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잼을졸이다'에 해당되는 글 2건

  1. 문어카레 2 2017.11.25
  2. 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 4 2017.11.19

문어카레

from 모퉁이다방 2017. 11. 25. 00:40




   이번 주는 길고, 힘들었다. 많은 생각을 했는데, 무엇 하나 녹록치 않구나 생각했다. 관계란 뭘까. 이번 주의 결론은, 언제든 깨어지기 쉬운 것. 누군가의 노력이 있다면, 다시 이어붙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전만큼 튼튼해질 순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 지난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 그 사람, 그렇게 힘들었을텐데,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네, 하고.


   요즘 저녁을 가볍게 먹으려고 하고 있다. 맥주는 (무척 아쉽지만) 마시지 않은 지 몇 주 되었다. 신기하게 마시지 않게 되자, 별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언젠가 한 잔을 아주 찐-하고 맛나게 마실 그 날을 기다리며. 겨울이니, 병맥주를 사야지. 깊은 맛이 나는 진한 걸로. 유리컵을 씻어 냉장고에 넣어뒀다 꺼내야지. 삿포로 맥주박물관에서 사온 병따개로 병을 따서 꿀꺽꿀꺽 소리가 나게 잘 따라야지. 적당하게 거품을 만들어서, 안주 없이 천천히 음미해가며 마셔야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잘 마신 뒤, 역시 좋았어, 하고 뿌듯해 해야지. 이번 주 저녁 메뉴에 현미율무시리얼도 있었고, 우울해서 큰 맘 먹고 산 호주산 소고기 안심도 있었다. 그리고 이마트에서 파는 자숙문어도 있었다. 문어는 소금을 넣은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건강하게 먹는다고 쌈다시마를 곁들여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한번에 다 먹질 못해 냉장고에 남겨뒀는데, 다음날 카레를 만들 때 문어 생각이 났다. 한번 넣어볼까. 그렇게 시작된 냉장고 잔반 처리 카레. 결과는, 무려 인생카레. 3일동안 동생이랑 정말 맛있다고 감탄을 하며 잘 먹었다.


   그래서 힘든 평일을 잊고, 주말을 잘 보내기 위해 루시드 폴이 우정출연한 알쓸신잡을 다 보고, 재빨리 마감 전 이마트에 갔다. 자숙문어는 마감 직전이라 세일할 줄 알았는데, 정가 그대로 팔더라. 브로콜리도 사고, 방울토마토도 샀다. 카레는 백세카레. 저번 인생카레를 만들 때는 '약간 매운맛'을 샀는데, 좀 매운 감이 있어서 이번에는 '순한 맛'을 샀다. 마트 가기 전에 동생이랑 인생카레 맛을 떠올리며 회사 그만두고 카레집을 하자고 계획해봤다. 문어카레에 맥주도 팔자. 카레는 양을 한정해서 팔고, 맛있는 문구들이 그득한 책도 같이 팔자. 커피는 안 될 것 같아. 카레 냄새가 너무 심하잖아. 카레냄새가 책에 배지 않을까. 이딴 고민은 다 필요없었다. 마트가서 일부 재료만 샀는데, 팔기엔 엄청 비싼 재료들임을 깨달았다. 아, 이래서 맛있었던 거구나. 비싼 것들이 듬뿍 들어가서. 회사를 계속, 흑흑-


    만드는 방법은 일반 카레 만드는 것과 똑같다. 아, 친구가 좋은 버터를 많이 줘서 올리브유와 버터를 함께 넣고 볶은 건 평소랑 달랐다. 재료를 볶고, 물을 넣고, 카레가루를 푼다. 문어는 아무래도 오래 끓이면 질겨 질 것 같아 카레가루를 풀고 넣었다. 자글자글 카레의 형태가 될 때까지 끓여주면 완성. 그리고 모두 아시겠지만, 어제(만든)의 카레가 제일 맛나다. 카레는 시간이 더해지면 더 깊어지나보다. 재료는 양파, 브로콜리, 완두콩, 방울토마토, 자숙문어. 문어는 잘게 썰어서. 마지막에 우유 조금. 요거트를 넣어도 된다. 내일 만들어 먹으려고 브로콜리를 식초물에 담가뒀다. 아, 기대되는 주말 카레 되시겠다. 카레에게 다음 주를 버틸 용기를 달라고 하는 건 무리일까나.


-


   여름은 역시 카레입니다. 거기에 보태고 싶은 것은 카레우동!

   원래 카레우동은 메이지시대 도쿄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만, 오사카와 교토의 카레우동도 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토부청 앞 '야마비코'의 '스지 카레우동'은 최고의 보양식이다.

   "여름이면 일주일에 한 번은 나도 모르게 이쪽으로 발이 움직인다니까."

   "그 집 맛은 중독성이 있어." 교토의 친구들이 말한다. 흐르는 땀도 끈적거리는 여름 교토의 한낮에 '스지 카레우동'의 격렬한 한 방은 통쾌하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쫄깃한 우동이 튀어 오른다. 삶은 물은 버리고 다시 삶기를 여섯 번, 부드럽고 푹 고은 소의 힘줄이 녹아내린다. 파워풀한 매운맛, 뜨거움이 혀 위에서 기쁨의 춤을 춘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먹고 나면 샤워를 한 것 같다. 참고로 '야마비코'에는 여름 한정 '냉 스지 카레소면'도 있다. 그리고 카레우동 팬이라면 난젠지 근처 '히노데 우동'의 '달콤 카레우동'도 강력 추천하고 싶다. 푹푹 찌는 무더운 교토를 걸을 용기가 솟는다.

- 181-182쪽,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




   퇴근길에 깐밤을 만원 어치 샀다. 오천원 어치씩 포장이 되어 있어서 하나를 살까, 둘을 살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는 부족한 거 같아 두 개를 샀다. 집에 꿀도 있고, 우유도 있다. 며칠동안 생각한 밤잼을 만들어 보았다. 깐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한번 끓였다. 드문드문 붙어 있는 밤 껍질을 정리해 주고 으깼다. 살짝 식힌 뒤에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밤이 퍽퍽해서 잘 갈려지지 않더라. 그렇게 간 밤우유를 냄비에 다시 넣고 끓였다. 꿀을 듬뿍 넣었다. 오래 끓일수록 냄비 밖으로 밤꿀우유가 튀여서 뚜껑을 덮어 뒀다. 그러다 타지 않나 뚜껑을 살짝만 열고 주걱으로 바닥을 뒤적거려 줬다. 또 덮어 두고, 또 뒤적거려 줬다. 잼을 만드는 것은 이 일의 반복이구나 생각했다. 그 시간이 은근히 길어서 그 사이 책도 몇 페이지 읽고, 티비도 보고 그랬다. 티비를 보면 정신이 팔리니, 책을 읽으면서 잼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페이지 읽고, 뒤적거려 주고, 한 페이지 또 읽고, 뒤적거려 주고. 얼추 시중의 잼과 비슷한 농도로 걸쭉해졌을 때 불을 껐다. 집 안 가득 달달한 밤냄새가 가득해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줘야 했다. 한밤 중은 아니지만, 밤의 잼이 완성되었다. 요즘 빵을 줄이려고 하고 있어서, 다음 날 아침, 우유를 몽글몽글하게 데워 밤잼을 조금 넣어 마셔 보았다. 따뜻하고 적당히 달달한 것이, 배가 든든해졌다.


   밤잼을 만드려고 결심한 것은,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몇달 전 박찬일 쉐프의 강연회를 갔다.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강연회였다. 강연회는 생각보다 지루했는데, 그 강연회에서 얻은 건 박찬일 쉐프의 추천책 목록이었다. 박찬일 쉐프는 책 한 권 한 권 설명해주면서,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오래된 고전 소설을 말하면서도 재밌어요, 전공서 같은 느낌의 책을 추천하면서도 재밌어요. 그 재밌다는 말이 참 좋더라. 그래서 나도 '재미있게'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도 그 목록에 있었는데, 제목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사 놓고는 한동안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어느 날, 한번 읽어볼까 하고 책장에서 꺼냈는데, 왠걸 첫장을 읽자마자 너무 좋은 거다. 어떤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 보자. 그 음식에서 느껴지는 맛을 또 떠올려 보자. 그것을 글로 써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 음식의 맛을 표현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 분, 그러니까 히라마쓰 요코는 그걸 아주 잘 해낸다. 단번에 그 음식을 찾아가, 혹은 만들어 먹고 싶게 만든다. 음식과 그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다. 문장들이 좋다. 책을 읽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로 되돌아가 보니, 이런 소개가 있었다.


"유명 레스토랑 음식에 별점 매기는 일보다는 퇴근 후 서둘러 집에 돌아가 해 먹는 밥 한 끼의 매력, 도시 변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매일의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요리사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인정 넘치는 밥상을 손쉽게 차릴 수 있는 고유의 레시피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별거 아닌 식재료도 그녀의 미각과 손길을 거치면 마법처럼 생생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소개도. "그중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소설가 야마다 에이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제16회 분카무라 되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성 짙은 글쓰기는 탄탄한 독서 이력이 밑거름되었다. 독서에세이 <야만적인 독서>로 제28회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고."


   나는 이 책을 찬찬히 읽고, 그녀의 책 두 권을 더 주문했다.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몸이 힘들 때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다. <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를 읽으면, 우리가 무심하게 먹던 밥과 소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들을 마트에 가서 함부로 고르지 말아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계절에 맞는 제철음식을 고르고 골라 그 맛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어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이제 그만 사먹자는 생각도 든다.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과정들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는 그 시간들을 되찾고 싶어진다.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에 이런 맛들이 있다. 매일 사용해서 길들이는 옻그릇, 처음 술맛을 보고 바로 따라 버린 고등학교 시절, 여름의 맛 백도, 무엇보다 내가 어떤 밥을 짓고 싶은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한 솥밥, 초여름 6시 반에 짓는 새벽밥, 밤이 열리는 계절에 변함없이 전화를 걸어 주문하는 밤과자, 냄새를 맡으면 언제나 행복한 카레카레카레, 냉장고 안 여름 맥주,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 북소리와 함께 하는 한여름의 야키소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