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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 라일라의 봄을 꿈꾸며서재를쌓다 2008. 5. 16. 12:14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현대문학
얼마 전 세계지도를 샀다. 뉴스에서 듣는 나라들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진 후로 커다란 세계지도를 하나 사서 벽에 붙여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빛깔이 예쁜, 저렴한 것으로 구입했다. 바다는 짙은 하늘빛, 대륙은 아이보리 빛깔이다. 진하게 새겨진 나라 이름 옆에 그 나라의 특산물이나 명소가 귀엽게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태평양의 한 가운데 돌고래 두 마리가 사이좋게 뛰어 놀고 있고, 북극의 그린란드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개 두 마리가 헉헉거리며 눈썰매를 끌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벽에 붙여놓은 지도를 미술관의 명화를 감상하듯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찌나 평화로운 곡선과 빛깔인지 이 지도 어딘가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어 나가며 지도에서 자주 아프카니스탄을 찾았다. 부끄럽지만 처음 아프카니스탄을 찾을 때 아프리카 대륙을 먼저 훑었다. 그렇게 뉴스에서 많이 들었던 이름이었거늘 단지 발음되는 그대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아프리카를 지나 중동을 지나 인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파키스탄과 이란 사이에서 아프카니스탄을 찾았다. 생각보다 작은 나라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니 아프카니스탄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 곳, 블루 모스크가 고요하게 그려져 있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은 소설을 읽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인 곳에서 태어나서일까. 사방에 다른 나라들로 꾹꾹 눌러진 아프카니스탄은 지도만 보고 있어도 숨이 막혔다.
엄지손가락에 눌러진 지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한 도시를 부르카를 입은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표지다. 나는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이 여인이 마리암이라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뒷모습을 하고 있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이 여인은 굳건하게 살아남은 라일라다. 그리고 그녀는 어두운 골목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새싹을 마주하고 있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희망의 물줄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비록 내가 보고 있는 건 그녀의 뒷모습이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눈만 내밀고 있지만 부르카 속에서 라일라는 자그맣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주 멀리까지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이 도시를,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이야기는 생소했다. 그 곳의 소식은 뉴스나 기사를 통해 짤막하게 듣는 것이 전부였으니 이렇게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아프카니스탄은 생소했다. 탈레반이나 무장 세력이니 이빨을 드러낸 채 쏟아져 나오는 그 곳의 뉴스 기사들 너머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황무지의 사막에서 총탄전만이 오고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이름도 있었다. 마리암, 라일라, 타리크. 나는 자주 이들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보았다. 총탄전이 오가는 건조한 골목 구석구석에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아주 예쁜 이름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2세대에 걸친 굴곡 많은 아프카니스탄의 현재를 담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명의 여인이 우뚝 솟아 있다. 마리암과 라일라. 하라미로 태어나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엄마를 잃은 열다섯의 마리암. 그녀는 늘 외로웠다.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어머니, 가끔씩 찾아와주어서 늘 그리웠던 아버지, 자신을 아끼던 선생님과도 이별하고 늙은 남편과 함께 카불에서 늙어갔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남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므로 학대당하고 무시당했다.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한 삶이었다. 몸에 마르지 않고 물들었던 시퍼런 피멍처럼 그녀가 발 디디고 있는 땅, 그녀의 나라도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이 땅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고 학대하고 짓밟았다. 약자는 강자에게 대항하고 기회를 노렸다. 그 틈에 자신의 뱃속을 채우려는 기름지고 탐욕스런 자들이 그들을 침범했다. 폭격이 만발하고 아프카니스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길을 가다, 아이를 돌보다, 밥을 먹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중 이런 꿈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는 무리해서 여행경비를 마련해 딸에게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바위를 깍아 만든 웅장한 석불 위를 오른 부녀는 바미안 계곡의 풍요로운 땅을 내려다보며 꿈꿨다. 눈을 감은 그의 앞에 따스한 파도가 넘실대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이 펼쳐졌다. 그의 꿈은 지극히 평범하고 작은 것이었다. 살아남은 그의 가족들이 행복해지는 것. 전쟁도 폭격도 없는 풍요롭고 따스한 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았던 것일까. 라일라는 희망에 가득 찬 아버지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코앞에서 보았다. 폭격에 맞은 아버지 바비의 몸은 공중에서 찢겨졌고, 그의 꿈도 처참하게 흩어졌다. 그는 라일라의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라일라도 마리암처럼 혼자가 되었다. 외롭고 고독했다. 쓸쓸하고 무서웠다. 그렇지만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라일라에게 희망을 실어주었다. 마리암에서 시작된 이 땅의 절망과 외로움이 이어져 내려오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라일라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게 해 주었고, 가슴 아픈 방법이었지만 마리암 남편의 두 번째 부인으로써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만나게 해 주었다. 마리암에겐 라일라의 희망을, 라일라에게 마리암의 믿음을. 그들은 이내 서로를 알아보았다. 이 땅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로의 희망이었다. 그녀가 내 어머니이자 내 딸이라는 걸. 마리암의 희생이 있었기에 라일라와 타리크, 그들의 아이들은 이 척박하게 붕괴된 메마른 땅에서 희망의 탑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라일라는 새로운 생명을 계속해서 잉태하고, 그들의 아이들이 마리암과 자신과 같은 절망 속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고운 씨를 뿌리고 땅을 일구고 물을 준다. 나는 결말이 이리 따스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긴 여정을 따라가며 종종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 봄이 왔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땅을 디디고 있는 이곳에는 봄이 만연했다. 모든 꽃들과 사물이 선명하고 따스했다. 개나리의 색깔이 이리 샛노랬나, 진달래의 빛깔이 이리 고왔나. 새삼스럽게 봄이 눈부셨다. 캘리포니아는 아니지만 어쩌면 라일라의 아버지, 바비가 꿈꾼 작은 소망이 이런 풍경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미안해졌다. 힘들게 살아나가고 있는 마리암과 라일라에게. 우리들만 이렇게 찬란하게 반짝이는 봄의 한 가운데서 평화롭게 그 기운을 즐겨도 괜찮은 건가. 그들의 봄을 상상해봤다. 그곳에도 갈라진 땅 틈 속에서 힘겹게 꽃들이 피어나겠지. 500페이지에 달하는 그들의 겨울을 읽어나가며 자주 책을 덮었다. 읽는 속도가 더디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도에 맞춰 읽어나가다간 철철 눈물이 쏟아져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아렸다. 시렸다. 이 책엔 쉼표가 너무 적다. 이 아픈 이야기에는 좀 더 많은 쉼표가 필요하다.
부르카, 이드, 타블라, 판즈시르, 카불, 헤라트. 익숙하지 않은 명칭과 지명들이 등장할 때면 메모지 한 귀퉁이에 생소한 단어들을 메모했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해서 이들에 대한 설명과 사진들을 찾아봤다. 부르카를 입은 어느 여인은 두껍고 검은 천으로 온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그녀가 드러낸 건 오직 짙은 두 눈뿐. 나는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깊고 슬퍼보였다. 부르카 너머 마리암과 라일라가 보였다. 이슬람의 축제라는 이드를 검색해 찾은 어떤 사진에는 새벽 기도를 올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눈을 감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있었다. 어떤 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기도하고 있었다. 타블라로 찾은 동영상에서는 투박한 겉모양과는 달리 청명하고 경쾌한 리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카불을 검색창에 입력했다. 전쟁으로 참혹해진 사진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끝이 없다. 이 중에 낯이 익은 한 장의 사진. 검은 실루엣의 상인이 오색찬란한 풍선 다발을 쥐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아, 이 사진. 카불에서 찍은 사진이었구나. 몇 년 전, 어느 세계적인 상을 받은 작품으로 본 사진이었다. 아름다웠던 사진. 사진 안에는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뿌옇다. 단지 하늘 위의 풍선만이 제 색깔을 내며 반짝이고 있다. 어찌나 고운지. 모니터에 손을 대고 그것을 만져보았다.
마지막 검색어는 바미안 석불. 라일라와 그녀의 아버지가 그 위에서 잠시나마 희망과 행복을 꿈꿨던 바미안 석불 사진을 보았다. 탈레반이 파괴하기 전의 아름다운 석불 사진도 있었다. 이 거대하고 웅장한 석불을 인류는 어떻게 만들어냈으며, 어째서 후손을 이 아름다운 걸 파괴하는 걸까. 석불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풍선을 매만졌듯 손을 뻗어 텅 빈 그곳을 매만져 보았다. 라일라의 꿈이 사라진 곳. 아버지의 희망이 흩어진 곳. 수많은 아프카니스탄의 행복이 순식간에 파괴된 이 곳. 어느 기사에서 2009년에 밤하늘을 배경으로 최첨단 레이저로 붕괴되기 전의 형상을 복원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하나,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일회적인 그것이. 어루만질 수 없는 그 것이. 텅 빈 석불의 자리에 햇살이 내리쬐는 사진을 가만히 보면서 내 마음 한 구석이 비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라일라의 아버지 바비에게서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를 보았다. 바비가 꿈꿨던 작은 행복.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이 땅을 벗어나 따뜻한 바닷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꿈을 지녔던 바비. 소설 속, 바비의 이 작은 꿈은 공중에서 찢겨졌지만, 실제로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살기 위해 공부했고, 의사가 되었고, 아프카니스탄을 담은 두 권의 소설을 집필했다. 결국 그 곳을 도망쳐 나온 그가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이야기를 쓸 자격이 되는 걸까, 그는 미국인이 아닌가, 따위의 반론들은 묻어두기로 했다. 누가 우리에게 짧고 간결한 뉴스가 아닌 길고 풍성한 서사를 담은 아프카니스탄을 들려주겠는가. 단지 테러국가로 알고 있었던 무지했던 내게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 곳을 열심히 살아 나가고 있는 여인들에 대해, 그들의 풍습과 관습에 대해, 이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 귀중한 소설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언젠가 다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임을 확신하는 땅. 수많은 마리암과 라일라, 타리크가 잘 견뎌주기를. 아지자와 잘마이, 그리고 곧 태어날 라일라와 타리크의 아이의 두 발이 디딜 이 땅에서 절망과 폭력이 하루 빨리 사라져주길. 그래서 언젠가 평화로운 이 땅을 찾게 되면 책 속에서 보았던 바미안 계곡이며 카불 거리에서 미소를 머금은 행복한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리암, 라일라, 살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무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