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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들
    서재를쌓다 2008. 3. 21. 18:21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Media2.0


       그런 식의 이야기다. 대학교 세미나 시간.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가야만 하는 과제가 벅찼다. 과제로 읽어야 하는 책들은 늘 어렵고 따분했다. 학기 내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았을 거다. 그 날도 세미나 시간에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말이라도 한 마디씩 하라고 하셨다. 무슨 책이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 읽진 못했지만 읽은 부분까지의 느낌은 커다란 도서관 안에 나 혼자 덩그라니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교수님은 책들처럼 꽉 찬 느낌이였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 반대라고 했다. 그 많은 책들 속에서 나 혼자만 덩그라니 놓여져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였다고.

       책을 사면 꼭 맨 앞 장에 무어라고 적어놓던 때가 있었다. 뭐든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힘들었던 시기였다. 늘 책을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 아픈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기를. 이 책이 나를 위로해주기를. 다시는 울지 않게, 다시는 생각나지 않게 만들어 주기를 바랬다. 늘 실패했지만. 상처는 그렇게 빨리 잊혀지는게 아니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씻겨져 갔다. 내가 읽은 책에, 내가 본 영화에, 친구들과의 수다에,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책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괴로워 군대에 있는 후배에게 무작정 보내버리려는 결심까지 했다. 결국 보내지 못했다. 대신 작가의 싸인을 받았다. 작가님은 좋은 일 많으시라고 써 주셨다.
     
       집 앞 도서관에 정해 놓은 책 없이 어떤 책이든 빌리러 가는 날이 있다. 딱히 생각나는 책은 없는데 뭐든 읽어야 할 때. 한국 소설, 일본 소설, 외국 소설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제목과 작가, 표지와 간략한 줄거리만 보고서 선택하는 거다. 때론 월척을 낚기도 하고, 때론 피라미를 낚기도 하는 그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책들이 나를 보고 있는 거다. 눈동자를 굴리면서. 나를 읽어달라고. 내가 재밌다고. 나를 데려가 달라고. 신기했다. 한 권의 책에 한 가지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 한 가지 이상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이야기들이 이렇게 조용한 도서관에 꽂혀져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든 지금 내가 당장 읽을 수 있는 건 이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한가지 이야기일뿐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어느 날 이 책이 내게도 왔다. 도서관 새책 코너로 번듯하게 뽑혀져 있던 이 책. 언젠가 인터넷에서 어떤 리뷰를 보고는 꼭 읽어야지 찜해뒀다가 이제서야 만난 이 책.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봄이 되고 가벼운 책이 읽고 싶어 꺼내 들었는데, 의외로 많은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각기 다른 9가지의 책에 대한 사연이 존재하는 책이다. 어떤 책은 팔고 팔아도 내게 돌아오고, 어떤 책 속에 꽂혀져 있던 편지가 꼭 지금의 내 얘기같기도 한 이야기. 해외로 떠난 여행에서 나는 돌아오지만 책은 돌아가기 싫은 마음과 함께 그 곳에 두고 오고, 책장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 불행의 씨앗이라고 믿게 되는 책을 옛날 남자친구에게 보내고, 어떤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을 전설의 고서를 헌책방에서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 어릴 때 훔친 책값을 작가가 된 뒤 돌려주려 가는 주인공이 있고,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려 책을 찾아다니는 주인공도 있는 이야기.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때 자신의 운명을 바꾼 책을 선물하는 것이 고리타분해보이지 않을까 고민하는 주인공도.

       이야기들은 단순하다. 짧고 간략하다. 이 책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순전히 그 사이에서 '나의 책'에 관한 '나의 기억들'이 마구마구 떠올라서였다. 상상해봤다. 그와 나의 책장. 나는 책장이 닮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남자와 나는 책장을 늘리며 이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나가면서 깔깔거릴 수 있을까. 정말 내 책장과 비슷한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을까, 생각하며 내 책장을 살폈다. 많진 않지만 오손도손 모여있는 책장 속의 책들을 보며 이런저런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 책은 서점에서 직접 샀지. 그 날 스파게티를 먹었어. 이 책을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어떤 책은 꺼내서 넘겨봤다. 친구가 선물한 책도 있었다. 그리고 메모도. '갖고 싶은 책이라 내꺼 하나 샀다가, 니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서 한 권 더 샀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나갔었다. 그리고 어떤 책에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이 책은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아 다시 읽고 싶어질 때도 꾹 참았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묻혀버릴까봐. '유키로 가득한 책 한권을 끝내고 잠바를 주섬주섬 챙겨입고 집 앞 슈퍼에 들린다. 카스 맥주 2캔, 김, 소세지, 초콜릿, 아폴로, 꿀맛 쫀드기, 마셔야지.' 좋은 소설을 읽고 나면 꼭 맥주가 땡겼다.

       아, 그리고 전설의 고서 속 한 문장. 내게 전설의 고서가 도착한다면 어떤 문장을 써 넣어야만 기가 막히다고 소문이 날까. 이건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고민해봐야겠다. 전설의 고서가 당도하기 전에. 힘든 마음으로 책을 읽어내려갔던 그 시절, 내가 썼던 메모들을 책장에서 찾는데 없다. 어디로 간걸까. 나는 그 때 많은 주문을 담아 메모를 남겼었는데. 어떤 책은 읽고 친구에게 선물했다. 그 메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힘들어서. 그 메모 앞 장에 다시 메모를 남겼다. 나는 씩씩해지고 있다면서. 깜쪽같다. 그 메모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걸까. 힘든 마음이 사라졌듯 메모들도 그렇게 시간을 따라 스르르 사라져 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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