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옷의모임'에 해당되는 글 6건

  1. 애도일기 2 2017.11.29
  2. 전주영화제 8 2017.05.02
  3. 이월의 시옷 2 2016.03.08
  4. 1월의 일들 6 2016.01.26
  5. 오지은 2 2015.12.25
  6. 포르투갈, 단 한 권의 책 3 2015.08.26

애도일기

from 서재를쌓다 2017. 11. 29. 22:48






    한나는 롤랑 바르트의 일을 겪었다고 했다. 몇달 만에 나타나 그동안 별일이 없었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말했다. 나는 힘들었겠다, 말했다. 눈가가 촉촉해진 한나가 이제 괜찮다고 했다. 십일월의 시옷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십일월 시옷의 모임에, 우리는 셋이서 만났다가, 잠시 넷이 되었다가, 다시 셋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넷이 되었다. 셋일 때 책 이야기를 했는데, 둘이 하진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읽으면서 궁금했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책이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나는 반쯤 읽었다고 했는데, 끝까지 롤랑 바르트가 이런 마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해설에 있던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해줬다. "1980년 2월 25일 바르트는 작은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심리적으로 치료를 거부했다. (...) 한 달 뒤인 3월 26일 바르트는 사망했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겨워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써내려간 작은 일기들이다. 1977년과 1979년의 기록들이다. 모임이 있기 전,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봄이와 소윤이는 읽고 있는데 너무 우울하다고 말했다. 한나는 자신의 경우, 힘들었지만 추스릴 수 있었다고 했다. 더 잘 살아나가야지 생각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그의 절망에 나도 생각했더랬다. 얼마나 사랑이 깊으면 이럴까. 왜 그는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는가. 기석이가 롤랑 바르트를 좋아했던 것 같아, 망원의 제주도 음식점 오라방에서 제주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홍대로 옮겨 기석이를 만났고, 이야기해줬다. 롤랑 바르트에 대해. 그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엄마에 대한 사랑이 얼만큼 깊었는지. 홍대 지하의 소굴에서 무알콜 칵테일을 마시며 그 이야기를 듣는데,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가 마주한 세상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떠했을지. 어쩌면 어머니 만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 그날 넷이 된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그러했듯,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결국 하나가 되었다. 




   이건 이 책을 읽으라 하고, 멀리 가버린 하진이가 궁금해한 나의 포스트잇들.


 10. 29

애도의 한도에 대하여.

(라루스 백과사전, 메멘토) :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18개월이 넘으면 안된다.

- 29쪽


10. 31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33쪽


11. 1

   기분이 즐거워진 "방심" 상태들이 있다. 물론 정신은 여전히 말짱하지만. 그럴 때 나는 얘기를 하고, 어느 때는 농담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감정 상태에 빠진다. 눈물 흘리고 말 정도로.

- 39쪽


11. 4

   오후 여섯 시경 : 집 안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밝고, 깨끗하다.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나는 집 안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즐긴다). 이제부터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는 나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다.

- 46쪽


11. 11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 쯤에 돌아오겠노라고, 또는 (전화로) 지금 집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 54쪽


11. 30

   애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그건 너무 정신분석학적이다.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

- 83쪽


1978. 1. 22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 101쪽


1978. 5. 6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 <세멜레>(Semele, 3악장)를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 마망이 말하던 단어("나의 롤랑, 나의 롤랑")

- 130쪽


1978. 5. 31

   내가 필요로 하는 건 홀로 있음이 아니다. 그건 (작업의) 익명성이다.

   나는 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애도 작업, 꿈 작업)을 진정한 "작업" 으로 완전히 바꾸려고 하고 있다 - 글쓰기 작업.

   그 이유는 :

  (사람들이 말하듯) 커다란 생의 위기(사랑, 애도)를 이겨내고자 하는 "작업"은 너무 급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작업은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서만, 또 글쓰기 안에서만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것이다.

- 142쪽


1978. 6. 9

   FW는 고통스러운 사랑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는 괴로움을 당한다. 언제나 침울하고, 메말라 있고,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등등. 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 그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까 등등. 그의 곁에서, 그가 말하는 걸 귀 기울여 들으면서, 나는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주위를 기울이지만 그의 얘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마치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 같은 건 내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 146쪽


1978. 8. 18

   아직도 나는 마망과 "이야기를 한다"(현재형으로).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마음 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나는 마음속에서 그녀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존재하는 대화다 :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나는 그녀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쓴다 : 그녀가 했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집 안을 정리하면서. 윤리의 미학이 하나가 되는 삶, 비교 불가능한 생활양식, 그것이 그녀가 일상을 보내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그런 일상의 가사들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별함"을 만날 수가 없다 - 그건 집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니까. 여행은 그래서 나를 그녀로부터 떨어져 있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녀가 곁에 없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 그녀가 바로 가장 친숙한 일상이었으므로.

- 200쪽


1978. 10. 8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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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영화제

from 여행을가다 2017. 5. 2. 22:08


   올해도 전주영화제에 갔다. 소윤이가 1월에 전주로 내려갔고, 4월의 시옷의 모임이 전주에서 있었다. 우리는 함께 내려가 영화를 보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하고, 맥주를 마시고, 밤길을 함께 걷었다. 여행 중에도 즐거웠지만, 여행이 끝나자마자 그리워지는 것이 많아졌다.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다가 9와 숫자들 공연을 우연히 발견!

단톡방에 올려 각자 갈길을 가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런던에 있던 민정이는 이런 감동적인 선물을 해 주었다.

보자마자 살 수밖에 없었다구, 언니꺼야, 라는 말을 해준 고마운 민정이.




전일슈퍼 맞은편 가맥집에서 모기향이 너무나 좋다고 감탄을 연발하는 시옷.




우리도 무언가 적자.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자! 중국사랑 쁘띠동환님이 함께한 4월의 시옷.




봄이의 제안에 이런 아름다운 등도 마주했다.




그야말로 아름다웠던 빛.




등나무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아주 잘 나왔다

시옷 인생샷 나옴.

 



   해가 지기 전부터 하루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여러 번 옮기며 맥주를 마셨고, 조림이와 소윤이랑 소윤이가 예약해둔 숙소까지 걸었다. 다들 피곤하고 무거워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을 힘들어했는데, 다음날이 되니 정말 거짓말같이 근사한 추억이 되어 있더라.




   잠에서 깨어날 민정이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내려 마시고, 어제 미처하지 못한 책 얘기를 했다. 4월의 시옷의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었는데, 참 좋았다. 조림이도 좋았다고 했다. 책을 읽자고 제안한 소윤이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림이가 언니가 포스트잇 붙힌 부분 읽어줘요, 라고 말했고

나는 조림이는? 물었다.

우리는 각자 좋았던 부분을 읽었고, 그 이유에 대해 말했다.




아침부터 모주 마시는 녀자들.

순천으로 떠날 거면서 모주를 살 수 없냐고 물어보는 녀자.




소윤이는 전주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 콩나물 국밥이 최고라고 했다.




조림이는 계속 이 모주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맛보이고 싶다고 했다.

우정식당은 모주를 직접 만든다고 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를 기다리며 소윤이랑 가진 다정한 커피타임.

소윤이는 초록색 일기장을 보여줬다.

이런저런 지난 일기들을 보여주며, 언니, 나 이랬대, 하며 웃어댔다.

나는 소윤이의 성실함과 밝음이 새삼스레 부러웠다.




이번 영화제에서 세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순위를 매겨보자면,

친애하는 우리아이 > 시인의 사랑 > 돌아온다.

<친애하는 우리아이>는 계속계속 생각이 난다.




   마지막 영화를 보고 전날 가지못한 전일슈퍼에 혹시나 영업하나 전화를 했더니 한단다. 휴무일인데, 오늘은 한단다. 포장만 해가려 했는데, 가게 안에 사람들이 한 테이블 밖에 없는 걸 보니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포장해갈 것도 시키고, 혼자 먹을 것도 시켰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슈퍼 한 구석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고 황태를 먹었다. 혼자서 빠르게 알딸딸해지는 게 외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맥주를 마시며 엽서도 썼다.




버스 시간이 남아 걷다 보니 노송광장.




아, 좋네.




전날 전주돔에서 얻었던 맥주를 숙소 냉장고에 넣어뒀는데 잊지 않고 가지고 나왔다.

광장 한켠 벤치에 자리잡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두번째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걸었다.




이팝나무.




전주는 무척 더웠다. 이제 여름인가 보다.




이 초록 앞에서는 얼마 전에 사둔 책이 생각이 났다.

함께 읽는 친구는 그를 '산책자'라고 말했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터미널까지 걸어갔는데 출발 3분 전에 버스 앞에 도착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숨이 몇번이나 끊어질 뻔 했고. 글렀어, 나는 버스를 놓치고 말거야, 몇번이나 포기를 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고 뛰고 또 뛰어 버스를 놓치지 않은 나에게 박수를! 그 뒤의 버스들이 다 매진이라 죽어라 뛸 수 밖에 없었다는. 자리에 앉자마자 목이 엄청 말랐고,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두 개나 샀다!




그러니까, 잘 보고, 잘 먹고, 잘 만나고, 잘 자고, 잘 걷고, 더불어 잘 뛰고 왔다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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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의 시옷

from 모퉁이다방 2016. 3. 8. 23:02

 

 

 

   2월의 시옷의 책은 로베르트 무질의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였다. 기석이가 선정한 책이었다. 나는 거의 읽질 못하고 모임에 갔다. 다들 많이 읽지 못했노라고 고백했다. 소윤이만 다 읽었다. 소윤이는 힘들게 읽었는데, 무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바로 하지 않고 빙빙 둘러서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런데 그런 무질의 이야기를 빙빙 둘러 따라가보면 그곳에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더라고 이야기했다. 무질이 일부러 그렇게 쓴 것 같다고. 그러니 그렇게 읽어야 했다고. 그게 무질이 원한 거였다고. (소윤이의 말을 적어두질 않아서 내 멋대로 해석했다) 봄이는 성격 없는 인간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의 자신의 성격이 정확하게 무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시옷에서 이렇지만, 회사에서는 또 전혀 다른 모습이야. 또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습이고. 어떤게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  (봄이의 말을 적어두질 않아서 내 멋대로 해석했다) 모과는 책을 한 줄도 읽지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듣다보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요즘 자신의 고민들이 이야기들 속에 있어 마음이 덜컹- 했고, 그러니 책 속에 요즘의 자신이 있을 것 같다고. (두 번째 모과의 말은 정말 내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 소윤이는 기석이에게 시집을 선물받았다. 받을 만 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곱창을 먹으러 갔다. 모듬곱창과 알곱창을 섞어 시키고, 각자의 맥주와 각자의 소주를 마셨다. 곱창이 나오기 전에 아르바이트를 마친 솔이가 왔고, 다같이 건배도 했다. 오래간만에 테이블이 아닌 바닥에서 여럿이 모여 곱창도 먹고, 술도 마시고, 밥도 볶아 먹었다. 뭔가 조금 옛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오밀조밀하게 느껴졌다. 밥배를 채웠으니 맥주배를 채워줄 차례. 기석이의 단골이었던, 우리가 지난해 늦봄 즈음에 함께 갔던 소굴로 갔다. 가는 길에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누군가 개워놓은 흔적을 발견했다. 어떻게 딱 그 순간 개워냈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굴에 도착. 우리는 맥주를, 기석이는 (맞을 것이다) 보드카를 시켰다. 병맥주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병규에게 맥주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해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소윤이는 대장 자리에 앉아 열심히 셀카를 찍어댔고, 모과와 병규는 그런 소윤이를 찍어댔다. 우리는 다 같이 건배를 했다. 한달동안 재밌는 일이 없었냐고 물었고, 몇몇 사람에게는 재밌는(혹은 그렇지 않은) 일이 있었다. 2월의 화두는 뽀뽀였다. 뽀뽀는 언제든 어디서든 좋으니, 그 순간이 짧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자고 (나 혼자)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성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3월에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일을 각자의 입장에서 심각하게 (혹은 눈물날 정도로 재미나게) 생각해줬다. 3월에는 재밌는 일을 많이 하고 만나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밤은 깊어갔고, 체력이 고갈되는 이들이 있어 (특히 나) 기운이 남아도는 아이들도 그만 헤어져야 했다. 소굴은 두 번째인데 두 번 다 시옷과 간 거다. 나는 첫번째로 소굴에 갔을 때를 떠올려봤다. 아, 우리 꽤 많이 친해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새멤버들은 거의 처음이라 많이 어색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시간들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좀더 서로에게 친숙해져 간다. 좋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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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일들

from 모퉁이다방 2016. 1. 26. 22:21

 

 

 

   토요일에서 일요일이 되는 동안, 우리는 시인의 방에 있었다. 다섯 명이서 한 대의 택시를 타고 연남동으로 왔다. 택시 아저씨는 시작하는 연인들의 풋풋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 풋풋한 택시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고 조잘거렸다. 서촌에서 시인은 이야기했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언제나 그렇듯 물어봐야 겨우 답했지만, 나는 그의 '좋은' 기운을 느꼈다. 우리는 시인의 방에서 방백도 듣고, 이소라도 들었다.

 

   나와 동생은 요즘 하루에 한 개씩 버리는 중이다. 좁은 원룸에 살고 있는데, 살면 살수록 짐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살펴보면 대부분이 필요없는 것들. 그걸 하루에 하나씩 찾아내 버리고 있다. 어떤 날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 볼펜을 버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일년 내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을 버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마음을 버렸다. 나는 '그' 마음을 정말 버렸다고 생각했다.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내 일상은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일본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을 읽어야 하는데 걱정을 하면서 티비를 보다 씻고 잠들기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1월이니까, 뭔가 결심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열심히 적게 먹고, 열심히 맥주를 덜 마시고 있다. 지금의 내 일상은 일어나서 씻고, 몸무게를 재고, 아침을 먹고 (가장 먹고 싶은 것, 가장 칼로리가 높은 것), 노랗고 얇은 종이에 그 날의 일본어를 가득 써서 호주머니에 넣고 출근을 한다. 일을 하고, 화장실에 가는 동안 노랗고 얇은 종이를 꺼내 한번씩 읽어본다. 잘 읽히지 않는다. 어쩜 나는 이렇게 바보일까 자책을 한다. 때때로 칼퇴를 하고, 때때로 야근을 한다. 늦게까지 야근을 하지 않으면 운동을 하러 간다. 타원형으로 나열되어 있는 기구를 이용해 몸을 움직이고, 발판 위에서 뛴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돈다. 스트레칭을 하고 집에 온다. 우유를 마신다. 내일 점심으로 먹을 샐러드를 준비하고, 공부를 조금 하고, 책을 조금 읽고 잔다. 그런다. 운동을 하면서 듣는 말을 일상을 살아가면서 떠올리고 있다. 트레이너들이 매일매일 말한다.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밀고, 시선은 정면으로.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밀고 시선은 정면으로.'

 

   어떤 날은,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너무너무너무 슬펐다. 마음이 마구마구마구 아팠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횡단보도를 하나 남겨두고 엉엉 울었다. 결국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마저 울었다. 그렇게 울고나니 시원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생각했다. 집에 와 씻고 이불 덮고 잘 잤다.

 

   <치즈인더트랩>에 빠져 있는데, 지난 일요일에 1화부터 쭉 다 봤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설이가 개떡같은 조원들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할 것이 확실시 되자, 맥이 풀리고 기운도 없어져서, 친구랑도 싸우고, 그러고 낮의 거리를 이어폰을 끼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장면. 유정선배가 따라가며 설이의 빈 손을 바라보는 장면. 설이는 무슨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집 앞 오르막길을 설이가 오르는 장면. 인호가 설이를 발견하고 말을 거는 장면. 둘이 나란히 오르막길을 오르는 모습을 뒤에서 유정선배가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장면. 이 장면들이 담긴, 밤도 아닌, '낮'의 풍경들.

 

  이번 주 듣고 있는 노래들. 현재 '재생' 목록의 처음 열 곡.

- 이브나 / 가을방학, 김재훈

- 시시콜콜한 이야기 / 이소라

- 하도리 가는 길 / 강아솔

- 심정 / 방백

- 방공호 / 9와 숫자들

- 비밀 / 짙은, 한희정

- 집까지 무사히 / 루시드 폴

- Norway / 슬로우 쥰

- 아직, 있다 / 루시드 폴

- 새 (어쿠스틱, 이규호) / 루시드 폴

 

    아, 그리고 시인은 말했다. 그 사람, 내 삶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같아서. 나는 시인의 그 말이 좋아서,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내 '삶'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멋지다, 시인아. 고운 사랑하길.

 

   나흘 후에 나는 상고선을 타고 전장포구로 돌아와 임자도를 떠났다. 그 나흘 동안 우리는 일절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다만 난데없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서야 나는 그날 밤 그와의 관계가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와 막 사랑에 빠져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즈음 나는 매일매일 하나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요컨대 나라는 거울을 통해 매 순간 상대를 찾고 그리워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었다. 또한 상대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누구한테나 우주와의 경이로운 일체감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날 밤 그와 내가 그러한 순간에 처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와서야 말할 수 있지만, 별들의 생성과 소멸처럼 우리도 어느 순간 파괴되면서 동시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 410쪽, 윤대녕 <반달>

2015년 12월-2016년 1월 '시옷'의 책.

 

   내일, 그 아이를 만나기로 했다. 새 책은 '오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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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from 모퉁이다방 2015. 12. 25. 22:40

 

 

 

   사인본을 받으려고 오지은 산문집을 부랴부랴 주문했다. 가사집도 같이 왔다. 어제는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맥주를 잔뜩 마시고 잠이 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편의점에서 세계맥주 다섯 캔을 (그것도 큰 걸로) 사 왔지만, 두 캔도 제대로 못 마시고 잠들었다. 크리스마스,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소파 위에 앉아 오지은 가사집을 뒤적거렸다. 어제 길을 걷다가 생각한 건데, 올해 내게 가장 고마운 사람은 이봄이다. 올해 봄이는 내 손을 잡아줬고, 좋은 사람들을 무려 일곱명이나 내게 소개시켜줬다. 두번째 모임에서인가 뒤풀이 자리에서 살짝 취한 봄이 말했다. 언니는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뽑았어. 원래 두 명만 뽑기로 했는데, 셋을 뽑았어.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 좋아. 귀여운 것. 고마워, 봄아. 그때가 초봄 즈음. 겨울이 시작되고 있을 때, 우리는 동교동 삼거리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 봄이 그랬다. 오지은 가사처럼 말이야. 우리는 모두 그 가사를 말했다. 옆에 있던 기석이는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우리들. 시옷. 올해 다들 정말 고마웠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맥언니이자 맥누나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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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제본해 갈까 했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니 7권 정도로 제본을 하고 하루에 한 권씩 들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았다. 고작 서문을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황홀할 지경이었으니.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 시인이 쓴 글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봤다. 결국 게으른 나는 제본할 곳을 찾지 못했다. 두꺼운 책은 서울에서 천천히 읽기로 했다.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혼자 잘 해내가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는데, 이 소설이 그런 이야기인 것 같았다. 곡예사 언니랑 언젠가 이 책 얘길 했는데, 언니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중에 이 책이 제일 좋다고 했다. 나는 나 안 읽었나봐요 기억이 안 나요, 하니 언니가 너도 분명 읽었을 텐데, 했는데. 이번에 주문하면서 보니 내가 주문을 했던 책이었다. 그 책은 어디로 간 걸까. 읽은 기억은 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시집도 챙겼다. H가 읽다가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봤는데, 그 시가 너무 좋아서 시집 제목을 묻고 냉큼 구입했던 시집이었다. 그리고 이 책. 시옷의 모임 네번째 책. 내가 고른 책. 좋다는 이야기들이 많아 사두었던 책. 때를 기다리며 우리집 책장에서 조용히 견뎌 주었던 책.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아, 음악도 가득 담아갔다.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아서, 멜론 30곡 다운로드 결제를 하고 가득 담아갔다. B는 서울전자음악단의 '꿈이라면 좋을까'를 추천해주며 자기 전에 꼭 들으라고 했다. 동생의 작은 스피커를 가져갔다. 음악을 틀고,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눕고, 눈을 감으면 내 앞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니 평생 봐 온 것 같은 별들이 반짝였다. 폭신한 밤길을 기분좋게 혼자서 걷는 느낌이었다. 아침을 맞이할 때, 밤을 보낼 때 어김없이 음악을 들었다. S가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를 찾아보다 좋아하게 된 자우림의 노래들도 내게 힘이 되어줬다. 담아간 음악은 여러 번, 모두 들었지만, 책은 이것만 읽었다. 169페이지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환상의 빛'이다."로 끝나는 책. 네 편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부분은 슬펐고, 어떤 부분은 아름다웠다. 어떤 부분은 쓸쓸했으며, 어떤 부분은 다행이었다. 외롭고 쓸쓸했지만, 우울하지 않았다. 그게 꼭 포르투갈에서의 나 같았다. 그래서 이 한 권만 읽은 게 더 좋았다. 어떤 다른 이야기와 섞이지 않은 이번 여행의 감정이 고스란히 이 한 권에 담겨 있다.

 

   그곳에서 내가, 귀퉁이를 살짝 접어놓은 부분들.

 

    "배가 아파."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졌습니다. 초경이 무서웠던 게 아닙니다. 저는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도로 사라진 할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이나 막벌이꾼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낮인데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축축한 방 가득히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장지문을 쾅 닫고 피가 굳어서 딱딱해진 팬티를, 스커트 위로 언제까지고 꼬옥 누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달거리가 시작될 때는 어김없이 이유 없이 썰렁해지고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마 초경이 있었던 순간, 파친코점의 냉방으로 얼음처럼 차가워진 땀에 절어 있었던 탓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p.31, 환상의 빛

 

   울면서 아야코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아닌 휑뎅그렁한 들판에 홱 내던져진 듯한 쓸쓸함이, 꽉맨 오비 위로 아야코의 몸을 더욱 조여 왔던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생각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부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이 남편을 원했던 적이 없다. 이혼하고 나서도 그런 쓸쓸함을 느낀 적은 없다. 자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담백한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슈이치까지 죽게 했다. 맥락도 없는 그런 생각이 한꺼번에 분출해서 아야코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조와 단 둘이 앉아 있는 것이 지금의 아야코를 한층 더 애달프게 했는지도 몰랐다. 아야코는 일어나 잠자코 옆방으로 갔다. 오비를 풀고 기모노를 벗고 갈아입을 원피스를 든 채 잠시 멍하니 방 한구석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내가 입원해."

- p.94, 밤 벚꽃

 

   갑자기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따스한 날씨인데도 목에서 뺨에 걸쳐 피가 거꾸로 오르는 증세는 허리나 장딴지나 발끝의 열을 빼앗았다. 슈이치의 사고 이래 달거리의 징후도 불규칙해졌고, 세 달쯤 전에 희미한 것이 있었을 뿐 그것으로 뚝 그쳐버렸다. 그런 나이이기도 했지만 아야코는 자신 안에 뭔가 살아 있는 것이 소실되어간다는 불안과 초조를 느꼈다.

- p. 103, 밤 벚꽃

 

   그것은 확실히 울음소리였다. 닫힌 칸막이 커튼 너머에서 노인이 울고 있었다. 나는 놀라 가만히 귀를 귀울였다. 열차의 진동이나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섞여 숨죽여 우는 노인의 울음소리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었다. 통절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낮고 긴 울음소리였다.

- p. 154, 침대차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열차가 멈췄다. 신호를 기다리는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울음소리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나는 커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는 불규칙한 율동에 몸을 맡겼다. 노인의 울음소리가 끝난 것으로 일단락된 듯,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잠깐 자고 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자 이른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차 안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 p. 163, 침대차

 

 

   덧, 포르투갈에서 내내 들었던 자우림의 '반딧불' 이 너무너무 좋아 통화연결음으로까지 설정해놓았는데, 늦은밤 연락이 되지 않는 언니를 찾는다고 여러 번 전화를 했던 동생들이 다음날 일제히 말했다. 당장 바꿔. 귀신 나오는 줄 알았어.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내 취향을 무시하는 거야? 핏대 올리며 싸웠는데, 다음 날 조심히 들어보니 무섭더라. 당장 바꿨다. '반딧불'은 화창한 여름 낮에 듣는 걸 추천합니다아. 그러면 분위기 좋은 여름밤이 기분 좋게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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