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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0

from 모퉁이다방 2021. 6. 30.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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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1. 09:59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푹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억지로 누워 있다 배도 불편하고 해서 일어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와 천둥번개 탓에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가 생각났다.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 있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고 거실로 나가고를 반복했다. 출산가방은 작은 방에 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펼쳐놓고 생각날 때마다 채워 넣었는데 지퍼를 잠그니 아주 빵빵해졌다. 생리대는 부피가 꽤 나가는데 무겁지가 않아 에코백에 따로 챙겼다. 집에 있으면서 책을 많이 읽지 못해 네 권을 챙겼는데 괜히 챙긴 거 아닌가 싶다. 아침에도 다정한 사람들의 메시지가 이어졌고, 남편은 느즈막히 일어나 지난 밤 설거지 중이다. 차분한 노래들을 듣자 싶어 강아솔 음악을 재생목록에 잔뜩 추가했는데 <사랑을 하고 있어>가 너무 좋아 계속 반복 중이다. <온앤오프>에 김윤아가 아들과 남편과 함께 여름카레를 만들어먹더라. 왜 여름카레인가 하면 여름에 나오는 채소들이 듬뿍 들어가기 때문. 양파, 가지, 파프리카, 돼지고기에 토마토 소스까지. 여름채소들을 잘게 썰어 넣더라. 우스타 소스와 간장도 넣고 이것저것 마지막에 추가하면 완성되는 여름카레. 이름이 너무 예쁘다, 여름카레. 오늘 물도 한 방울 못 마시는 상황에서 그 여름카레가 갑자기 너무 먹고 싶다. 쌀밥에 뜨끈뜨근한 카레 얹어서 한 입 가득- 후아.    

 

 

사랑을 하고 있어 

- 강아솔

 

제법 추운 밤이었지

창밖으로 별이 내리고

너에게 기대는 내게 말없이

어깨를 낮추어주던 너

엇갈리던 숨소리가 

어느새 하나로 들려와

이대로 우리 잠들 수 있다면

순해진 마음을

가만히 안고서

나 사랑이 믿어지던

시간들을 기억해

사랑이 사랑으로만 

설명되던 순간들을

어떤 물음도

단 하나의 답으로 충분했던

너를 보면 나 사랑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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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0. 21:38

 

 

 

  늦은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에 있는 여인초 큰 잎들이 휘청거렸다. 날씨가 좋아 방 창문들을 다 열어놨는데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니 작은 숲의 나무들이 세차게 출렁거린다. 오늘 날씨예보에 갑작스런 비가 있다고 했는데 진짜네. 마치 태풍 직전처럼 쏴아쏴아 바람소리가 들리니 이상하게 가슴이 시원해진다. 내일 수술 때문에 자정부터 물 포함 금식이라 세끼를 아주 기똥차게 먹기로 했는데 늦은 아침 덕분에 늦은 점심이 되고 엄청 늦은 저녁이 될 예정이다. 사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튀어나온 배도, 배 안에서 꿈틀거리는 태동도, 뒤뚱거리며 걷는 것도 모두 마지막이라는 것이. 오늘 출산 전 마지막 엽서를 쓰다가 영화 <소울> 생각이 났다. <소울>에서 '태어나기 전 세상'에 있던 생명체들이 자신에게 딱 맞는 '불꽃'을 찾은 뒤 지구를 향한 비행을 시작하는 장면. 속도를 높이며 신나고 즐거운 표정으로 지구에 입성하는 장면. 아마도 탕이는 지금씩 마지막 불꽃을 찾았겠지. 엄마아빠를 만나러 즐거운 비행을 시작하겠지. 탕이는 어떤 표정으로 세찬 바람을 가르며 올까. 신나고 즐겁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수술 전 무서운 생각이 들 때면 그 표정을 상상해봐야지. 우리의 아이가 마침내 마지막 불꽃을 완성하고 신나게 바람을 가르며 오고 있다 생각해야지.

 

  예정일이 6월 12일 토요일이어서 매주 토요일마다 주수가 바뀌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는 늦잠을 잤고 침대에서 최대한 뒤적거리다 앱을 켰다. 앱에는 매주 아기의 주수별 특징이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14주에는 잇몸에 유치가 생겼다고 했고, 19주에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했다. 24주에는 생식기가 발달하고 있다고 했고, 27주에는 눈을 뜰 수 있다고 했다. 30주에는 숨쉬기 연습에 열중이라고 했고, 32주에는 손발톱이 거의 다 자랐다고 했다. 37주에는 피부를 보호하던 태지와 솜털을 벗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38주에는 손가락을 빨고 하품도 미소를 짓거나 얼굴을 찡그릴 수도 있단다. 태어난 아기들이 하는 모든 배냇짓을 하며 엄마 아빠를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단다. 이런 주수별 특징을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한 사람이 읽고 한 사람이 들었다. 그러면서 정말? 그걸 이제 할 수 있대? 하며 신기해했다. 전탕이 콩콩콩- 죤탕이죤탕이- 라고 부르며 즐거워했다. 이 토요일 아침시간도 마지막이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물음표 투성이다. 내일 당장 아가가 태어난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는데. 병원에 들어서면 실감이 나겠지. 심장이 마구 떨리기 시작하겠지. 잘 할 수 있다, 잘 할 수 있어,  스스로 되뇌어야겠지. 남편은 하루종일 차태현이 나왔던 <번외수사>에 빠져 드라마 시청 중이고, 아침부터 다정한 사람들이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다. 교촌치킨과 참외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식사를 마무리해야지. 으으- 마흔 둘의 노산 엄마, 화이팅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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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0. 14:55

 

 

  아빠는 롯데팬인데, 야구 이야기를 하면 자신은 그리 팬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까 그 시간마다 보게 되는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른 휴가가 시작되고 집에만 있게 되자 매일 야구를 챙겨보게 되었다. 아빠 말대로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 보게 되더라. 미세먼지 가득한 날도 있지만 맑은 날들도 꽤 있어 푸른 잔디밭과 맑은 하늘, 뻥-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날아가는 공들도 볼 수 있고, 뭔가 축구나 농구와 달리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긴장되는 경기의 흐름도 그렇고. 경기장 한가로운 자리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다 하루키 생각이 났다. 하루키가 한가롭게 야구경기를 보다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작가의 말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책은 이사를 하면서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다행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이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해 팔지 않았다.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에 나는 진구 구장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해의 센트럴리그 개막전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히로시마 카프의 대전이었습니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낮 경기입니다. 나는 그 당시부터 야쿠르트 팬이었고, 진구 구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센다가야의 하토노모리하치만 신사 옆입니다) 산책 나간 김에 자주 야구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 무렵의 야쿠르트는 아무튼 약한 팀이어서 만년 B 클래스에 구단도 가난하고 화려한 스타 선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인기도 별로 없었어요. 개막전이라고 해봐야 외야석은 텅텅 비었습니다. 나 혼자 외야석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면서 경기를 봤습니다. 당시의 진구 구장 외야석은 의자가 아니라 잔디 비탈뿐이었습니다. 무척 상쾌한 기분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늘은 맑게 개고 생맥주는 완벽하게 시원하고 오랜만에 보는 초록빛 잔디 위에 하얀 공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야구란 역시 야구장에 가서 봐야 하는 것이지요. 진짜로 그렇습니다. 

  야쿠르트 선두 타자는 미국에서 온 데이브 힐턴이라는 호리호리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타순 1번이었습니다. 4번은 찰리 매뉴얼입니다. 나중에 필리스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그는 실로 힘세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타자여서 일본 야구팬에게는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분명 다카하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쿠르트의 선발은 야스다였습니다.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도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시합이 끝나자(그 시합은 야쿠르트가 이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전차를 타고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원고지와 만년필(세일러, 2,000엔)을 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워드프로세서도 컴퓨터도 보급되지 않아서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신선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만년필을 사용해 원고지에 글씨를 쓰다니,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가게 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썼습니다. 새벽녘까지의 그 시간 외에는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략 반년 만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을 썼습니다(당초에는 다른 제목이었지만). 초고를 다 썼을 때는 야구 시즌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해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에서 최고의 투수진을 거느린 한큐 브레이브스를 깨부쉈습니다. 그것은 실로 기적 같은, 멋진 시즌이었습니다. 

- p. 45-4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독서대에 책을 펼쳐 45페이지에서 47페이지를 옮겨 적었다. 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초여름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그러니 당신도, 나도 뭔가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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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8. 18:24

 

열달동안 차곡차곡 받아온 마음들.

 

 

 


전탕이야, 소중한 마음들을 잊지않는 고운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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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남해통영

from 여행을가다 2021. 5. 28. 10:56

 

 

  작년 팔월에는 남해로 여름휴가를 조금 느즈막이 다녀왔다. 첫번째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여수에 가 렌트를 한 뒤 남해를 거쳐 통영으로 그리고 다시 여수로 돌아와 렌트카를 반납하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코스였다. 이때 수도권에서 코로나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어 엄청 조심하고 조심했는데, 지금까지도 이러고 있을 줄, 그때보다 더 심해질 줄 상상도 못했네. 여행내내 비가 왔다. 심지어 여수에 내려간 첫날에는 태풍이 왔더랬다. 어쩔 수 없이 많이 다니지 못한, 이른바 숙소여행이었다. 일년치 자기계발비를 거의 이 여행 숙소에 다 썼다. 여수에서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자그마한 개별 수영장이 있는 호텔에서 묵었고, 남해에서는 풀빌라에 묵었다. 방문을 열면 개별 바베큐장과 개별 수영장이 있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풍광이 아주 좋았다. 통영에서는 예전에 묵었던 에어비앤비를 다시 방문했다. 원래는 동생들도 내려올 거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왔다. 대신 엄마아빠와 넷이서 오붓하게 보냈다. 예전에는 없었는데 숙소 바로 앞에 바베큐를 해 먹을 수 있는 옥상이 생겼더라. 시장에서 조개를 사와 구워 먹었더랬다.

 

  여수에서 창밖으로 몰아치는 태풍을 마주하며 한 잔 하고 있는데 남편이 그런 말을 했더랬다. 우리가 아이 없이 둘이서 잘 살아나가려면 앞으로 많이 노력해야 할 거라고. 같은 취미도 만들고 등등. 나는 왠지 그 말이 좀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은 정말 좋지만, 앞으로 긴 시간 우리가 잘해 나갈 수 있을까, 변함없이? 남해에서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들린 커피집에서 가까운 곳에 기념품가게가 있다는 걸 알게됐다. 아, 기념품가게는 그냥 넘길 수 없지. 찾아가서 파스텔 그림의 남해엽서와 남해지도가 그려진 민트색 마그넷을 사왔다. 통영에서는 숙소 옥상에서 한창 바베큐를 하다 내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 해서 들어왔는데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엄마가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했다. 아빠는 그전에 뭔가 사온다고 나가서 그 비를 잔뜩 맞고 온몸이 푹 젖어 돌아오고.  

 

  요즘은 단체사진의 중요성을 느낀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여럿 모이면 단체사진을 꼭 찍어두어야지.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삼각대도 하나 사두었다. 시간이 너무 확확 흐르니까 그때그때 우리들의 모습을 남겨두지 못한 게 아쉽다. 이때도 엄마아빠랑 남편이랑 넷 사진을 남겨두지 못했네. 숙소 옥상에서 풍성했던 하늘구름과 함께 찍었으면 근사했을텐데. 다음번 여행에는 꼭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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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7. 11:31

 

 

  어제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그랬다. 좋은 와이프 얻어서 자기가 이런 호사도 누린다고.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남편에게 봉투를 건넸는데 이건 너 거야, 금령이꺼 아니라 용효 너 꺼야, 그러니까 꼭 너를 위해서 써, 라고 했다. 봉투 안에는 상품권과 메모가 있었다. 아기와 나는 선물을 많이 받았으니 이건 꼭 너를 위해서 쓰라고, 지금껏 좋은 남편이었고 이제 좋은 아빠가 될 게 분명하다고 쓰여 있었다. 남편은 자기 친구들은 아기를 낳으면 선물 같은 건 하지 않고 아빠가 되는 사람이 술을 한 턱 쏜다며 내 친구들의 연이은 선물과 격려를 놀라워했다. 나도 결혼식 이후 이렇게 벅찬 감정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모두들 너무너무 고맙다. 내가 이렇게 챙김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건지. 아기를 잘 낳고 길러서 고마움에 보답해야지. 

 

  어제는 역시나 친구가 멀리서 얼굴을 보러 와줬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왔다고 한다. 나는 동네를 빙 둘러서 둘이 먹을 빵과 샐러드를 사왔다. 동네에 좋아하는 꽃집이 있는데, 수요일마다 행사를 한다. 작은 꽃다발을 한정수량 만들어 오천원에 판다. 꽃다발을 두 개 사와 하나는 친구를 주고 하나는 유리컵에 꽂아뒀다. 내가 가진 꽃은 스토크, 비단향꽃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찾아보니 이런 설명이 있었다. '영원히 아름답다'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또 어떤 역경이라도 밝게 극복하는 강인한 사람을 뜻하기도 하며,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훌륭하다는 뜻도 안고 있다. 

 

  이번주에는 어디에든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동생이 오늘 아침 축하메시지를 보내며 둘이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네, 라고 했다. 오늘은 출산 전, 진짜 엄마가 되기 전 마지막 생일. 마지막 목요일이기도 하고. 일찌감치 일어나 어제 배달온 갈비탕에 미역을 추가해 아침밥을 먹었다. 비가 촉촉히 내리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늘은 책을 조금 읽어야지. 요즘 통 책을 읽지 못했다. 좋은 영화도 한 편 볼 수 있으면 봐야지.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면 같이 밥을 먹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하루를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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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5. 22:50

 

 

  오늘은 수술 전 마지막 정기검진일. 태동검사를 하고 진료를 봤다. 검사 이십분 여 동안 탕이는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이런 사랑스런 태동도 이번주가 마지막이다. 사람 많은 토요일보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평일이 병원도 간호사 분도 선생님도 여유로우시다. 선생님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물으셨다. 아직도 머리가 위에 있을까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역시 탕이는 돌지 않았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진료 외 다른 이야기를 건네셨다. 오늘의 날씨에 관한 것이었는데, 밖의 날씨가 어떤가요? 바람이 많이 불어요. 날씨 때문인지 오늘따라 손이 많이 차가운데 배에 손 올릴 때마다 걱정이 된다고. 선생님이랑도 어느새 팔개월 째다. 다 정상이란다. 오늘은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여 주셨다. 뭔가 저번 진료 때보다 얼굴이 성숙해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입술은 나를 닮았는데 턱 부분은 남편을 닮은 것도 같다. 지난 주에 이어 여전히 탯줄을 목에 감고 있는데 느슨하게 한 번 감고 있어 자세를 돌리면 금방 풀어질 것 같다고 걱정하지 말라 하셨다. 

 

  오늘은 남편이 늦게 출근해도 된다고 해서 병원을 나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순대국. 탕이는 이제 2.9키로이고, 머리크기며 배둘레가 1주 정도 늦다. 선생님은 다음주면 3키로 조금 넘을 거고 양수양도 충분하니 수술하기 전에 아기 위치를 진료실에서 한 번 보고 올라가자고 하셨다. 31일 월요일에 12시까지 병원에 가야한다. 토요일에 남편과 나는 코로나 검사를 해야하고, 수술은 1시 반에서 3시 반 사이에. 밥을 먹고 각자의 커피를 사들고 집까지 왔다. 남편은 그대로 회사에 갔고 나는 집에 와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들을 검색하고 주문했다. 병원가서 살 것들을 빼면 대충 준비는 끝난 것 같다. 이번주에 빨래를 한두번 더 돌리면 될 것 같고. 친구들의 선물이 택배로 도착하고 있고, 나는 너무너무 고마운데, 이 마음이 온전히 전달될까 싶고. <노매드랜드>를 결제해서 봤는데 영화관에서 큰 화면에 집중해서 봐야했던 영화였다. 아주 큰 스크린 화면에 펼쳐졌으면 정말 멋졌을 장면들이 이어졌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 포스트잇을 붙여둔 좋은 구절들을 옮겨 쓰고 있는데, 오늘은 이주란의 소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다. 이 책은 좋았던 단편과 그렇지 않았던 단편이 분명했는데,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준과 나의 여름'이 좋았다. 힘들지만 소중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준과 나의 여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근데 I 말이야. 너무 귀엽지 않았어?

  너도 귀여워!

  우리도 그런 아이 낳을까?

  오늘?

  ......

  오늘 너무 고맙네.

  만약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골프연습장은 못 보내겠지.

  그런 걸 뭐 아무나 보내나.

  만약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 먹고 나눠 쓰며 살아야 하겠지.

  내 거 다 줄게.

  아냐, 아냐.

  우리는 다 마른 발을 포개고 누웠다. 나는 오늘 준이 전에 없이 다정하다고 느꼈다. 왜......라고 생각하며 그의 이마와 손가락 같은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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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4. 13:29

 

 

  지난주에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봤다. (영화 스포일러가 있어요) 남편이 갑자기 이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아는 대충의 줄거리를 말해줬는데 나는 바로 보자고 했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부부로 나온다. 그들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메릴 스트립이 떠나겠다고 한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동안 회사에 몰두하느라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더스틴 호프만은 아들을 혼자 키우게 된다. 아내가 떠난 다음 날 프렌치 토스트를 아침으로 만들어달라는 아들의 요청에 고군분투하지만 주방과 음식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 뒤 그는 차츰차츰 집안일과 아들 돌보는 일에 적응해 나간다. 덕분에 회사에서 맡은 일은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들 돌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 부족하지만 점점 좋은 아빠가 되어간다. 몇개월 후 메릴 스트립이 돌아온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았고, 자신이 아들을 충분히 혼자 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양육권을 주장한다. 더스틴 호프만은 소중한 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들을 돌보느라 회사에서 잘렸지만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연봉이 낮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직장을 구한다. 두 사람은 법정에서 다툰다. 결국 메릴 스트립이 양육권을 차지하게 된다. 더스틴 호프만은 받아들인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어난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프렌치 토스트. 메릴 스트립이 떠난 다음날 고군분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척척 아침을 준비해나간다. 아들이 커다란 볼에 계란을 포크로 잘 저어주면 아빠가 식빵을 촉촉히 적셔 후라이팬에 얹히고 타지 않게 적당한 때에 잘 뒤집어 준다. 그리고 식탁에서 각자의 읽을거리를 읽으며 따뜻한 아침을 먹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영화는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영화는 더스틴 호프만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였는데, 메릴 스트립 관점에서 찍는다면 또 다른 영화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똑같을 거다. 

 

  주말에는 부모님이 결혼식이 있어 올라오셨다. 가족들이 다같이 모였다.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막내동생네로 가서 과일을 먹었다. 엄마는 남편에게 술 한잔 하라고 하고 동생네에서 자고 내일 가라고 했다. 나는 요즘 밤에 잠도 못자고 화장실을 자주 가는터라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거라 했는데 괜찮다고 자고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둘째동생도 남편과 나도 모두 막내동생네서 잤다.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모여서 잤다. 결국 나는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힘들어했고 그걸 둘째동생만 지켜봤지만. 다음 날 아침에 김밥을 사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집에 안 가고 하루 자길 잘했다 생각이 들었다. 둘째동생이 커피도 내려줬다. 남편은 동생네서 술 한 잔을 하며 우리 가족이 이렇게 모두 모인 건 처음이다, 너무 좋다, 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남편이 '우리 가족'이라고 말해서 울컥했다. 남편이 엄마 아빠를 장모님 장인어른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말해주는 것도 고맙고. 동생네에서 나오며 모두 다음에는 여덟명이서 만나자고 했다. 이제 탕이까지 '우리 가족'이 여덟명이 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가족 모두 조금씩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할 거라 믿고 있다. 아, 딱 일주일 남았다. 남편 친구가 아기침대를 물려줘 어제 가져와 조립하고 우리 침대 옆에 뒀다. 아주 조금씩 실감이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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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놀룰루

from 여행을가다 2021. 5. 21. 17:16

 

 

  호놀룰루에서는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콘도를 빌렸다. 숙소를 예약할 때 찾아보니 와이키키 쪽에는 호텔들이 오래되어서 시설에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콘도로 예약을 했다. 내부는 리모델링을 해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주방이 있었고 침대가 두 개였다. 테라스도 있었다. 테라스성애자는 대만족. 호놀룰루에서도 실렁실렁 다녔다. 떠나기 전날 정신없이 쇼핑하느라 시내 매장 안에 있은 날을 제외하고는 하와이에서 매일 일몰을 봤다. 콘도 주인 분이 추천했던 남쪽에서 시작해 해안도로를 빙 둘러 북쪽으로 가려던 계획은 길을 잘못 들어 실패했다. 그 반짝반짝 빛나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를 놔두고 도로 밖에 없는 섬 중간을 가로질러 갔다. 유명한 푸드트럭 갈릭새우요리를 먹으려고 땡볕에 한참을 서 있다가 어디 가서 이렇게 줄 서서까지 음식은 먹지 말자 다짐했고, 오바마가 좋아했다던 식당에 가서 로코모코를 시켰는데 너무 양이 많고 너무 느끼해서 둘이 겨우 나눠 먹었다. 앱에서 완전 맛집으로 추천해 준 와이키키 타코집에 들어갔는데 토핑 종류가 너무 많아 둘이 어리버리하게 서 있다 제일 기본 맛으로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오기도 했다. 정인이가 강추했던 브런치 집은 계속 늦잠을 자고 늦게 움직이는 바람에 가보질 못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지만 몇 번 다투기도 했었다. 

 

  그래도 매일 맥주를 마셨고, 함께 있었고,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다. 가이드북에서 소개한 작은 소품샵의 소품에 꽂혀 별 게 없는 자그만 마을에 가기도 했고, 숙소 근처에 푸드트럭 식당을 발견하고 커다란 맥주를 사서 이것저것 시켜 먹기도 했다. 기둥이 어마어마했던 오래된 나무들이 길가에 즐비했고, 높은 층 숙소에서 바라보는 낮과 밤의 풍경도 근사했다. 그때는 방귀를 트지 않았던 때라 새벽에 방귀가 마려워 테라스로 나왔는데 저 멀리서 해돋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시간 건물들 빛깔도 구름들도 그 사이사이 새어나오는 아침해도 너무 근사해 핸드폰을 가져와 사진을 찍다 남편을 깨워 데리고 나왔다. 너-무 멋지지? 남편은 비몽사몽에 으...응 답하고 들어가고. 친구들과 가족들 선물 사는 재미도 쏠쏠했다. 파타고니아 매장에서는 친구 남편이 예전에 사서 애용한(이 매장에서만 파는 거라고 했다), 이제는 많이 낡아져 버린 모자를 선물하려고 찾아서 계산하려는데 직원이 '라스트 원'이라고 말해줘서 신났었다. 파타고니아 매장 옆에 있던 보석집에서 2+1으로 산 진주 귀걸이는 동생의 애용품이었다. (지금은 잃어버렸다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는 늦게까지 하는 바를 찾아갔다. 야외 자리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라이브 공연을 하는 가게라 안쪽에서 생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음악도, 머리 위 야자수도, 눈앞의 와이키키 해변도, 시원한 맥주도, 선선한 날씨도 모두 좋았다. 둘이서 너무 좋다는 말을 계속 해댔다. 그리고 쪼리를 벗고 밤파도소리를 들으며 와이키키 모래사장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묵은 콘도에는 보증금이 있었는데 퇴실할 때 아무 이상이 없으면 그 보증금을 돌려줬다. 그동안 운전하느라 수고한 남편에게 남은 보증금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레고를 마음껏 사라고 했다. 지금 군포집 책장에는 그때 산 레고 집과 공룡과 차 비스무리 한 게 전시되어 있다. 아, 마무이 브랜드 맥주가 제일 맛있었는데 그건 하와이에 다시 갔을 때만 맛볼 수 있겠지? 맥주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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