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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마지막날은 계획했던 대로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밥때가 되면 무언가를 시켜 먹고, 티비를 보다 그대로 잠들었다. (그러니 말할 것도 없이 살은 찌고 있다.) 2017년 첫날의 계획도 마지막 날과 동일했는데, 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던 이들 중에 막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옷을 입더니 나갔다. 어디를 가는지 물어봤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동생과 나는 이른 오후까지 계획을 무리없이 진행하다 이건 너무 하다 싶어 샤워는 하지 않고, 옷만 바꿔 입고 동네 커피집에 갔다. 창가 자리에 막내가 앉아 있었다. 커피집에서 2017년 첫 커피를 마셨고, 2017년 첫 영화를 보러 갔다.
뒹굴거리다가 본 출발 비디오 여행에 낚였다고 해야 할까. 역시 신카이 마코토는 넘쳤다. 좀더 담백하게 풀어냈으면 좋았을텐데. 초반에는 나도, 옆자리의 아저씨도 재밌어서 큰소리로 웃어댔는데 중반부터 반복되는 과함으로 몸과 입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움직였던 장면들도 있었다. 남자아이의 지인이 뭔가 변한 남자아이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 "분명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이 저 아이를 변하게 했어." 그리고 남자아이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한 사건에 이유없이 무한정 끌리고, 그리하여 그 사건에 대한 모든 기사를 찾아보고, 달려가게 되는 장면들. 결국 그 이유없음은 이유없음이 아니고 긴 끈으로 연결된 인연이었지만. 나도 살면서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무한정 끌리게 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잊어버린 어떤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어쩌면 그런 생각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2017년의 목표는 세세하게 세우지 않았다. 그저 규칙적으로 조금씩 해나가는 것. 그래서 좀더 나아지게 되는 것. 매일 조금씩 꾸준히 읽고, 듣고, 걷고, 쓰고, 아끼고, 공부하는 것.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 좋은 사람들을 계속 만나는 것.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을 천천히 여러 방식으로 알아보면서 결국엔 가 보는 것. 그곳에서도 욕심 부리지 않고 조금씩 보는 것. 그런 계획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조금 읽었고, 보았고, 걸었고, 썼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새해가 되었음 좋겠다.
생각보다 체코인의 생활이 풍요롭지 않은 것 같다. 숙소를 제외한 물가가 예상보다 훨씬 낮다. 나보다 나이가 약간 많아 보이는 한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서울에서 평소에 치르는 값의 반, 혹은 1/3을 치르고 먹고 마셨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 부자일지도 모르겠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순간 "왜 독일은 맥주가 싸느냐?"라는 내 질문에 대한 학과장의 대답이 떠올랐다. "맥줏값이 비싸지면,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요!" 노동자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땀의 가치가 다이아몬드보다 빛난다는 진실이 이 세상에도 통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프라하는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흔한 수사지만, 슬프도록 아름다운 도시다.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열여섯 번째 날이다.
- p. 85, 최민석 <베를린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