워 짧은 잠을 자고 지안이를 씻기고 재우고 거실에서 혼자 티비를 조금 보다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남편과 달리 잠이 쉽게 오지 않아 좀 뒤척이다 잤다. 마음이 허하지 않게 책을 열심히 읽어야지. 아무래도 헤드랜턴을 사야겠다.
책을 사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림 때문이었다. SNS에서 우연히 봤는데 아이를 뒤켠에 두고 잠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박완서 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박완서는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었어요. 작품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문장과 함께. 책을 읽고 있는 저 따뜻한 불빛이 그때의 내게 위안이 됐다. 그래, 책을 읽으면 돼, 생각을 했더랬다. 그림을 올린 분에게 어떤 책인지 물어봤고 아직 출간 전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얼마 전 불현듯 떠올라 인터넷 서점에 '박완서'라고 검색해봤더니 출간이 되었더라.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었고 짧은 내용이었지만 읽는 동안 뭔가 벅찬 느낌이 있었다. 남의 느낌을 빌리지 말고 정직하게 자기 느낌을 표현하자. 익을 시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 이런 말들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완서는 충격을 받았어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었죠.
"세상이 달라 보여."
완서가 도서관 문을 나서며, 친구에게 말했어요.
"어떻게 달라 보여?"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세상의 뒤쪽을 본 것 같아."
완서는 두렵고 슬펐어요. 어린이가 알아선 안 되는 어두운 면을 보아 버린 것 같았죠. 문학이 '세상의 뒤쪽'을 담는, 입체적인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어요. 완서는 훗날 <아아, 무정>의 원래 제목이 <레미제라블>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친구는 문래동에서 노들역 가까이로 이사를 했다. 아무리 못 봐도 서로의 생일 즈음에는 꼭 얼굴을 봤는데 코로나 때문에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거였다. 처음 가는 길이라 네비게이션을 켜고 갔다. 도착지에 가까워졌는데 한강이 보였다. 와, 좋은 곳으로 이사했네. 친구네 집은 길다란 구조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긴 복도가 이어졌고 양 옆으로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 두 면이 통창인 거실과 부엌이 있었다. 통창 때문에 거실이 더 넓고 시원해보였다. 친구는 만삭인 내 배를 만지더니 친구야, 이렇게나 배가 나왔네 했다. 친구는 함께 먹으려고 흑돼지소라찜을 주문해뒀다고 했다. 오빠는 언젠가 생각한, 이렇게 먹으면 맛있겠다 조합의 음식을 에피타이저로 만들어왔다. 이제는 의젓한 유치원생 이나는 자다가 일어나 대면대면하더니 대형 추파춥스를 선물하니 씨익 웃어보였다. 친구는 옷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서 깔끔하게 싸놓은 짐이 여러 개 있었다. 이나는 이제 유치원생인데 이런 것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니. 친구는 혹시 금령이가 임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남겨두었단다. 확신이 있었으면 더 많이 남겨뒀을텐데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많았다. 젖병소독기에 유모차에 장난감과 책들, 아기띠와 조금 커서 입으면 너무 예쁠 옷들 등등. 그날 오빠와 친구는 내가 생각보다 못 먹는다고 안타까워했는데 나는 둘의 마음 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찼다. 그 뒤로 친구는 계속 뭔가를 보내왔다. 최근에 완전 빠졌다는 식빵도 세트로 보내주고, 출산 전에 매운 거 한번 더 먹으라며 흑돼지소라찜도 주문해주고, 출산선물이라며 체온계도 보내줬다. 출산한 뒤에는 집에서 애랑 온종일 씨름하고 있으면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면서 산뜻한 색깔의 홈웨어를 보내줬다. 최근에는 혼자 있을 때 끼니 거르지 말라며 그래놀라도 보내줬다. 오, 그래놀라 팝은 친구가 보내줘서 처음 먹어봤는데 맛보고 엄청 놀랬다. 맛있어서. 와, 이렇게 맛있는 시리얼이 있었다니. 원래 시리얼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계속 먹게 된다. 문래동 친구네 집에는 처음보는 주전부리들이 많았다. 친구는 매번 이것도 가져가라 저것도 가져가라며 바리바리 싸줬었다. 집에 와 먹어보면 다 맛있었고. 오늘도 아침은 시리얼이었다. 점점 밥 차리는 게 귀찮아지고 있다. 한 끼 정도는 정말 간단하게 먹으려고 하는데, 오늘 아침에는 시리얼과 삶은 달걀 두 개, 그리고 디카페인 믹스 커피 (단 게 맨날 땡겨요. ㅠ 모유수유하면 살 빠진다고 누가 그랬나요). 오늘도 아침을 먹으면서 감탄했다. 정말 맛있는 시리얼이라고. 불현듯 친구의 마음이 떠올랐다. 금요일이고 내일은 주말이니 기분 좋은 아침이다. 어제는 책 한 권을 끝냈고 새 책도 시작했다. 시리얼 기운을 받아 오늘 하루도 잘 지내봐야지. 아자아자.
별것 아닌 나의 기록들이 자꾸만 좋은 사람들을 내 곁으로 데려다 준다. 그래서 계속 쓰게 된다.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라 가감 없이 나를 드러내며 솔직하게 쓴다. 그러다 보면 점점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남는다. 나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이제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 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와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해 편지를 띄운다. 단 한 줄을 쓰더라도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 여름 / 기록, p.57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근처 정류장에 앉아 살짝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름에는 그늘 아래에서 맞는 바람을 사랑한다. 주어진 계절을 오롯이 느끼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콧등과 인중에 맺히는 땀을 스윽 닦아내고 다시 눈을 감는다.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멈췄다 하며 애간장을 태운다.
- 여름 / 그늘, p.89
월세를 보냈는데 '받았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연희주인'이라는 문자가 답장으로 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는 것. 행복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 가을 / 감나무, p.121
낮에는 이불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 해가 질 때까지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그런 다음 여행지에서 사온 티백으로 물을 끓이고 통에 담아 잠깐 식혀두었다. 조금 귀찮지만 시간을 들여 우려낸 물이 고소하고 훨씬 더 맛나니까.
- 가을 / 집, p.123
오늘도 힘든 동작이 시작되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운동하는 안나가 그 마음을 읽었는지, 남은 한 세트는 혼자서 하라며 숙제로 남겨줬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다 끝까지 하겠다고 하고 정해진 운동을 모두 끝냈다.
<알쓸신잡 2>에서 장동선 님이 들려준 갑각류 이야기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탈피한 갑각류는 가장 연약한 상태를 버티고 나면 더 단단한 껍데기를 갖게 되는데 인간의 마음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성장하는 순간은 죽을 것 같고, 잡아먹힐 것 같고, 스치기만 해도 생채기가 날 듯한 순간일 거라고.
- 겨울 / 성장, p.291
어쩜 이리도 날씨가 포근한지. 뭉게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난다. 바깥을 나서는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발 두 발 경쾌하게 내딛는다. 문득, 지난겨울에 무엇이 그리도 힘이 들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계절을 들여다보면 때에 따라 피고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왜 나는 매번 피어있으려 그리도 애를 썼나 싶어 괜히 머쓱해졌다.
- 봄 / 봄날, p.381
무과수 님의 <안녕한, 가>에 포스트잇 붙여둔 부분들을 다시 읽어보며 다린의 '태양계'를 듣는다. 다린의 '태양계'는 <싱어게인> 음악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들은 곡이다. 우주처럼 외롭고 물결만큼 따뜻한 곡 같다. 아이를 재우고 요즘 읽는 책을 가져가 반신욕을 했다. 오늘의 마지막 문장은 '멀리서 폭죽 터뜨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열고 머리를 말렸다. 얼마 전에 미용실을 다녀와 머리가 무척 가벼워졌다. 물을 끓여 허브차를 만들었다. 무과수 님은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책을 출간했다고 해서 주문을 했다.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글들이 짧아 처음에는 아쉬웠다.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 겨울을 거쳐 봄으로 끝나는데, 지금이 여름이라서 그런지 여름 이야기들이 좋았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제일 생동감 넘치고. 읽다보니 일본영화 <리틀 포레스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기를 찾아보니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 있더라. 담백하고 건강한 음식을 양이 넘치지 않게 든든하게 먹은 느낌이다.
팔월도 벌써 반이나 지났다. 아가는 오늘로 태어난지 칠십구일째가 되었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백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쑥쑥 자라고 있다. 아마도 보이는 게 선명해지면서부터 인 것 같은데, 잘 웃는다. 오늘은 엄마아빠동생과 영상통화를 했는데 화면에 엄마-동생-아빠 순으로 나타나자 웃기 시작하더라. 팬클럽 1호 엄마는 그 모습에 엄청난 함박웃음을 띄고.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면 칭얼댄다. 일어서서 돌아다니기 시작해야 조용해진다. 새로운 걸 눈으로 계속 보고 싶어하는 듯 아직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바삐 움직여댄다. 산책이 아가의 시각자극에 좋다더니 이제 정말 산책을 시작해야 될 때가 왔나보다. 유모차를 꺼내뒀다.
남편과는 대부분 사이가 좋지만 (우린 육아동지) 가끔 다툴 때도 있다 (역시 육아동지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 당시에는 마음 속에 이런 생각 뿐이다. 자기만 힘든 줄 아나. 내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이것도 힘들고 저것도 힘들고. 온갖 힘듦을 모조리 총집합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분이 풀리진 않지만 어찌어찌 잠을 자고 아침을 맞이하면 옆사람의 마음을 조금 생각하게 된다. 그래, 어제의 그 부분은 진짜 힘들 수 있겠다. 나도 많이 힘들지만 그때의 내 표출방식은 잘못된 거였어. 반성도 하게 된다. 밥을 먹다가 슬그머니 건넨다. 나의 미안한 마음을. 그러면 남편도 건넨다.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그리고 남편이 힘들다고 한 상황이 오면 이전와는 다르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사실 남편은 정말 잘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며 내가 칭찬을 너무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더라. 마음 속에는 고마운 마음이 가득한데 그걸 잘 꺼내질 않았더라. 그런데 한두번 섭섭한 순간이 오면 그건 엄청나게 빨리, 그리고 강하게 표출하는 거다. 반성한다.
요즘 아가는 단둘이 있는 낮에 잘 자고 혼자서도 잘 누워 있고 그런다. (물론 승질 낼 때도 있지만) 그래서 아가가 자는 시간에 설거지도 하고 밥도 먹고 책도 읽는다. (한숨 푹 자고도 싶은데 이걸 하다보면 하루가 끝나있다) 토요일에는 수유를 하면서 최백호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좋은 말들이 정말 많았는데 이 말은 오래 기억하고 싶어 저장해뒀다. "마흔 중반이 넘어서 '낭만에 대하여'를 만들었습니다. 그건 30대에 만들 수 없는 노래죠. 그래서 저는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정말 간만에 페이퍼 잡지를 읽었다. 여름호 주제가 '여름과 맥주'. 다름아닌 맥주여서 샀는데 맥주가 아닌 홍진경 인터뷰 기사가 좋았다. 홍진경은 남동생이 인정하는 다독가이고 싸이월드에 일기를 썼던 것을 보면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다. 인터뷰어가 묻는다. "그래도 진경 님을 사람들이 단순히 웃긴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좀 섭섭할 것 같은데요..." 홍진경이 답한다. "아니에요. 전 제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사람에게 웃음을 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보고 사람들이 웃거나 기뻐하면 희열을 느끼는 전 천생 예능인이에요. 내가 실제로 우스운 사람이 아니면 되는 거죠 뭐." 실제로 내가 우스운 사람이 아니면 되는 거죠 뭐. 이 문장도 저장해둔다.
오늘은 오전시간에 에어컨을 끄고 집 안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뒀다. 창문에 걸어놓은 풍경소리가 날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가는 처음 듣는 풍경소리에 흠칫 놀라더라. 나를 닮아 겁이 많은 모양이다. 아, 이 시간에 혼자 깨어있으니 너무 좋네.
산후도우미 관리사 업체는 조리원에서 추천받았다. 조리원 원장님은 자기가 추천해주고 나빴던 사람은 없었다며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이 오면 자기한테 연락을 하라고 했다. 조리원 퇴소가 목요일이라 금요일은 어찌어찌하고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일정이 깔끔하겠다 싶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니 목요일에도 남편이랑 둘이서 멘붕이겠다 싶어 금요일 출근으로 변경을 했다.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안 그랬음 전쟁같은 금토일을 보냈을 거다. 관리사님이 출근 전에 문자로 연락을 해와 연락처를 추가하고 카톡 사진을 염탐했다. 장성한 아들 둘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인상이 좋아보이셨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걱정하는 만큼 관리사님도 걱정스럽겠지. 어떤 산모와 아이를 만날지. 너무 까탈스럽지는 않을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좋은 관리사님이었다. 불편한 것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주면 좋겠다고 먼저 얘기해주셨고 살림살이도 별로 물어보지 않으시고 알아서 잘 찾으셨다. 친근하고 깔끔하셨고 어떤 할 선은 끝까지 지키셨다.
관리사님이 계셨던 3주동안 나의 일상은 대체적으로 이랬다. 전날 지안이와 혼을 빼는 밤을 보낸 후 아침이 찾아온다. 정말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어떤 밤을 보내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아침에 아이는 평화롭다. 관리사님은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하셨다. 8시 50분. 정확히 50분에 현관문을 노크하셨다. 늦는 게 싫어 매일 일찍 도착해 차 안에 있다 올라오신다고 했다. 너무 일찍 오는 것도 불편할 수 있겠다 싶어 밑에서 시간을 보내신다고. 관리사님이 오시면 안방의 아기침대를 거실로 뺀다. 옷을 갈아입고 내 아침밥을 준비하신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꺼내 보기좋게 담아주신다. 내가 밥을 먹으면 밤새 이렇게 얼굴이 또 달라졌냐며 지안이에게 안부를 묻는다. 과일까지 챙겨주시고 지안이가 조용해지면 집안일을 시작하신다. 청소기를 밀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나는 방에 들어와 쉬거나 아침잠을 잤다. 그때는 수유때문에 밤에 몇 번을 일어나야 해서 낮에 수시로 잠이 왔다. 길게 자면 점심 때까지 푹 잤다. 어느 날은 일어나보니 지안이도 관리사님도 안 계셨는데 욕실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목욕하고 몸에 태열이 안 올랐나 봐주셨고 코 때문에 답답해할 때는 면봉으로 솔솔솔 파내주셨다. 점심은 함께 먹었다. 내가 자는 사이 반찬을 하나 두개씩 만들어두셨는데 제일 맛있었던 건 감자전. 너무 맛있다고 하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도 두세번 더 해주셨다. 점심을 먹으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육아 이야기, 관리사님 자식들 이야기, 지안이 이야기, 코로나 이야기, 사는 이야기. 나는 차를 마시고 관리사님께는 커피를 만들어 드리고 지안이를 좀 보다 방에 들어왔다. 책을 조금 읽다 잤다. 관리사님은 또 설거지하고 저녁반찬 만들어두고 빨래 개고 지안이 달래고. 지안이가 수유하다 자버리면 함께 깨워주셨고, 수유가 끝나면 트림을 시켜주셨다. 자고 있다가도 관리사님 퇴근 한 시간 전이 되면 몸이 귀신같이 알고 일어났는데 그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안이는 침대에 누워 자고 모든 집안일은 끝내있고 주방도 깨끗해져 있는 고요한 시간. 관리사님은 항상 주방 식탁에 앉아 계셨다. 숲이 보이는 창을 마주하고.
관리사님은 항상 "할 수 있어요", "별 거 아니예요", "잘 크고 있는 거예요" 라는 말을 해주셨다. 그게 육아를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힘이 되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지라 처음에는 같은 공간에 오랜시간 함께 있는 게 불편했는데 익숙해지니 별의별 말을 다하게 됐다. 어제 남편과 싸운 이야기까지. 지금에와 생각해보면 그 대화들이 산후우울에서 멀리 도망치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육아에 서툰 내게 여러 번 말씀해주셨다. 아기는 편안했던 뱃속을 떠나 너무나 낯선 세계로 나온 거라고. 얼마나 혼란스럽겠냐고. 지금 이 낯설고 넓은 세계에 적응하느라 그러는 거라고. 엄마는 어떤 상황이 와도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아, 내 아이가 지금 세상에 적응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러는 거구나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고 다독여주라고. 그 말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지안이가 적응하고 있구나, 엄마가 지켜봐줄게, 괜찮아괜찮아 하며 다독이게 된다.
지난주에 관리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지내세요? 지안이는 잘 크지요?" 파키라 잎이 무성해 줄기를 하나 잘라드렸는데 거기서 뿌리가 나기 시작했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나는 함께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애가 침대에서 안 자요, 안겨만 있어요, 밤에 잘 안 자요, 지 아빠 배 위에서만 자요, 이렇게 저렇게 조잘대고 그런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관리사님은 사진을 보내줄 수 있냐고 했다. 나는 최대한 맑은 사진들로 골라 보냈다. 메시지가 왔다. 너무 예쁘게 크고 있어 좋네요. 얼굴이 참 밝아요. 나는 시간 되실 때 놀러오시라고 했고 관리사님은 그럴게요, 라고 답을 보내왔다.
마지막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관리사님은 8시 50분에 출근하셨고, 내 아침밥을 차려주셨고, 집안일을 하셨다. 점심을 함께 먹었고 커피를 만들어 드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방에 들어가 쉬었고 한 시간 전 쯤에 일어났다. 그 날 관리사님은 이것저것 자신이 지안이를 돌보며 파악한 성향 같은 것들을 말해주셨다. 어떻게 해야 좋아하고, 이런 성향이 있는 것 같고 등등. 관리사님은 덤덤하게 "지안이 잘 키우세요. 지안이는 잘 보채지 않는 귀여운 아이였어요." 라고 말했는데 나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어버리면 당황해하실 것 같아 꾹 참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또 물었다. "제가 내일부터 혼자 잘 할 수 있을까요?" 관리사님은 자신이 처음 왔을 때도 내가 그렇게 물었는데 지금은 자신감이 꽤 생기지 않았냐면서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셨다. 누군가 집에 와 3주동안 낮시간을 함께 보낸 건 생애 처음이었다. 걱정했지만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푹 쉴 수 있었다. 요즘도 가끔 지안이가 잘 때 집안이 조용해지면 그 때 그 고요했던 오후 시간이 생각이 난다. 그야말로 고-요-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지안이가 혼자 누워도 있고 누워서 잘 자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온종일 안겨 있으려고만 하는 날들. 저녁과 새벽에는 남편과 어찌어찌 교대하며 하면 되었는데 (하지만 이것 역시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낮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 내가 온종일 안아줘야 했다. 소파 구석에 등을 바짝 대고 앉아 이대로 망부석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정말 영영 이렇게 안아줘야만 할 것 같이 떼를 쓰며 울어댔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시기를 지나니 눕더라. 어찌나 기뻤는지.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는 당연한 사실에 눈물이 날 듯 행복했다.
<라이브>는 그 시기를 나와 함께해 준 드라마. 수유를 하고나면 트림을 시켜야 했는데, 트림을 잘 하지 않아 소화가 잘 되도록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오래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수유와 트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빨리 찾아왔다. 주말에 남편에게 수유할 시간이야, 라고 말하면 남편은 항상 벌써? 라고 말했다. 트림할 때 온전히 아기에게 집중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이 길고 긴 시간을 버틸 무언가가 필요했다. 넷플릭스가 있었다! 끊어서 봐야 했으므로 영화는 집중하기 힘들고 드라마가 딱이었다. 심지어 아주 길다는. 우연히 찾은 <렛다운>에서 많은 위안과 즐거움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한국드라마가 어떨까 찾아보다 남편이 예전에 정말 좋다며 꼭 한번 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라이브>는 시보, 즉 수습기간을 보내는 새내기 경찰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하는 이들은 시보들만이 아니다. 이들의 선배, 나이 많고 경력 많은 사수들도 이들과 함께 성장한다. 그런 이야기이다. 드라마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경찰시험에 지원하기까지 고단했던 염상수와 한정오의 생활을 보여주고, 어느 날 결심한 경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몇 계절이 바뀌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녹록치 않았던 경찰학교를 거쳐 배정받은 지구대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맡으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고단한지 경찰이라는 직업은 또 얼마나 고단한지 알아간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힘을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노희경 드라마 답게 캐릭터들이 드라마 제목 그대로 '살아있다'. 시보들은 할 말은 한다. 할 말은 하면서 맡은 일은 또 열심히 해낸다. 선배 뒷담화도 열심히 한다. 그러다 들키지만 굴하지 않고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한다. 시시한 일은 맡기 싫다면서 막상 시체를 마주하고는 얼어버린다. 경찰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하곤 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당당하게 말한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계속 좋아하겠다 말한다. 시보들도 좋았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사수 오양촌. 실제로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성질 더럽다며 멀리 했겠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불같은 사람. 겉은 활활 타오르지만 실은 가슴 속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계란 하나를 품고 사는 사람이다.
7화의 부제 한 줄이 이 드라마 전체를 설명한다.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는 길을 함께 가주는 사람.' 좋은 파트너들이 대거 등장하는 드라마다. 매화 좋은 기운을 받으며 '안겨만 있을게요' 시기를 지나왔다. 끝의 몇 화는 지안이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울었다. 아, 너무 좋은 드라마잖아, 하면서. 저 부제는 너무 좋아서 사진으로 찍어뒀다. 지금 육아를 하고 있는 우리를 설명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해서.
어제 오늘 남편이 재택을 하며 지안이를 같이 봐줘서 낮시간이 여유로웠다. 오늘은 낮잠도 잤고 친구가 지안이 잘 때마다 한 편씩 읽으라고 했던 소설집의 소설 한 편도 읽었다. 오늘 읽은 소설이 좋았다. 가끔 주인공 생각이 날 것 같다. 저녁이 되자 남편이 야구를 보며 닭을 먹자며 세탁소도 다녀오고 닭도 찾아오고 간만에 살짝 산책을 하고 오라고 했다. 이어폰을 챙겼다. 얼마 전 유퀴즈에 나온 SG워너비가 부른 노래의 도입부가 무척 좋았는데 혼자 있을 때 이어폰으로 들고 싶었더랬다.
'여기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 가끔 그대는 먼지를 털어 읽어주오.'라고 나즈막하게 시작되는 노래를 들으며 집을 나섰다. 떡볶이와 순대, 오뎅을 파는 반찬집 앞 포장마차에 옥수수 삼천원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아, 맞다. 이번 여름엔 옥수수를 못 먹었네. 반찬가게에 가 카드결제가 되는지 물어보고 하나 달라고 했다. 알록달록한 거 드릴까요? 노란 거 드릴까요? (당연히) 알록달록한 거요- 옥수수를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한 뒤 딱딱해진 채로 먹는 걸 좋아한다. 집에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둬야지. 아직 파란 저녁하늘이 근사했다. 집에서 창문 너머 올려다보는 하늘도 좋았는데 밖에서 더운 기운을 느끼며 보는 하늘은 더 근사했다. 건너편 인도에 유모차를 잠시 세우고 하늘사진을 찍는 한 엄마가 보였다. 가는 길에 개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밟지 않게 요리조리 피해 걸었다.
국밥보다 옛날돈까스가 더 맛있는 콩나물국밥집에 임시 휴업이라고 적힌 종이가 있었다. 그 옆에 임대를 한다는 안내문도 있었다. 이 집 돈까스는 맛있는데다 저렴했는데 이제 못 먹는구나 아쉬웠다. 모퉁이를 도니 8월에 브런치 겸 파스타집이 새로 생긴다는 플랜카드가 붙여져 있었고. 세탁소에 들러 낮에 가지고 간 드라이클리닝할 옷과 이불값을 치뤘다. 카드결제는 가게로 직접 와야 한다기에. 아르바이트생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사장님의 아드님인 것 같다. 젊은이가 혼자 에어컨도 켜지 않은 가게에서 빨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계좌이체를 하면 10프로 할인이 된단다. 다음엔 계좌이체를 해야지. 바베큐통닭집에 갔더니 손님들이 꽤 많았고 배달과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 닭들도 많았다. 간장 반 새콤달콤 반 전화로 시키셨죠? 기본이나 매운양념만 먹었는데 간장과 새콤달콤 맛은 처음이다. 다 먹어보니 제일 맛있는 건 매운양념!
마지막으로 편의점에 들렀다. 남편은 매번 하루치 먹을 소주만 사오는데 맥주를 쟁여두고 마시는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언젠가의 남편을 위해 참이슬 페트 두 개를 사고 언젠가 모유수유를 끝낼 나를 위해 새로나온 처음 보는 맥주를 한 캔 샀다. 술고래라는 맥주가 새로 나왔구나. 라이트 에일이라네. 바닥을 보니 제조일이 2021년 6월이다. 언제쯤 마실 수 있을까. 앞으로 맥주 고플 때마다 한 캔씩 사둬야겠다. 공동출입구 앞에 최신형 이동기구를 탄 어린이가 서 있다. 뒤에 서 있다 출입문이 열리자 뒤따라 들어갔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어린이가 7층 버튼을 누르고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고마워라. 어린이는 7층에서 내리고 나는 16층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