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택에서 태어난 한 쌍둥이 자매가 있다. 이들의 엄마와 그녀의 오빠는 어려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장난들을 하며 낄낄거리며 즐거워 했다. 이를테면 오빠가 그녀의 팔목에 녹이 슨 철사로 스윽 그으면 그녀는 솟아나는 피를 보며 헤죽거리는 거다. 이 집안의 이상한 정신병의 기운은 되물림되고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오빠와 그녀에게로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쌍둥이 자매에게도. 쌍둥이 자매의 아버지도 확실하지 않다. 옆집에 살던 그녀와 로맨스를 즐긴 남자와 결혼은 하긴 했지만 다들 아이들의 아빠가 엄마의 오빠, 삼촌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어쨌든 쌍둥이 자매는 태어났고, 버려진 듯 먼지로 휩쌓인 대저택에서 아이들의 엄마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고 이들의 아버지일 지 모를 삼촌과 나이들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가정부와 무심한 정원사가 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삼촌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지 오래이고 이 집의 문제점을 직시한 동네의 한 의사가 이 집에 가정교사를 불러 들인다. 그녀는 단정하고 깔끔했으며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그녀가 온 뒤로 집안은 점차 깨끗해졌고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둥이 중 한 아이는 대체적으로 온순했지만, 한 아이는 다룰 수 없을 정도로 포악했다. 가정교사는 한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 아이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아보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떼어놓고 이 정상적이지 않은 두 아이들의 상태를 체크해 나가면 꽤 그럴듯한 하나의 연구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도, 친구도 없이 늘 둘 뿐이였던 정상적이지 않은 정신상태를 가진 두 아이를 떼어놓기로 결심했다. 두 아이를 위해서는 아니였다. 연구를 위해서. 의사를 설득시켜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학계에서 엄청난 실력자로 등극할 수 있을것이라는 바램때문에. 두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몰래 두 아이를 떼어놓고, 울며 불며 자학하며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감시했다. 날마다 연구결과랍시고 기록하면서. 늘 한 몸인 것처럼 함께였던 두 아이는 무서웠고, 서러웠고, 두려웠고, 슬펐다. 한 아이가 어느정도 상황을 체념해 나갈 사이, 한 아이는 더욱더 포악해졌다.
   그러다 어느날 가정교사는 유령을 본다. 분명 의사 집에 있어야 할 아이를 저택 앞에서 본 것이다. 그것도 두 아이는 함께 다정하게 놀고 있었다. 놀라 의사 집에 쫓아가서 의사에게 아이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다고 따졌으나 의사의 집에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의사는 아이가 오후 내내 집에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가정교사는 맥이 풀리고 이를 본 의사는 부축을 하다가 다짜고짜 키스를 한다. 그동안 연구랍시고 둘이 만나다가 눈이 맞았던 것이다. 이를 본 의사 부인은 가정교사를 내쫓고, 그날 오후 대저택의 정원사는 쌍둥이 중 한 아이를 집에 데려간다. 가정교사는 그 날 이후 인사도 없이 사라졌고 연구도 끝났고 어리고 여리고 성숙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의 골만 남겼다.
   어릴 때의 상처들이 성인이 되어서 얼마나 커다란 심리적으로 장애가 되는지 심리학 관련 서적에서 접했다. 나는 이 쌍둥이 아이들이 너무 불쌍했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랐으면서, 이기적인 어른들의 말도 안되는 연구따위로 가장 나쁜 이별의 케이스를 맛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말도 없이 영영 떠날 수 있는 경험, 그리고 이 커다란 세상에 단 한 사람, 나 혼자뿐이라는 철저한 외로움 끝의 두려움.

   얼마 전에 읽은 <열세번째 이야기>의 내용이다. 이 책을 읽을 때 가정교사와 의사의 말도 안되는 욕심으로 시작된 연구로 인해 하루 아침에 생이별을 한 아이들이 안타깝고, 그 후에도 자라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될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이별에 아이들이 어리석은 어른들 욕심에 일어난 이 말도 안되는 이별로 얼마나 큰 심적 고통과 마주하게 될지 마치 소설이 현실 속 이야기인 것처럼 내 마음이 아팠다. 괜히 어른이 내가 미안했고.

   그리고 오늘 본 기사. 물론 이 이야기와 백퍼센트 똑같은 건 아니지만 닮은 구석이 많아서. 이들은 자신이 쌍둥이인 것도 몰랐고, 함께 지내다 헤어진 것도 아니지만, 결국 욕심 많은 사람들이 시작한 어리석은 연구때문에 자매는 헤어졌다. 허영심에 가득 찬 의사는 너희들은 버려진 거고 어차피 각각 입양되어 갈 것이였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어른이면 어른다워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이면 사람다워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상대방에 겪게되는 아픔따위는 상관없이 위대한 연구결과로 상 받고 인정받으면 되는건가. 너무 마음에 안 든다.

   그냥 기사 보고 책 생각이 나서 끄적거려봤다. 뭐랄까. 뉴스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영화같은 현실이라는 표현보다는 현실같은 영화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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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김연수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다녀왔다. 작가님 책을 조금밖에 읽지 못한 주제에 초대 신청을 하고 정말로, 꼭, 반드시 초대되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었는데, 당첨됐다는 메일이 왔다. 얼마나 좋았는지. 월요일이라 공연이 없는 연우 소극장에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삐그덕 소리가 많이 나서 불편하긴 했지만 작가와 연극무대라니 왠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연수 작가님은 무대 중앙에 앉으셔서 강연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한다면서 책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으면 한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이번 책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제목에 관련된 이야기, 독일 대사관에서 자신을 독일로 보낸 이야기, 그 곳에 관한 느낌들, 생각들, 그래서 쓰게 된 이번 책에 관해서. 예전에 여성지에서 일하던 시절 이야기, 그리고 출판 저널에서 일하면서 소설을 썼던 경험에 대해 마치 친한 사람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떨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어제의 이야기들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 소설 쓰기에 관한.

   한번은 한 2시쯤 됐는데 무진장 무섭더라구요. 갑자기요. 지금은 제가 그런 생각 잘 안 하는데 소복을 입은 여자가 저희 아파트가 25층인데 창을 보고 있는데 그 창에 고개만 딱 (웃음) 느낌이죠. 그런 느낌이. 무섭더라구요. 혼자 있으니까. 다 자고 있는데. 겁이 딱 나는데 그때 제가 겁이 단숨에 없어진 게 뭐냐면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 (웃음) 힘들어 죽겠다. 소설 쓰는 거.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 (웃음) 그때 따닥따닥 하는 소리가 나잖아요. 키보드에서. 쓰면 타닥타닥 소리나고 안 쓰면 조용하고 쓰면 소리나고. (웃음) 창이 하나 이렇게 있고 타닥타닥 소리가 날 때 어떤 느낌이냐면 비행기 몰고 밤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은. 제가 조종을 하고 있고. 뭐랄까. 아주 행복한 순간의 느낌인데. 그 느낌은 잊을 수가 없어요. 가끔씩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는데 주로 음악을 들을 때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음악을 좋아하니까. 예전에 좋아하는 소설 중에 생텍지페리의 <야간비행>에서 남자주인공이 밤하늘을 계속 날라 다녀요. 그 사람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외롭게 혼자 비행을 하는데 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제가 들었던 음악이 'Are you going with me?'이라는 연주음악이 그 느낌과 비슷하거든요. 그 상태의 그런 어떤 느낌이 오더라구요.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때의 이렇게 밤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정말 자유롭구나, 하는 느낌이. 그때 어떤 생각을 했냐면은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계속 해보고 싶다. 평생할 수 있으면 제일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면 내가 취직을 해서라도 계속 밤마다 이렇게 써보고 싶다. 하다못해 다른 일을 해서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일은 계속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어요.
 

 
  타닥타닥. 이 소리의 감촉이 너무 좋다. 타자기의 자판을 누를 때 나는 타닥타닥. 키보드의 자판을 누를 때 나는 타닥타닥. 특히 노트북 자판의 타닥타닥 소리. 이 소리의 감촉 속에 이야기가 있고 나를 위로해줄 글자들이 묻어 있다. 그래서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작가로 나오는 영화가 있으면 거의 다 본다. 영화 속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영화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용서가 된다. 작가님의 입 속에서 발음되어지는 타닥타닥 소리도 참 좋았다.

   요즘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변했어요' 라는 인터뷰 기사를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도 김연수 작가님이 예전에는 자신의 소설을 독자들이 보지 않아도, 어려운 단어들이 너무 많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고. 지금은 소설이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예전에는 소설이란 원본, 진리를 찾는 것이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10년이 지나니 그 원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고. 소통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를 더 만들어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들이 좋았다. 나는 왜 이런 말들이 좋을걸까 생각해 봤다. 그 사람의 성향 자체는 크게 변화할리 없고, 그 뼈대 자체가 변하는 것을 원치도 않지만. 나는 그게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과 내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인 것같다. 내가 이 사람과 같은 하늘 안에 동시대를 살아가며 내가 들이 마쉰 공기가 그가 내쉰 공기이기도 하고, 그가 들이 마쉰 공기가 내가 내쉰 공기이기도 하다는 것. 내가 나이가 들면서 생각들이 변해가듯이 그도 변해가고. 그러므로 내 생각들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어제 작가와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아, 그리고 질의 응답 시간에 고3 담임인 선생님이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제자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한 말씀 부탁드린다고 하셨는데 작가님이 '열망은 백전백패예요'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에 내 마음 속 어딘가가 철퍼덕 무너져 버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자신의 이십대는 열망 그 자체였고, 백전백패였다고. 하지만 열망때문에 백전백패를 견뎌낼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질의 응답 시간까지 끝내고 사인을 받았다. 작가님은 내 이름을 쓰고, 2007년 가을에 김연수, 라고 사각사각 펜소리를 내며 사인해 주셨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모를 날씨 속에 둘러쌓여있던 10월이었는데 작가님의 곱디고운 글씨로 아직도, 여전히 가을이라는 것을 또렷하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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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이야기
-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비채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이래요. 헌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도우는 주인공이 있어요. 마가렛 리. 마가렛은 책방을 도우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미 죽은 인물들의 전기를 써요. 어느날 비다 윈터라는 베스트셀러 작가로부터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는 편지를 받아요. 마가렛은 살아있는 작가의 전기를 써보지도, 쓰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비다 윈터라는 작가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이 작가의 사생활에 관련해서 철저히 베일에 쌓여있어 거절을 하기로 마음을 먹어요. 그런 마가렛이 그녀의 전기를 쓰기로 한 건 순전히 쌍둥이 이야기 때문이예요. 마가렛에게는 허리즈음에서 잃어버린 쌍둥이 자매가 있었거든요.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마가렛에게는 영원히 존재하는. 흐릿한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창가로 나타나는 나랑 꼭 닮은 사람. 비다 윈터는 그렇게 마가렛의 흥미를 끌었고, 이제부터 비타 윈터의 이야기가 시작되요. 쌍둥이를 지독하게 사랑한 사람. 버림 받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요. '열 세번째 이야기'는 비타 윈터가 어떤 책에 싣지 않은 이야기예요. 끊임없이 책으로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해왔지만 정작 이야기하지 않은 열 세번째 이야기. 이 책의 정식 제목은 <변형과 절망의 이야기>였지만 처음에 <열세번째 이야기>로 출간되었고 이내 모두 회수되었어요. 그 중 회수되지 않은 한 권의 책을 마가렛의 아버지가 구입했었구요. 실제 그 책에는 열두번째 이야기까지만 들어있고 열세번째 이야기는 없었어요. 모두가 열세번째 이야기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열세번째 이야기. 그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들어있어요.
 
    모두들 진실을 원한다고 하지만 과연 정말로 진실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실은 어쩌면 생각보다 시시할 수도 있어요. 어느 정도 베일에 쌓여져 있는 진실은 정말 그럴 듯해 보이죠. 어떤 로맨틱한 추측도 가능하고, 어떤 추악한 상상도 가능하잖아요. 정작 진실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나면 사람들은 진실이 그렇게 시시할 수는 없다고 실망할 지도 몰라요. 진실은 별 게 없지만,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꽤 멋지잖아요. 근사하고.

   이 책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예요. 작가 소개에 보면 다이안 세퍼필드가 어릴 때부터 굉장히 많은 책을 탐독해왔다고 해요. 그런 작가의 느낌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어요. 책의 이야기에 빠져 지냈던 어린 시절의 느낌, 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책 속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사랑하는 느낌이요. 그런데 이건 또 저의 상상일 지도 몰라요. 진실은 알 수 없잖아요. 책 속에서 작가는 이런 구절로 경고를 해요.

(p.70)

   그리고 500페이지가 넘는 이 긴 책을 시작하는 시점에 작가는 이렇게 말해요. 이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많은 매체들을 보기에 앞서 우리들이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며, 특히 이 책을 볼 때 꼭 지켜달라는 부탁같은 것인거 같은 구절이예요. 

   (p.77)

    책은 두껍지만 술술 넘어가요. 그리고 반전이 있어요. 그러니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도, 질문을 해서도, 마지막 장을 훔쳐보아서도 안돼요. 얼마나 남았는지 분량을 체크할 수 있는 끝이 보이는 이야기니까 한자 한자 천천히 읽어나가면 되요. 이 책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고 그것이 이야기를 위한 진실인지, 진실을 위한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어쩌면 굉장히 시시하고 뻔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이 이야기 하는 건 이것인 거 같애요. 이야기를 즐겨라. 이야기를 읽는 순간을 즐겨라. 진실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 뭐가 진실인지 거짓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는지 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우리가 원하는 건 진실보다 그 겉에 묻어 있는 희망을 주는, 달달한 거짓말일지도 모르니까요. 중요한 건 그녀의 열세번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열세번째 이야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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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


   김애란을 읽었다. 첫번째 단편집의 첫번째 단편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그녀와 나는, 작가인 그녀와 독자인 나는, 우리는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매일 가는 편의점 직원이 나를 모조리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하숙방도 자취방도 아닌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소통되지 않는 '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있다는 것에 놀라웠고,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동질감을 느끼고 서울 땅 아래서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였음에 위로받고, 그녀가 예민하고 예리하고 사람의 마음을 뭔가로 쿡쿡 찌르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애란을 만났다. 내가 만난 김애란은 내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 인터뷰에 표현되어 있기를 그녀는 굉장히 조용하고 하나의 질문에도 여러번을 곱씹어 생각하는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 한자 한자, 또박또박, 실수하는 말 따위는 내뱉지 않겠다는 듯 느릿느릿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이렇게 그대로 씌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나의 느낌은 그랬다. 인터뷰 사진 속  그녀의 머리는 쭈빗쭈빗 뻗쳐있었고. 나는 왠지 그녀가 조금은 시니컬하고 까다로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홍대의 한 카페, 낭독의 밤에서 만난 그녀는 부드러웠다. 따뜻했다. 머리도 그 때보다 길어졌고 차분하고 빛났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낮고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 나를 닮은 듯,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은 듯,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낯익은 목소리. 그리고 여러번 준비를 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라는 것이 준비한다고 그대로 내뱉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도 않지만, 그녀는 따뜻하고 깊은 말들을 사람들에게 건네고, 손가락이 떨고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말들은 굉장히 유머러스했다. 나는 자신의 글로 인해 위로 받는다는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는 그녀의 말에 반했다. 소설가의 상상력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반했다. 커트 보네커트의 그래프에 반했다는 그녀의 말에 반했다. 이쁜 글씨는 아니었지만 정성스럽게 싸인을 해주며 눈을 맞춰주는 그녀의 따뜻함에 반했다. 그리고 점점 그녀와 나는, 서울 아래서 살아나가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그녀가 글을 쓰고, 나는 그 글을 읽을 뿐인 사이지만 참 많이 닮은 시간들을 견뎌왔고, 살아나가고 있으며, 그려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애란을 읽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첫번째 소설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동질감에 따스함이 더해졌다. 이렇게 따스한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따스한 글을 쓰는구나. 언제 어디서 이런 생각을 할까, 메모는 어떤 식으로 할까, 작업실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언니와 오빠라는 관계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그녀는 막내인 것도 같고,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을 것 같고, 어머니가 음식을 자주 만드셨을 거 같고, 몇 년동안 짝사랑한 선배가 있었을 것 같은 그런 무모하고 무례하고 의미 없는 상상들을 이어나간다. 그녀가 쓴 표현들이 좋아 그대로 따라해기도 한다. 마트에 가서 변기 청정제를 사서 변기 안의 파란 물을 깨끗하게 바라보고, 버리지 못한 델몬트 쥬스 병을 소독해 보리차를 끓이기도 한다. 샤워를 하면서 내가 뜨거운 물로 몸을 씻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거품을 잔뜩 만들어 샤워를 한다.

   나는 김애란에게 반했다.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의 글에 반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위로받았고, 또 위로받아갈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다음 장편에도, 다음 단편에도 나의 이야기가, 그녀의 이야기가 들어있을 거고 나는 그녀에게 고마워할 거다. 그냥 스쳐지나갈 뻔했던 기억들을, 감정들을 붙잡아 주어서 고맙다고. 좋아하는 잡지에서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에 대한 감상평에 그녀의 이름이 박혀있는 것이 고맙고, 그렇게 또 하나의 짧은 그녀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고맙고. 그녀가 나와 동갑이라서 고맙고. 아, 나는 그녀에게 고마운 거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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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 간 코미디언
김연수 외 지음/중앙북스


   일단 저는 황순원 문학상 작품집 표지와 전체적인 책의 촉감이 좋아요. 전체적으로 은은한 파스텔톤이고, 작가 한 명 한 명의 캐리커쳐가 있어요. 직접 그려넣은 선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가들의 표정은 인자해 보이기도 하고, 무덤덤해 보이기도 하고, 또 새초롬해보이기도 해요. 표지는 까칠까칠하고 울퉁불퉁한 종이의 촉감으로 살아있고 내지도 가벼운 재질이라서 가방 안에 넣고 다녀도 무겁지가 않아요. 김훈 작가가 수상했던 지난해랑 비교해보면 파스텔톤의 전체적인 표지 색깔만 살짝 달라졌어요. 마음에 듭니다.


김연수 | 달로 간 코미디언
을 읽고 싶어서 구입했어요. 동생이 김연수를 좋아하는데 저는 사실 그의 작품을 산문 몇 개밖에 보질 못했거든요. 산문 몇 개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굉장히 감수성이 짙고 지적이고 예민하고 섬세했어요. 소설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 상을 탔다는 소식을 듣고 출간되자마자 구입했어요. 어려운 면이 없진 않았지만, 김연수 작가의 분위기를 알거 같애요. 눈물이 날똥말똥 촉촉하게 젖고, 머리까지도 촉촉하게 젖은 상태로 그의 글을 읽게 되는 것 같애요. 이번 장편도 구입했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권여선 | 반죽의 형상
은 권여선 단편집에서 먼저 만났던 단편이예요.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제일 좋았던 단편이였는데. 일부러 다시 읽지 않았어요. 읽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요. 좀 더 시간이 지나면 한번 더 읽어봐야겠어요. 이 단편을 읽으면서 대학시절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내가 타고 다녔던 세 자리 버스, 그리고 내 친구들. 그때는 어리고 질투도 많았고 서울 생활도 서툴렀었고 늘 가는 길이 새로운 길이었거든요. 그런 자유롭고 초조하고 긴장되던 그 시절들이 많이 생각났던 글이였어요.

칼자국 | 김애란
을 읽으면서 아, 김애란이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탄성을 질러요. 동갑내기라서 그럴까요? 김애란의 소설은 늘 저를 떠올리게 하고 제 주위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요. 저번 낭독의 밤에서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했는데, 읽으면서 자꾸만 눈가가 촉촉해졌어요. 내가 생각이 나고, 우리 엄마도 생각이 나고. 그 때 누군가가 인천에서 자라 서울로 올라왔는데 자신은 서울에서는 늘 주변인인 것 같다면서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고 고맙다고 말한 독자가 있었는데 저도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정말. <침이 고인다> 바로 읽을 거예요.

박민규 | 깊
는 정말 좋았어요. 글 속에서처럼 제가 심해 속을 우주 위를 둥둥 유영하는 것만 같았어요. 아무도 소리내어 말을 하지 않는 그 깊고 먼 곳에서 둥둥 빛도 없고 머리도 없이 마음만 가지고 잠수도 하지 못하는 제가 오랜시간 잠수를 하는듯한 느낌. 적어두고 싶은 글귀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삼미..>를 읽고 단편 한 두개만 읽었는데, 못 읽은 박민규 소설을 다 찾아서 읽어야겠어요.

백가흠 | 루시의 연인
은 뭐랄까 그냥 조금 불편했어요. 주인공의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인간이 아닌 물건이여서 그런지, 그게 나 같아서 그런지,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어요. 단편이 끝나는 곳에 찍혀져 있던 빡빡 문질러 지워야 하는, 거실에 찍혀진 두 개의 목발 자국처럼요.
 
성석제 | 여행
은 그 부분이요. 생난리를 치루면서 사이는 틀어질대로 틀어지고 몸은 지칠대로 지쳐버린 세 친구가 여행길에 만난 부유한 도련님들이 제공해준 진수성찬을 먹기 시작하는 그 부분이요. 파, 터뜨리면서 한참을 웃었어요. 눈 앞에 그 광경이 딱 펼쳐지는 거예요. 매일 물에 밥 말아 먹으면서 죽도록 걸어대던 세 사람이 고기와 술을 마구마구 몸 안으로 집어 넣는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서. 이게 성석제의 매력인 거 같애요.  
     
윤성희 | 이어달리기
도 역시 유쾌했어요. 자꾸만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져 나왔어요. 엄마와 세 딸의 대화들이, 엉뚱한 상황들도 그렇고 유쾌하고 명랑해서요. 저도 이제 우울해질 때면 제가 아는 사람 스무명을 등장시켜서 운동회가 벌어지고 있는 운동회 한 가운데서 줄다리기를 하는 상상을 해 보려구요. 저는 심판 보구요. 금방 즐거워질 거 같애요.

은희경 | 고독의 발견
은 오랜만이예요. 은희경. 마지막이 인상적이였어요. 모호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결말. 결국 모든 건 레스토랑 안에서 한 상상이였다는 거 맞나요? K도 외롭고, S도 외롭고, 난쟁이 여자도 외롭고, 가난한 기타맨도 외로운. 모두가 외롭다는 고독의 발견, 맞나요?

이혜경 | 한갓되이 풀잎만
은 흘러내보내는 우리들의 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어줬어요. 그냥 내가 공기 중에 뱉어내어 어느 공기쯤에선가 사라져버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이 어느 녹음기에선가 멈춰서 영원히 저장되어지는 소리. 그렇지만 소리의 주체는 그걸 모르고. 얼마나 많은 나의 소리들은 사라져버리거나 저장되었을까요. 예전에 아주 어릴 때 비디오테이프 속의 저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속의 나는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같지가 않아서, 몇번을 돌려보면서 내가 저런 행동을 했었나 곰곰이 생각해 봤던 적이 있어요. 단편의 마지막 구절이 좋았어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전경태 | 남방식물
로 몽골을 생각해 봅니다. 한번도 가지 않았지만, 글 속에서 느껴지는 공기, 그 공기를 양분삼아 키워나는 고구마 순, 가정을 버린 남자, 자신을 버린 북한의 여자. 이 곳과 별반 다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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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이번주에 추천된 두 권의 책.
'육체와 영혼의 병'이라는 주제로 소개된 <빌리 밀리건>과 <푸른 알약>.

다니엘 키스의 <빌리 밀리건>
 
이 책은 예전에 어디서 소개된 거 보고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도서신청까지 해 놓고
책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아직 대출을 못했다.
오늘가서 대출해야겠다.
얇은 책인줄 알았는데 600페이지 가량의 두꺼운 책이란다.

빌리 밀리건이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화한 것인데
다중인격장애로 24개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다.
강간과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그 당시 자신이 정말 그런 끔찍한 일을 한 거냐며
전혀 모르는 일처럼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내면에는 24명의 인격이 있는데, 모두들 이름도 있고 성격도 다르단다.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면 이런 다중인격장애가 발생하기 쉽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성폭행을 당하거나 폭행적인 죽음을 목격하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하는.
그때의 어린 자아는 끔찍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것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또 다른 자아를 한 명 만들어서 그 일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는 거다.
'해리장애'라고 하는데 보통 4-6명의 자아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현재 연구된 바로는 26명의 자아를 가진 사람이 최대라고 한다.

이 책을 소개받고 패널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다중인격장애를 단지 정신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린시절의 충격으로 이것을 자신의 일로 믿지 않으려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평생을 치유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게.

우리 모두도 늘 똑같은 모습으로 살지는 않는다.
A를 대할 때의 나와 B를 대할 때의 내가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런데 정상인과 해리장애를 겪는 사람의 차이는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란다.
A를 대할 때 했던 내 행동을 B를 대할 때 기억을 아예 못한단다.

꼭 읽어봐야지.

패널 중 이 말이 정말 마음이 아팠다.
다중인격에 대해 좀더 깊이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푸른 알약>

두번째 추천책은 만화책.
작가 자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엮어진 이야기란다.
실제 만화가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아니 HIV 바이러스 보균자인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
고맙습니다나 너는 내 운명처럼 눈물을 쏙 빼놓는 감동스토리라기 보다는
HIV 바이러스 보균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고.

실제로 에이즈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많지 않나.
그래서 에이즈라는 말만 들어도 손가락 하나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실제로 에이즈가 전염될 확률은
이 방을 나가 길 거리에서 하얀 코뿔소를 만날 확률이라는 표현이나
조심해서 섹스를 했는데 갑자기 콘돔이 터져버려 남자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 밤,
이런 현실적인 고민들이 이 만화의 장점인 듯 하다.

한 패널이 금방 읽어서 두 번이나 봤다고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는데
다른 패널들이 이 만화책은 빨리 읽기보다 대사 하나, 장면 하나 음미해가면서 읽어야 그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왠지 <헤이, 웨잇>이랑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그리고 한 패널이 이야기하면서 언급된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무튼 점점 푹 빠져들게 만드는 TV, 책을 말하다.
매주 닥본사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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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님께.

   대학교 3학년때였던 거 같아요. 국문과에서 신경숙 작가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벽보를 보고는 그 날을 기억해뒀다가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죠. 그 날은 친구들이 모두 다 약속이 있어서 혼자 우두커니 국문과 학생들로 꽉 찬 강의실에 앉아 있는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작가님이 도착하시질 않으셨어요. 과대표가 지금 오시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서도 한참이였죠. 그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면 그 강의실에 있던 백여명의 학생들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어요. 그리고 작가님이 허겁지겁 들어오셨죠.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며 연거푸 사과를 하셨죠. 제게 휴대폰이 하나 있는데, 그 휴대폰을 거의 안 써요. 받지를 않고 걸때만 가끔씩 쓰는데, 로 시작하는 말씀이었던 거 같아요. 건망증이 너무 심하다고 하시면서 다이어리에 오늘 약속을 꾹꾹 눌러 써 놓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 앞에 온 손님과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원래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를 않는데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오늘은 받았다고. 그리고 아차, 싶었다고. 그 걸음에 달려와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씀하셨어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해요. 강연회치고는 좀 특이했잖아요. 그 날 아끼고 아끼는 <깊은 슬픔>을 들고가서 제일 앞 장에 사인을 받았죠. 너무나 좋았어요. 좋아하는 책에 좋아하는 작가님이 직접 새겨준 내 이름이 담긴 사인이라니.

   작가님의 책을 처음 본 건 대학교 1학년때였어요. 작가님의 책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를 대학 들어와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었죠. <깊은 슬픔>말이예요. 그 친구는 <깊은 슬픔>을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책을 그냥 덮어버릴 수가 없어서 수업시간에 책상 밑으로 펴놓고 야금야금 읽어나갔다고 했어요. 그리고 며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지냈다고 했어요. 사실 그 친구가 그 때 <깊은 슬픔>의 은서를 닮았던 거 같아요. 여렸고, 언제든 부서져버릴 것같은 감정을 언뜻언뜻 보였거든요. 그 때 나는 그 친구가 어느샌가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아서 항상 불안했던 거 같아요.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도,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도 그 친구가 '나, 갈래.'라면서 일어나 저만치 가버리고는 다시는 안 와 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런 감정들이 너무 두려웠던 스무 살이었어요.

   그리고 <깊은 슬픔>을 읽고 아득했지요. 좋은 구절들을 다이어리에 고대로 베껴쓰면서 나는 은서가 부러웠어요. 그 나이에는 응당 그러잖아요. 여리고 여린 은서를 닮고 싶었죠. 그녀에게 완과 세가 있는 게 질투가 났죠. 왜 세를 사랑하지 않고 완을 사랑하는지, 세를 사랑한 뒤엔 왜 세가 그녀를 보질 않는지 알 수 없고 아득한 마음뿐이었어요. 나는 친구의 고등학교 시절, 그 때처럼 아득해지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며칠을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라니. 그 친구와 똑같은 감정의 깊이를 가지고 싶었어요. <깊은 슬픔>을 읽고 나서 말이예요.

   그런데 제가 정말 작가님의 글을 읽고 아득해졌던 건 <외딴방>을 읽고 난 후였어요. <깊은 슬픔>을 읽고 작가님의 글들을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는데, <외딴방>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저렸어요. 아팠고 아득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욱신거려서 자꾸만 책장을 덮었죠. 덮었다 펴서 읽고, 또 덮었다 펴서 읽었어요. 그리고 며칠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요. 자꾸만 책 속의 글귀들이 생각이 났어요. 구더기가 바글거렸던 언니가 골방에서 죽었던 것, 옥상에서의 놀이. 좋은 구절들이 정말 많았지만, 한 문장도 다이어리에 베껴 적을 수 없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이올렛>을 읽었어요. 사실 <바이올렛>은 끝까지 읽지를 못했어요. 아직까지도. 책을 서점에서 샀었는데, 그 책을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기도 버거웠어요. 자꾸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글들을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스무살 때보다 좀 더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다 읽지 못한 책은 아는 언니에게 선물을 했어요. 빌려줬었던 건지, 선물을 한건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은데 책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니 선물을 한 거 였던 거 같아요. <바이올렛>을 다 읽지 못하면서 나는 이제 한동안 작가님의 책을 읽지 않겠다 다짐했어요. <깊은 슬픔>을 닮은 제 친구도 작가님의 글들이 이제 마음을 버겁게 한다고 했어요. 아, 그 친구는 이제 <깊은 슬픔>의 은서를 닮지 않았어요. 그 친구와 나는 둘이서 무슨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작가의 책을 찾아서 읽지 않게 되었어요. 물론 작가님이 그 뒤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지 않으신 이유도 있지만요. 아, 그 친구가 <바이올렛>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그리고 <리진>이군요. 작가님의 말씀대로 저도 작가님과 역사소설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리진>을 읽게 된다면 출간되고 아주 오랜 후일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매번 도서관에서 대출 중이던 책이 어쩌다 제 손 안에 들어왔어요. 꽤 많은 사람의 손을 타 벌써 손때가 많이 묻은 책 <리진>을 그렇게 읽게 되었어요. 두권을 단숨에 읽어내려갔어요. 그리고 친구가 <깊은 슬픔>을 읽었던 그 때처럼, 제가 <외딴방>을 읽었던 그 때처럼, 저는 또 아득해져버렸어요.

   책을 읽기 전에 KBS에서 해준 역사스페셜 형식의 리진 편을 본 적이 있어요. 재연을 한 리진역의 배우가 파리에서 외국인들에 둘러싸여 시선을 떨어뜨린 채 쓸쓸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왕의 여자가 프랑스 외교관과 함께 파리로 떠났지만, 그 프랑스 외교관의 남아있는 여러 기록들 중에서 조선의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나 그에 관련된 기록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수집한 조선과 동양의 물건들이 조그만 박물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영상들을 보았지요.

   작가노트에 작가님이 그렇게 쓰셨죠? 작가님이 하신 건 리진을 아기나인의 신분으로 궁궐에 들여보낸 것까지만인 것 같다고. 그 뒤로 리진은 제 스스로 소설 속의 리진으로 움직였다고. 저도요. 저도 그랬어요. 리진이 어릴 때 궁궐을 들락날락한 뒤로 책을 읽고 있는 제 옆에 가만히 앉아서 함께 이 책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여쁘고 가련한 여인이 옆에서 불어를 노래하기도 하고, 팔을 곱게 뻗어 춤을 추는 동작을 하기도 하고, 어느 구절에서는 책을 읽고 있는 저를 빤히 들여다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파리에서의 리진은 가만히 제 옆에 앉아 티비의 재연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시선을 떨어뜨린 채 쓸쓸한 얼굴로 저를 보아주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요.

   제 마음이 아득해진 건 주로 왕비와 함께 있는 리진을 볼 때였어요. 콜랭과의 사랑이 끝났을 때보다 왕비의 고립무원 마음을 마주했을 때의 리진, 왕비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했을 때의 리진의 마음이었죠. 콜랭의 <레미제라블> 속 향낭과 같은 사랑보다 왕비의 속이 새하얀 배를 숟가락을 퍼 먹여주는 사랑에 더 마음이 갔어요. 그래도 콜랭이 리진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과 리진이 보낸 마지막 서신을 찢어 없애버린 콜랭의 마음은 이해하기야 하지만 결국 그는 타인이었다는 씁쓸한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네요. 정녕 남녀간의 사랑이란 그리 허망한 것일까요? 홍종우의 사랑도 그랬듯이요.

   작가님. 이 말도 안되게 길기만 한 편지글에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을 보냅니다. 사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시작한 글이었는데, 괜한 말들로 이렇게 길어져 버렸네요. 어제 비가 내렸고, 저는 달거리를 시작했어요. 아랫배가 시큰거리게 아프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책장을 마쳤습니다. 집 앞 도서관의 큰 책상 앞에 앉아서 읽었는데,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런지 늘 꽉 찼던 도서관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작가노트는 집에 가서 읽을 요량으로 남겨두고 책을 덮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왕비가 시해당할 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콜랭의 에필로그까지 읽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죠. 밑으로 내려가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꺼내 마시면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을 보고 있었어요. 순간 아득해지는 마음이 편안해지더니 행복해지더라구요. 작가님께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죠. 리진은 정말 작가님의 몸에 꼭 맞은 옷이었어요. 저는 비록 허구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리진을, 작가님의 리진으로 기억할래요. 김탁환 작가님의 <리심>도 언젠가 읽어보고 싶지만, 리진은 작가님과 더 닮아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일찍 <리진>을 읽었으면 출간 후에 있었던 여러가지 행사에 참석해서 <리진>의 첫 장에도 제 이름이 새겨진 작가님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요. 그래도 가을이 오는, 이 쓸쓸해지는 계절을 맞이하는 이 즈음이 제게는 더할나위없이 리진을 읽기에 좋았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만나게 되면 <리진>의 앞 장에도 사인 부탁드릴께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반납하고, 제 책으로 사서 두려구요. 지내다 리진이 보고 싶어질 때면 책장에서 꺼내서 읽으려구요. <깊은 슬픔>을 한번 꺼내서 읽기가 왠지 망설여지는데, <리진>은 그렇지 않을 거 같아요.

    그럼 작가님의 사인 앞 글귀처럼
    작가님, 좋은 일 많으세요.

2007년 9월 6일
작가님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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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리샴의 <사라진 배심원>

존 그리샴 소설을 한번도 못 읽어봤는데.
케이블에서 더스틴 호프, 존 쿠샥, 레이첼 웨이즈의 <런 어웨이> 영화를 봤다.
<사라진 배심원>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는데,
<사라진 배심원>에서는 담배회사와 대항하는 내용이라는데
<런 어웨이>에서는 총기회사와 대항하는 내용이었다.
간만에 재밌게 본 법정영화였다.
배우들도 빵빵하고 반전이라고 있기는 하지만
요즘 반전에 하도 길들여져서 보다보면 딱 알 수 있다.
반전이 중요하다기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세지가 중요했다.
미국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총기난사 사고에 대해서
총기를 난사한 가해자가 아닌, 그 매개체가 되는 총기를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무분별하게 팔고 있는 총기회사에 대한 고발과 함께 미국의 배심원 제도에 대해서 자세히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원작이 궁금해서 찜해둠.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어제 TV, 책을 말하다에 소개된 소설책이다.
팩션소설인데, 김홍도와 신윤복과 정조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엮었다고 한다.
추리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는데
두권짜린데 패널들 얘기에 따르면 한번 손에 쥐면 멈출 수 없을정도로 재밌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인물들을 역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의 틀에 집어넣은 것인데, 역사적인 자료는 없지만 작가는 이 소설에서 김홍도와 신윤복을 사제시간으로 설정을 하고 써 내려갔다고 한다.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역사적인 기록이 단 두 줄뿐이라고 한다.
단 두 줄이기 때문에 역사적 상상의 나래를 활짝 필 수 있는 것 같다.
패널로 나온 큐레이터 분은 이 소설로 인해 우리가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미술 작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미덕인 것 같다고 한다.
정조가 실제로 화가들에게 궁 밖의 서민들의 생활을 그려오라면서 같은 풍경을 보고 각자의 그림을 그려오는 과제를 내렸다고 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에게 그 과제가 떨어졌는지는 역사적으로 볼 때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사제지간인 것도 확신할 수 없듯이) 이 때 두 사람이 그린 화풍이 굉장히 대조적이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들이 소설 속에 굉장히 긴박감이 넘치게 묘사가 되었다고.
재밌을 거 같다. 빨리 읽어봐야지.





손승현의 <원은 부서지지 않는다>

역시 TV, 책을 말하다에 소개된 책.
손승현이라는 사진작가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집.
서부극을 떠올릴 때, 백인이 황량한 들판을 말과 함께 가로지르며 쌍권총을 휘두르는 멋진 모습을 상상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승리한 역사의 각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 멋져보이는 서부극의 이면에는 미국사회의 소외된 이면, 아메리카 원주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이 지금 얼마나 열악한지, 서부개척당시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쓰는 '인디언'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 용어 역시 승리한 백인들에 의한 것이고, 실제로 '원주민'이라고 써야 한다고.
학살당한 조상들을 기리면서 미래를 향해 원주민 말타기 행사에 참여하면서 작가가 찍은 사진들과 글들이라고 한다.
책 소개 부분에 나왔던 책 속 한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원주민 사회에서 말(言)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원주민들은 말을 통한 약속은 무조건 지키고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백인들은 개척 당시 원주민들에게 백여개의 약속을 했지만 단 하나의 말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작가가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원주민이 작가에게 원주민 이름이 지어줬다고 한다.
'차가운 물 속을 걷다' 라고.
작가가 사진을 찍기 위해 살얼음이 있는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행사의 마지막 날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진심이, 작가의 진심이 느껴졌다.
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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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동네에 생긴 조그마한 주점은 통영에서 직배송한 싱싱한 해산물들을 내어놓습니다. 어느 날 주점 앞을 지나가다가 원목의 기둥 위에 커다랗게 써져 있는 '활우럭구이+생맥주, 환상적인 조합'이라는 메뉴를 보고 동생과 입맛을 다지며 들어가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바삭하게 구워지는 생선구이를 보면서 생맥주 500cc를 나란히 마셨습니다. 생선의 살점과 맥주의 조합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제법 통통해보였던 생선의 살점이 숯불 위에서 바삭하게 구워지면서 날씬해져버리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점점 줄어가는 살점을 아쉬워하며 맥주를 들이키고 있을 때, 주점의 주인이 와서 생선을 뒤집어주며 말합니다. 머리에 붙어 있는 살이 제일 맛있으니 꼭 챙겨먹어요. 나는 그만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을 생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분홍 리본의 시절>을 읽으며 참 많이도 침을 삼켰습니다. 7편의 단편 속 인물들은 늘 무언가 요리를 하고 그것들을 맛깔스럽게 먹어 치웁니다. <가을이 오면>에서 밥과 김치만으로 아삭하고 물컹하게 만든 김치볶음밥,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서른이 된 주인공이 매일 프라이팬 위에 구워 먹었던 비릿한 조기 두 마리, <약콩이 끓는 동안>에서 순천댁이 매일 새벽 끊여대던 약콩물, <솔숲 사이로>에서 사내와 함께, 그리고 사내가 떠난 후 구워댔던 고기와 솔잎 술, <반죽의 형상>에서 주인공이 끊여먹던 흰죽은 책을 읽은 그 날 집에 돌아와 뚝배기에 긴 시간 들여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문상>에서의 맥주와 곱창, 그리고 <위험한 산책>에서의 매콤한 뽈찜과 소주.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당장 소설 속 그네들 틈에 끼여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그네들이 먹고 마시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나도 맛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음식들을 먹고 나면 세상이 좀더 편안해질까 하는 생각, 적어도 이 음식들을 먹는 순간에는 세상이 좀더 아늑할 거라는 생각, 그래서 이 음식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어 삼키고 넘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 소설들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들에서 어김없이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들은 나를 불쾌하게도 만들고, 나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것들은 못난 나였기 때문이예요. 못난 내가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여져 있어 나는 그런 나를 읽어나가는 것이 불편하고 불쾌했고, 그런 나의 모습이 작가에게도 있고, 다른 이들에게도 있을 거란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오면>에서 변화가 싫어 대학원에 그대로 진학했고, 어느 순간 보니 곁에 아무도 없더라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랬고,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선배의 아내가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 이라고 뱉은 후의 주인공이 말하는 건지, 선배의 아내가 말하는 건지,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말하는 건지 헷갈려고 뜨끔했던 긴 문장들이 그랬고,  <약콩이 끓는 동안>에서는 밑줄을 어중간하게 그었던 여학생이 그랬고, <솔숲 사이로>는 사내가 온 뒤 그를 질투하고 사내가 떠난 후 그를 그리워하던 단식원 식구들의 막막함이 그랬습니다. <반죽의 형상>은 정말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이 짧은 단편을 읽는 동안 지난 6개월 동안의 나와 내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한 대학시절을 생각했고, 우리가 함께 타고 다녔던 지금은 사라져 버린 725버스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의 뒤편에서 내리는 일이 없기를 바랬습니다. 언젠가 소설 속 N와 마찬가지로 버스에서 늘 내리던 정류장이 아닌 집의 뒤편의 정류장에서 내려 오랜시간을 헤맨 적이 있어요. 집과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1시간 동안 헤매고 있었던 그 때의 나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또렷하게 알고 있는 집 뒤편의 길을 오랜만에 한번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문상>에서의 선배니임도, 선배니임이라고 바짝 달라붙는 그녀도 모두 나와 같아요. 그리고 <위험한 산책>에서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도.

   나는 작가가 채식주의자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책을 읽는 틈틈이 앞장으로 넘겨 작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몇 년전, 한강의 소설집을 처음 읽을 때도 그랬어요. 고기를 먹지 않고 심지어 화분의 식물로 변해버리는 주인공이 담긴 글을 읽어나가면서 계속 앞장을 넘겨 작가의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 봤습니다. 한강도 그랬고 권여선도 조그마한 체구에 굉장히 말라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빛이 아파보여요. 어쩌면 고기를 즐겨 먹고, 조그만 체구도 아니고, 무언가를 늘 탐하는 눈빛을 가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녀들과 같은 글은 쓰지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젯밤 악몽을 꾸었어요. 괴물이 쫓아오거나 어딘가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그런 꿈은 아니었는데,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등장했고 그녀가 내 마음에 상처를 냈어요. 꿈 속의 나를, 아니 현실의 나를 치욕스럽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깨어난 일요일 오전,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여전히 마음이 찢어지는 이런 날, 나는 <분홍 리본의 시절>을 다시 꺼내 들고 어떤 부분을 읽어내려갑니다. 이 문장들이 내게 위로가 됩니다. 조기의 검붉은 혀가 괜찮다고 잘 될거라고 말하면서 사라지는 것만 같은 아득한 느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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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내게는 소설보다도 작가의 말을 더 기다리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아마 <은어낚시통신>을 읽었을 때였을 거다. 은어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작가의 말이 있었다. 세세한 구절들이 떠오르진 않지만, 나는 한 장 남짓의 소설가의 시같은 작가의 말을 읽고는 책을 그냥 덮어버리지 못하고 그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 뒤로 윤대녕의 예의 그 감성적인 글의 촉감들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작가의 말을 남겼을까 기대하면서 읽게 된다. 그리고 소설을 끝나기 전에는 절대 뒤로 넘겨 먼저 읽지 않는다. 작가의 말은 소설이 끝난 다음에 읽는 것이 가장 빛나므로.

   사실 이러면서도 그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내가 읽은 그의 글들은 <은어낚시통신>, <눈의 여행자>, 그리고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했던 <열두명의 연인들>과 이번에 읽은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이다. 윤대녕은 적어도 내게는 그냥 마구잡이로 손이 가서 읽기 시작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조금은 별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가을이 오거나, 겨울이 한창인 어느 날에 읽거나 마음이 서늘하거나 누군가 내 어깨를 보듬아주는 꿈을 꾸고 싶은 깊은 밤에 읽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행복하거나 불행한 순간보다는 적당히 쓸쓸하고 스산한 마음이 드는 날 그의 글에 손이 가고 마음이 간다.

   이번 소설집도 계절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던 여름이었지만, 마음은 스산했던 그런 날에 읽었다.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을 나는 돌아오지 않는 제비를 기다리는 소슬한 마음으로 읽었다. 어쩌면 돌아왔으나 너무나 세월이 흘러버려 그의 모습이 맞는가 헤아려보는 모습이 안타까워 촉촉해지는 마음으로 읽었다. 시간은 늘 흐르고, 우리는 늘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위로받고 살아가지 않는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에는 돌아올 거라고 믿는 가혹한 희망으로.

   '연'의 정연은 해운을 기다린다. 해운이 미선과 함께 멀리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그가 다시 돌아와줄까하는 바램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연'을 읽으면서 결국 정연은 해운을 마음 속에서 지웠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 속 '나'는 정연을 세월이 흐르고 다시 만나도 여전히 해운을 그리워하는 정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연을 통해서 해운을 생각한다. 하늘 위에 무수하게 띄운 연처럼 우리의 기억들과 인연들은 가느다란 실 한가락으로 이어져있고 끊어지기도 하고 얽혀 버리는 것이라고. 마지막 눈이 내리는 겨울 하늘의 연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제비를 기르다'는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듯 항상 집을 나가서 어딘가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던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를 그리워했던 내가 있다. 나는 주인공이 늘 두 명의 문희, 아니 세 명의 문희를 그리워했지만, 정작 그가 그리워한 건 유년기 시절 그가 느낄 수 없었던 어머니의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자신의 역마끼를 억제하지 못해 바깥으로 떠돌았지만 평생 남아있는 남자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생각하지 못한 어머니. 어머니가 외로웠기에 아버지도 외로웠고 '나'도 지독하게 외로웠던 것이다. 마지막, 문희의 선술집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던 '나'는 유년기의 '나'인 것이다. 그 때 외롭다고 고독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울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나이가 많이 든 후에야 폭발한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외롭다고.

   '탱자'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 잔물결이 치는 통통배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때는 말할 수 없이 잔잔하고, 어떨 때는 금방 배가 뒤집힐 것만 같은 강한 파도에 휩싸이는 바다 위에서 고모가 말하는 거다. 내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인생이 이런 거더라. '탱자'속의 고모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를테면 '귤이 탱자가 되는 날, 돌아오겠소' 라는 따위는 무의미하고 기약없는 배신을 당했다. 결국 마음 줄 곳도, 늙은 육신 하나 추스릴 곳 없이 쓸쓸히 인생은 마감한다. 인생은 이런 거더구나.

   이번 소설집에서 누군가의 부재가 많았다. '제비를 기르다'에서는 어머니의 부재, '편백나무숲 쪽으로'에서는 아버지의 부재, '고래등'에서도 엄연한 아버지의 부재였다. 그리고 '낙타 주머니'에서도 동료의 부재로 끝난다. 그 부재로 인해 빈 자리가 생기고,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소설은 고독하고 쓸쓸해진다. 특히 '낙타 주머니'에서 죽은 동료가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지던 어느 날, 그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하늘나라의 동료에게 전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주인공이나 그 메세지를 고스란히 듣고 있는 동생의 마음이란 우리는 고독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내 떨리는 어깨를 보듬아줄 사람 한 명쯤은 이 세상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설 속 '나'에 실제의 나 자신을 대입시켜본다. 지독하게 그립고 외로운 존재인 '나'에 나를 집어 넣고나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고독한 우리가 된다. 얼마나 나이가 들어야 우리는 고독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나 그의 글들을 읽어야 고독하지 않은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을까. 이번 <제비를 기르다>의 작가의 말처럼. 그도 그립기 때문에 글을 써 나가고 있고, 우리도 무언가가 그립기 때문에 그의 글을 끊임없이 읽고 있다. 지금은 출렁이는 통통배 위지만 언젠가 그게 육지든 섬이든 하늘이든 어디든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리움으로 우리도 작가도 살아가는 것이라고 작가의 말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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