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
역시 폴 오스터는 처음이 힘들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폴 오스터 책을 읽을 때마다 책장을 덮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첫 도입부분이다. 이 부분만 지나면 미친듯한 속도로 읽어나가는데 유독 처음이 힘들다. 이번 기록실로의 여행도 그랬다. 나는 왜 제목을 '기록실'로의 여행이 아니라 '기록실로'의 여행으로 생각했을까? 참 바보같이 '기록실'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기록실로'라는 어떤 내가 모르는 지명이라고 생각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폴 오스터에게만 존재하는 그런 곳. '미스터 블랭크'라는 노인이 어딘지도 왜 갇혀 있는지도 모르는 방에서 이전에 수감되었던 어떤 사람의 글을 읽으며 미스터 블랭크 자신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하지만 그들은 미스터 블랭크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책을 다 읽고나서 알았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주인공인 '미스터 블랭크'의 정신세계를 똑같이 느끼고 읽었다는 것. 폴 오스터는 소설의 처음에 미스터 블랭크와 어딘지 모르는 이상하고도 밀폐된 공간을 우리에게 주었다. 기억하고 싶지만,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을 주고 소설 속 주인공 미스터 블랭크와 독자를 동시에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기억이 날 것도 같지만 (폴 오스터의 예전 작품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결코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방문객들이 등장한다. 미스터 블랭크와 독자는 동시에 생각한다. 내가 이 사람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나를 기억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이름정도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이전 수감자가 썼다는 글. 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주인공의 행보가 흥미로운 글이다. 그리고 중간에 이야기를 끊어버린다. 뒷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생각해봐. 미스터 블랭크와 독자는 동시에 생각한다. 이 사람들을 그냥 죽어버려? 말아? 그냥 죽여버리면 너무 재미없잖아. 이렇게 이야기 한 편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미스터 블랭크도 어떤 방문객도 아닌, 폴 오스터가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미스터 블랭크는 우리 중 하나이고 자기의 곤경을 알면서도 싸우다 늘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p.222 이건 소설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폴 오스터 자신은 이렇게 소설을 써 나가고 있다고. 이렇게 쓰다보면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이 된다고. 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이렇게 한번 써 내려가 보라고. 혹은 나는 이렇게 쓰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읽어주었으면 한다는. 책을 읽으면서 영화 '어댑테이션'이 생각났다. 천재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이 '존 말코비치 만들기'의 대성공에 이어 맡게된 '난초도둑'이라는 책의 각색 작업. 찰리는 창작의 어려움과 자신은 무능하고 재치없는 작가라는 자책감으로 시달리게 된다. 결국 영화는 찰리가 '난초도둑'을 각색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펼쳐지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중반부까지는 픽션이 아니라 분명 논픽션일 거라고 확신했었다. '기록실로의 여행'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이건 폴 오스터의 이야기라고. 어느날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만나게 되었고(그것이 꿈이였든 현실이였든) 폴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것이 폴에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다시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쓰자고.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고. 신경숙 작가의 인터뷰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어딘가에 자신이 창작한 인물들이 살아나가고 있을 것만 같다고. 그래서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안쓰럽고,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괜시리 걱정이 된다고. 폴 오스터도 그런 마음 아니였을까? 어느새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 혹은 따뜻하지 않은 세상에 내 놓은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 있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미안하다고 너희 이름을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는 그런 행위가 소설 '기록실로의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미스터 블랭크가 그랬지만 실은 폴 오스터 자신이 수첩에 꾹꾹 눌러담았을 이름들. 제임스 P.플러드 안나 데이비드 짐머 피터 스틸먼 주니어 피터 스틸먼 시니어 팬쇼 새무얼 파 존 트로즈 소피 대니얼 퀸 마르코 포즈 벤저민 삭스 |
'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341건
- 기록실로의 여행 - 폴 오스터의 고백 2 2007.07.09
- 장미도둑 - 비가 그친 새벽 거리를 걷다 2 2007.07.08
- 헤이,웨잇 - 노르웨이 어디쯤에 있는 우리들 이야기 2007.07.03
- 슬픈 카페의 노래 - 사랑, 등을 돌리지 말아요 2007.07.03
- 인생의 베일 - 깊은 밤, 서머싯 몸 2007.06.09
- 슬픈 예감 -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같은 2007.06.09
- 여운이 가득한 '판타스틱'의 세계 2007.06.08
- 여행자 - 그리고 이어지는 사진들 2007.06.08
- 배추 절이기 2007.06.08
-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4 2007.06.08
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
아사다 지로의 책은 처음이다. 원작으로 유명한 <철도원>이나 우리 영화 <파이란>은 보았지만, 책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건 처음이다. 자주 가는 수선님의 홈페이지에서 이 단편 소설집이 너무 좋아 책 표지를 침대 가까이에 붙여두었다는 말에 어떤 작품이길래,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작가에게 반했다는 말부터 시작하겠다.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고독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는지, 극복해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또 꾸역꾸역 살아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 편의 단편이 끝내고 새 단편을 읽게 되면서 계속 앞의 단편을 뒤적거렸다. 새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방금 읽었던 단편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떤 사람인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 앞으로 넘겨서 반복되는 이름이 없나 뒤적거린 것이다. 결국 반복되는 이름은 찾지 못했는데, 아직도 내가 꼼꼼하게 찾아내지 못해서 그런 것만 같다. 옴니버스 구성처럼 '수국꽃정사'에 스쳐지나간 인물이 '나락'의 주인공인 것만 같고, '나락'에서 스쳐지나간 인물이 '죽음 비용'의 주인공인 것만 같은 느낌.
제일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첫번째 단편, 수국꽃정사. 실직하게 된 중년의 카메라맨과 퇴락한 온천가 중년의 스트리퍼 이야기.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티비 여행정보 프로그램에서 종종 보게되는 겨울의 일본 노천 온천을 보며 꼭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얼굴은 찬 바람으로 얼얼한 채 흩날리는 눈과 함께 온천을 하는 기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풍경. 수국꽃정사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스트리퍼와 카메라맨이 아무도 없는 각각의 온천탕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그 때 스트리퍼를 고백한다. 사실은 어릴 때 헤어진 아들 앞에서 춤을 춘 적이 있어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함께 죽어달라는 부탁을 받아준 카메라맨.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런 고백을 듣고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삶이 그리 행복하지도 않다면, 처음 본 사람과 죽을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들. 한줄 한줄 읽어나갈 때마다 까만 마스카라가 볼에까지 까맣게 번져 울고 있는 중년의 스트리퍼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찌릿했다.
나락은 대화에서 대화로 이어져 나간다. 어느 날 도착하지 않은 채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로 떨어져 죽게 된 중년의 회사원에 관한. 장례식을 다녀온 여직원들의 대화, 장례식을 지키고 있는 그의 동기들의 대화, 장례식을 막 나온 사장과 비서와의 대화. 결국 이들의 대화 속에서 밝혀지는 죽음과 관련된 크고도 사소한 이야기들.
결국 누군가 치밀하게 설계한 죽음의 계획 같은 건 없는 거 아닐까? 누구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사는 거니깐. 모든 건 자격지심에서 시작된 것 같다. 기타기리는 그저 삶이 힘들어져서 떨어져 버린거라고. 떨어지는 순간 웃음도 누군가를 증오했던 것이 아닌 그저 고달한 삶을 놓아버리는 순간의 편안함 아니였을까?
수국꽃정사 다음으로 좋았던 단편. 죽음 비용. 있는 힘껏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국엔 노년에 남는 것이라곤 돈 밖에 없다는. 자식도 회사도 부와 명예도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그렇지만 오우치는 죽는 순간의 고통을 없는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었던 마음과 함께 하는 것.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아파해 줄 사람, 그가 겪게 될 죽음의 순간을 가장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 항상 곁에 있었지만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 중국의 황제에게만 허락되었던 어떤 부위에 침을 놓는 행복하지만 쓸쓸한 행위의 죽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죽음.
글을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이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행복한 죽음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까?
히나마츠리에서 제일 좋았던 묘사는 12살의 야요이와 24살의 요시이가 비가 그친 밤의 거리를 나란히 걸어 목욕을 하러 가는 장면이다. 겨울의 비가 그친 거리를 걸어가며 도란도란 나누는 쓸쓸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함께 있어 행복한 두 사람. 그리고 밤바람을 맞으며 목욕을 하고 돌아와 마시는 맥주 한 잔.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본의 아메리칸 스쿨에 다니는 아들 요이치. 1년에 반 이상을 항해를 하는 대디. 그리고 정원 손질따위는 손톱이 망가지는 일이라며 절대 하지 않는 마마. 이 글은 요이치가 항해를 하는 대디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는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 동네에 장미 도둑이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가장 외로운 사람인 마마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결국 장미 도둑은 다른 외부인이 아니라 각각의 집 안 사람인지도 모른다. 늘 떠나있는 남편이 있는 부유층의 하늘하늘한 옷을 입는 엄마들. 누구든 꺽어 놓아주기만 하면 어느 곳이든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장미와 같은, 가시때문에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
마지막 단편, 가인에서 확실해졌다. 아사다 지로는 쓸쓸하고 고독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는 걸. 모든 이야기들은 행복한 기운을 보이면서 끝을 맺는다. 일상은 계속되고, 어쩌면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믿음. 그리고 그래야만 되지 않을까, 하는.
첫장을 넘기면서 외로워져버린 마음이 마지막장을 넘기고 나니 아, 행복해져버렸잖아,라고 말해버리는 비가 그친 새벽거리를 걷듯 고즈넉하고 편안한 여섯 편의 이야기들. 아사다 지로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
제이슨 지음/새만화책
조심하세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니...
-딜런 호록스
<헤이, 웨잇>을 만나게 된 건 순전히 김영하씨 때문이예요.
어디선가 김영하씨가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한 권 더 사서
이우일씨에게 선물하려고 만난 자리에, 이우일씨도 이 책을 가지고 나왔더라는.
얼마나 좋은 만화책이길래 서로에게 선물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까 궁금해서 냉큼 주문을 했어요.
그리고 저도 세 권을 더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했어요.
이 책은 소중한 사람에게 권해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제 생애 최고의 만화책이예요.
노르웨이 어디쯤에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예요.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꿈이 있었고, 때로는 용기 있었던.
때로는 무모했고, 때로는 무료했고, 때로는 용기 없었던.
때로는 힘들었고, 때로는 슬펐고, 때로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외로웠던.
그러다보니 어느새 끝나버리는 삶에 대한 이야기예요.
어린 시절에 본 어른들은 늘 위태위태한 막대기를 타고 다녀요.
감당하지 못할 슬픈 일을 겪고, 마치 재채기하듯 훌쩍 어른이 되어버리곤 하죠.
어린 시절 절대 바보같은 어른따위는 되지 않을거라 다짐들은 잘 지켜지지가 않아요.
5분만에 읽어버리지만, 50년을 고이 간직하면서
계절이 바뀔때마다 한번씩 꺼내보고 싶은 책이예요.
살아가면서 50명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에게 전해주고 싶은 책이예요.
초여름 세번째로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지금 나는 2부 어디쯤 왔을까 생각해봅니다.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열림원
스무살 갓 지났을 때 내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지금에 와서야 사랑이라고까지 할 수 없었던 감정이였다고 말하지만, 당시 내 가슴은 요동쳤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바짝 다가와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던 그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선을 긋고 절대 넘어오지 말라하고 뒤돌아섰다. 나는 '왜 사람들은 항상 등만 바라보는 걸까? 마주 보면 좋을텐데' 라고 말했고, 그 아이는 등을 더욱 바짝 세운 채 뒤돌아서 갔다.
슬픈 카페의 노래에는 서로의 등만 보는 사랑들이 있다. 아득하고 무너질 것 같은 등을 마주하고 사랑한다 말하는, 삼각관계라고 표현해버리기에는 너무나 깊은 사랑. 결코 내 앞의 그 사람이 뒤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사랑, 곧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나를 떠나버릴 것을 아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랑.
뼈가 사무치게 고독해서 이제는 다시는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은 여자, 그가 너무나 나쁜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줄 수 밖에 없는 남자, 평생 단 한번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에게 복수를 하는 남자가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슬픈 카페에 살았다. 그들은 사랑할 때 행복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아주지 않을 때 불행했다. 행복은 너무나 작았고,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결국 내 사랑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너무나 이기적인, 그래서 너무나 솔직한, 그래서 너무나 슬픈, 그래서 결국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사랑. 사랑. 사랑.
책을 읽으면서 슬픈카페에서 팔았던 영혼이 따뜻해지고 아픈 기억따위는 잠시 지워버릴 수 있는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만들었다는 술을 한 병 마시고 싶었다. 한 모금 마시면 따뜻해지고, 한 모금 더 마시면 행복해지고, 그렇게 세 병을 마시면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돌아서며 씽긋 웃어만 줄 것만 같은 술. 그리고 그 마법같은 밤이 지나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숙취와 함께 등을 돌아선 사랑이 있는 불행한 현실로 돌아온다 해도 낮시간만 잠시 견디면 카페는 다시 문을 열 것이고, 그 사람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힘을 낼 수 있는 그런 술.
결국 사랑이다. 너무나 힘든 주고받는 마음의 대칭. 내가 사랑하면 그도 사랑해주고, 내가 등을 돌리면 동시에 그도 등을 돌릴 수 있는, 이렇게보면 정말 쉽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슬픈 카페에서는 더더욱.
인생의 베일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민음사 |
어느날 새벽에 잠이 안 와 뒤척거리다 서머싯 몸의 <레드>라는 단편을 읽었습니다. 단숨에 단편을 다 읽고나서 멍하니 잠을 이루지 못한 기억기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리도 아름답고 허망한 묘사라니. 그리고 서머싯 몸의 소설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달과 6펜스>와 이번 <인생의 베일>밖에 읽어보질 못했지만요.
아무튼 많은 기대를 안고 책을 읽었습니다. 꽤 두꺼웠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잘 읽혔습니다. 그리고 이번 소설 역시 좋았습니다.
저는 서머싯 몸이 이야기하는 '열정적 사랑이 시간과 명예 앞에서는 언젠가는 차갑게 식어버리고 만다'는 식의 태도가 마음에 듭니다. 어떤 사랑이든 열정적인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저의 생각과 맞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래서 그의 책을 읽을 때면 마음이 착찹해지고 쓸쓸해집니다.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어버린 사랑 앞에서 고독해지는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은 주인공 '키티'의 성장소설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키티'는 소설 속의 사건들을 통해서 성숙해갑니다. 자신만을 생각했던 이기적인 그녀가 불륜과 배신,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됨으로써 겪게되는 여러 경험들이 약하기만 했던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갑니다. 한낱 바비인형에 불과했던 키티가 어엿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너무 이기적인 그녀를 나무라고, 때로는 한순간 성숙하고 모든 일에 초연해진 그녀를 부러워하면서 재밌게 소설을 읽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습니다. 여전히 나는 이기적이고 초연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람이라. 그리고 나중에 깊은 밤, 잠 못 이루게 되면 키티가 생각 날 것 같습니다. 제가 읽은 서머싯 몸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랬던 것 처럼요.
슬픈 예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집을 떠났던 야요이도, 스무살의 나 자신도. <슬픈 예감>은 열아홉살의 야요이의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그 나이가 늘상 그렇듯 수많은 내 안의 갈등을 겪고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말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처음이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결국 제일 처음 읽게된 그녀의 소설이 <슬픈 예감>이다. 살펴보니 이 소설이 바나나의 첫 장편 소설을 다듬어 다시 재출간한 것이라는데, 이를테면 내가 그녀의 첫 장편작부터 읽으려고 다른 작품들을 미뤄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녘에 읽기 시작했다가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일본 소설 특유의 건조한 문체에 순정 만화같은 스토리에 아기자기한 감성들이 듬뿍 담겨져 있다. 푸른 나무의 냄새, 깜깜한 밤과 반짝이는 별, 모락모락 피어나는 홍차의 향기, 파인애플로 만든 새콤한 카레의 맛이 소설 전체에 가득하다.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이고 순정만화같은 이야기라, (특히 쭉 남매로 자라온 남동생과의 관계는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었다) 거부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아기자기한 일상의 촉각, 시각을 풍요롭게 만드는 표현들이 어우러져 작가 특유의 세계로 느껴지는 듯 하다.
<슬픈 예감>을 보면서 자꾸만 영화 <와니와 준하>가 떠올랐다. 촉촉한 여름의 풍경들, 남동생과의 떨리는 순간들, 여름날의 자전거. <슬픈 예감>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와니와 준하> 같은 영화였음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나의 스무살의 갈등들이 소설 속 야요이처럼 엄청난 비밀을 품고 시작되고 끝나지 않았지만, 여고시절, 사춘기를 겪으면서 한번씩 꿈꾸었을 법한 그런 이야기를 <슬픈 예감>은 따뜻하고 무심하게 그리고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처럼, 샤워 뒤 마시는 홍차의 향기처럼 아기자기하게 그리고 있다.
Fantastique 판타스틱 2007.6
판타스틱 편집부 엮음/페이퍼하우스(월간지)
지난 달에 장르문화잡지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판타스틱'.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서 창간호를 구입했는데 꽤 괜찮아서 이번달도 샀는데, 더 환상적이다. 기발한 상상력 속의 글과 그림들을 보며, 나는 왜 이런 생각들 못하는거야,라며 머리를 탁 내려쳤다. 내 머릿속에도 버튼 하나를 돌리면 작동되는 상상력의 나래, 따위라는 게 있지 않을까? 막 이러고 있다.
우선, 커트 보네거트 특집.
사실 커트 보네거트 소설을 한 편도 읽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꼭 읽은 느낌이다. 박찬욱 감독이 제5도살장을 좋아한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5권의 책이 번역되어있다는데, 차례차례 다 읽어버려야지.
그리고 박형서.
벌써 두 편의 단편집을 냈던데, 왜 난 아직까지 못 읽어봤는지. 또 한번 무릎을 딱 쳤다. 이번호에 실린 '냄새가 나요', '가족의 기원'은 정말 최고다. 짧지만 강한 여운. 무섭고도 슬프다. 내공이 굉장한거 같아. 단편집 빨리 찾아읽어야겠다.
그리고 단편만화, 로스트 앤 파운드.
산드라 맥도널드라는 판타지 소설가의 작품을 만화로 풀어 옮긴 단편인데, 정말 좋다. 무엇이든지 찾아주는 검색엔진이 등장하는데. 이 검색엔진은 이 집의 물건들은 물론이고, 언니의 진정한 사랑도 찾아주고, 천국의 위치까지 알려준다.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만화를 읽고 책을 덮고 눈을 감고 가만히 여운을 느꼈을 정도로. 원작이 번역되었으면 좋겠는데.
점점 판타스틱에 빠져들고 있다. 너무 빨리 없어져버릴까봐 아금아금, 아껴서 읽고 있다. 다음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해하면서.
김영하 지음/아트북스
중학교때 좋아하던 만화책이 있었습니다. 이은혜의 점프트리 에이플러스, 말도 안되는 로망들을 제게 안겨주었죠. 여중을 다니고 있던 제게 남녀공학의 로망을, 오빠가 없던 제게 다정하고 자상한 오빠에 대한 로망을, 짝사랑따위도 하고 있지 않았던 제게 두 멋진 남자선배의 동시다발적인 사랑을 받는 로망을. 새 단행본이 나오는 날이면 한걸음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와서는 제 방문을 살포시 잠그고, 가장 좋아하는 음악들을 녹음해놓은 테잎을 방 안 가득 틀어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장 한장 아껴 읽으면서 느꼈던 두근거림, 방 안 공기의 흐름, 흘러나오던 음악의 촉감. 무슨 음악이였는지, 무슨 장면때문인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의 제 방 풍경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김영하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받아들고서 약간 실망했습니다. 일단 너무 얇았고, 쭉 넘겨봤을 때 글은 짧고, 반 이상이 사진이였거든요. 일단 한 쪽 구석에 놓아두었어요. 금방 읽어버릴 것만 같아서. 언젠가 읽어야 될 '때'가 올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리고 오늘 읽었습니다. 책 뒤에 부록으로 있던 CD를 꺼내서 컴퓨터 CD롬에 넣고, 플레이를 시켰습니다. 음악이 좋았어요. 잔잔하고 뭉클한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첫장을 넘겨 여행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처음, 단편소설입니다. 밀회. 주인공의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나'와 '그녀'가 나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르는 '내'가 찍은 듯한 그 거리의, 그 도시의 풍경들이 찍혀진 사진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와 '그녀'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소설이 끝이 났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이 좋았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사진들입니다.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진들이요. 그 사진들을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뒤의 '내'가 본 하이델베르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쓸쓸하고 적막한 사진들이였어요.
그리고 사진들이 이어지고, 3편의 간단한 에세이가 이어집니다. 작가의 카메라에 관한, 하이델베르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 이 구절이 너무 멋져서 다이어리에 옮겨 두었습니다.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 있다는 것, 그런 달콤한 쓸쓸함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 p.148
그리고 책은 끝났습니다. 틀어준 CD속에는 14곡의 음악이 들어있었고, 책을 다 읽었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끝까지 CD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 방의 공기의 흐름, 그 위의 음악들, '나'의 슬픈 이야기, 도시의 쓸쓸한 사진들을 다시 한번 봅니다.
짧아서 아쉬웠지만 좋았어요. 다음 도쿄편도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