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 - 나의 뒷모습을 마주하는 일서재를쌓다 2008. 5. 7. 09:10
첫사랑
수필드림팀 지음/해드림출판사
첫사랑. 처음 표지를 보고선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라 생각했다. 뒷모습이라니. 덧니 하나가 박혀 커다란 미소를 터뜨리는 앞모습이여도 부족할 터인데 무얼 보고 있는지,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뒷모습과 첫사랑이라니. 그렇게 심드렁하게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장. 책을 덮고 ‘첫사랑’이란 제목과 나란히 앉은 표지의 뒷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뒷모습은 ‘사랑’이리라. ‘첫’은 빨간 색으로 칠해져 확실히 뒷모습 위에 위치하고 있다. ‘첫-’은 ‘풋-’이 그렇듯 다음 단어를 더 싱그럽고 아련하게 해 줄 빠알간 접미사일 뿐이다. 그러니 사랑과 나란히 앉은 두 볼이 발그레할 것이 분명할 ‘첫-’스런 뒷모습. 헝클어진 듯 자연스레 묶은 머리 위로 반짝이는 오전의 것이 분명할 햇살이 쏟아지는 이 한 소녀의 뒷모습을 마주하곤 그 날 그를 만난 일이 떠올랐다.사람이 많은 지하철 환승구역의 에스컬레이터였다. 내 열 걸음쯤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영락없이 십여 년 전 내가 사랑했던 그의 뒷모습이었다. 비쩍 큰 키에 마른 몸, 늘어난 갈색 스웨터에 통이 넓은 면바지, 어깨에 비스듬히 맨 크로스백.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헤어진 뒤 얼마간 애타게 바랬던 일. 그 시절 나는 우연히 길을 가다 그와 마주치게 되면 어떤 말을, 어떤 표정으로 건네야 그가 내게 미련이 남을까 매일 거울 앞에서 연습했었다. 그런 그가 내 앞에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마지막이 그랬듯 그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그러다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그가 아니었다. 그냥 갓 스물을 넘긴 그 시절 그를 닮은 대학교 신입생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날 그 스무 살의 신입생 곁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그동안 얼마나 아둔했나 깨달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그를 닮은 뒷모습에 가슴이 쿵쿵 무너진 적이 그 날 말고도 있었다. 내가 쫓았던 건 십여 년 전 그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흘렀고 그도 이제 스무 살 신입생의 모습이 아닐 터인데. 더군다나 최근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아놓고선. 그는 그 시절보다 살이 올랐고 품이 넓은 스웨터나 면바지는 더 이상 입지 않는 듯 여러 사진 속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돌아와 빠알간 첫사랑의 뒷모습. 이것을 처음 보곤 누군가가 사랑했던 ‘그녀’의 오래 전 뒷모습이란 생각을 고쳤다. 이건 오래 전 그를 사랑했던 ‘나’의 뒷모습이었다. 열아홉 편의 곱디고운 첫사랑이 담긴 수필들. 현재의 나를 담아 읽어가는 것이 최고의 독서법이라 생각하는 나는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는 열아홉 편의 수필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건 여리고 서툴러서 아름다웠던 오래 전 스스로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그 시절의 그이를 추억하는 것보다 그 시절 그이를 사랑했던 자신을 추억하는 아련하고도 그윽한 그리운 글귀라는 것을. 입 안 가득 따끈한 팥죽이 고이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나, 밑이 뻥 뚫린 자동차로 도로를 달리며 즐거워했던 나, 새벽녘 어두운 방 안에서 얼굴 위를 지나는 입술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나, 절름발이 흉내를 내며 찹쌀도넛을 꼭 전해주고 싶었던 나, 어떤 이의 눈에 코스모스와 꼭 닮아있었던 나를 추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 따스하다는 것을.
봄이 되어 오래 전 보았던 영화를 다시 꺼내 보았다. 4월 싱그러운 첫사랑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영화. 이야기는 소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소년을 드디어 만나면서 끝난다. 오래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시시한 결말이라 생각했던 나는 다시 보고는 가장 싱그러운 결말이라 생각했다. 우리들의 첫사랑이란 덜 여문 풋사과 같아서 시큼하고 때론 베어 물기 힘들 정도로 딱딱하지만 그만큼 상큼하다는 것. 잘 여문 사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싱그러운 향이 가득하다는 걸 안다.
열아홉 편의 봄바람 같은 첫사랑들을 마주하곤 왠지 내 ‘첫’사랑은 그저 열심히 사랑하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시시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겐 기차 안의 설렘도, 고무신을 신고 달려 가야했던 다급함도, 은방울 향 손수건의 추억 따위도 없었다고.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봄.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봄이 코앞에 있었다. 갑자기 도토리묵이 떠올랐다. 싱그러운 깻잎 향에 짭짤한 양념을 곁들여 오물오물 나눠 먹었던 안동 버스정류장 앞 허름한 식당. 밤새 그가 끙끙대며 꾹꾹 눌러썼다는 편지를 건네주었던 지하철 4호선. 떠오르기 시작하니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 첫사랑도 시시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리고 어김없이 그를 사랑한 봄빛같이 서툴지만 충분히 사랑스러웠던 뒷모습의 내가 있었다.
덧, 독후감 공모전이 있어 냈는데 '똑'하니 떨어졌다. 뭐든 응모할 때는 안 보이는데, 후에 읽으면 보인다. 글 속에 뭐가 없고 뭐만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