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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대녕 소설, 대설주의보
    서재를쌓다 2013. 9. 25. 22:26

     

     

        추석 동안 나와 함께 한 책. 이번 추석에 이 책과 나의 궁합이 잘 맞았다. <눈의 여행자>를 읽고 눈이 내리는 소설이 좀더 보고 싶어서 읽은 책이다. 소설집인데, 표제작인 '대설주의보'에서 눈이 많이 내린다. 펑펑 내려서 대설주의보까지 내려지고, 강원도의 절에서 여자와 만나기로 했던 남자는 발이 묶인다. 인연이었던 남자와 여자가 긴 세월을 둘러 다시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소설집 중에서 이 소설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

     

        갤로퍼는 유턴을 한 다음 곧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윤수는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쓰고 주차장을 모로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산문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바람이 잦아들어 그다지 추운 느낌은 없었다. 길은 완만했으나 정강이까지 눈이 차올라 걸음이 더뎠다. 손전등을 빌려오지 않았더라면 사위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으리라. 윤수는 해란과 백담사로 처음 소풍 왔던 날을 아득히 떠올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새 12년 전의 일이었다.

       어디까지 왔을까.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에서 윤수는 발을 멈추고 캄캄한 눈 속을 노려보았다. 어디쯤일까. 멀리 솜뭉치 같은 부연 빛이 윤수의 눈에 빨려들어왔다. 벌써 백담사 가까이 온 것은 아닐 텐데. 실눈을 뜨고 재차 노려보니 그 빛은 이쪽을 향해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전조등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차가 다가올 때까지 윤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잔뜩 뒤집어쓴 알브이 차량이 체인을 쩔렁대며 그의 앞에 다가와 커다란 짐승처럼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젊은 스님이 타고 있었다.

       이어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해란이 차에서 내렸다.

    - 대설주의보, p.120-121

     

        저 문장으로 소설은 끝이다. 소설은 끝났지만, 해란과 윤수가 만나는 장면이 그려졌다. 두 사람이 눈 내리는 백담사로 들어서는 장면이 그려졌다. 오랫동안 끊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지. 이 소설집의 내용이라고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잊고 살다가, 또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술 마시고, 여행가고, 먹고, 또 마시고.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있을까 싶은 정도로 올드한 말투를 구사하고. 한때 윤대녕의 소설이 재미없어지던 때가 있었다. 어떤 소설을 읽은 후였는데, 어떤 소설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번 소설집도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재밌었다.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푹 빠져서 읽었다.

     

        아, 소설도 소설이지만 해설을 쓴 신형철의 문장도 근사하다. 바로 이 문장. "아름다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일. 시는 너무 짧고 장편소설은 너무 길다.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풍경은 회화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윤대녕이면 좋을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그 사람이 온다! 내게도 매년 이른 봄에 찾아가는 온천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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