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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2 2016.08.23

D-13

from 모퉁이다방 2021. 5. 18. 17:25

 

 

   진료실에 들어가면 매번 선생님이 제일 먼저 물어보신다. 돈 것 같아요? 내 대답은 항상 아니요. 초음파를 보신 선생님은 그러네, 아직 머리가 위에 있네. 오늘도 그랬다. 매번 아가 자세를 산모수첩에 그려두시는 선생님. 오늘의 그림은 제일 위 동그라미 그 아래 세로 한 줄 그 아래 산봉우리 두 개. 몸무게도 괜찮고 양수양도 괜찮고 아가는 잘 있단다. 목에 탯줄을 한 번 감고 있는데 별 문제는 없다고 하셨다. 수술 날짜를 확정했다. 5월 31일. 갑자기 디데이 날짜가 확 줄었다. 남편 전회사 동료가 있는데 나보다 예정일이 3주 빨랐다. 태명은 코코. 코코가 오늘 오전에 태어났단다. 지난주 일요일에 집에 가서 놀다왔는데 그 집 남편이 석가탄신일 하루 전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진짜 바램대로 되었다. 세 시간동안 진통하고 순산했다고. 저 세상 고통이었다고. 세상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   

 

   어제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썰어두었는데 남편이 반통짜리 수박을 꺼내다 허걱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수박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박을 들고 지난주에 보경이가 놀러왔다. 딸기 한 소쿠리와 함께. 보경이는 수박을 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간이 조금 지나 시원해지자 꺼내서 반통을 잘랐다. 그리고 반통의 반통을 잘랐다. 두 통은 랩을 씌워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반의 반통을 먹기좋게 네모나게 잘라 락앤락통에 담아뒀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고 편안하게 올해 첫 수박을 먹었다. 보경이랑 둘이 먹고 보경이가 간 뒤에는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먹었다. 남편이 수박을 좋아하지 않아서 수박 한 통이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오늘은 점심으로 통통한 김밥 한 줄을 사와 먹고 후식으로 어제 잘라둔 수박을 꺼내 먹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시원한 여름의 맛이다. 온 집안 창문을 다 열어두고 방석과 수건을 빨았다. 초여름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보경이는 얼마 전 버스정류장에서 느낀 어떤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광경을 보고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다른 때에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을 광경인데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시아버지의 임종 이야기도 해줬다. 갑자기 떠나시려는 시아버지 귓가에 조용조용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시어머니. 당신과 같이 살아서 참 행복했어요, 로 시작하는 따듯한 말들. 코끝이 찡해졌다. 보경이의 이 이야기들이 기억에 아주 오래 남겠다고 생각했다. 네 시 즈음 보경이가 이제 가봐야되겠다고 했고 함께 집앞 버스정류장에 나갔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의자에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 평일 오후의 시간이 무척이나 평온하게 느껴졌다. 영종도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와준 사람의 마음을 오래오래 기억해둬야지.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걸 아니까. 

 

   지난주 진료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못 물어 본 질문. 이제 움직여도 될까요? 선생님이 답해주셨다. 그럼요~ 아주 경쾌하게. 후아,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가며 보았던 스타벅스로 걸어 가 디카페인 커피와 에그베이컨 샌드위치를 시켰다. 얼마만에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시는가. 그것도 혼자서. <무라카미 T>는 양장에 너무 좋은 종이를 쓴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장정도 종이재질도 책의 여백도 (그러므로) 가격도 과한 느낌. 가벼운 내용이니 더 가볍게 만들었음 좋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가벼워서 읽기 전의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좋았던 부분은 있었는데, 하루키가 미국에 갈 때마다 꼭 햄버거와 생맥주로 첫 끼니를 해결한다는 부분. 별 것 아닌데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왠지 설레였다. 내게도 자주 가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꼭 먹는 첫 끼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이 그립다는 이야기. 

 

  여행으로 미국에 간다. 세관을 통과하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에 자리 잡자마자 '어디 가서 햄버거부터 먹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어떠신지?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지극히 당연한 본능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형식적인 의례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좋다. 어쨌든 햄버기를 먹으러 간다. 

   오후 1시 반 쯤에 손님이 얼추 빠진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카운터에 홀로 앉아 쿠어스 라이트 생맥주와 치즈버거를 주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패티의 굽기 정도는 미디엄, 버거와 치즈 외에는 양파와 토마토와 양상추과 피클. 사이드 메뉴는 갓 조리한 감자튀김. 마음의 친구로 역시 콜슬로도 주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단짝, 머스터드(디종)와 하인즈 케첩.

   시원한 쿠어스 라이트를 차분하게 마시고 주위 사람들의 술렁임과 접시나 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혹은 이국의 공기를 주의 깊에 들이마시면서 치즈버거 접시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로소 '아, 그렇지, 또 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솟아난다. 

- p.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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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놀란 것은 사람들이 책을 매우 열심히 읽는다는 점이다. 아마 겨울이 걸어 실내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독서에 매우 큰 의미가 가치를 두는 듯하다. 집의 서가가 얼마나 충실한가로 그 사람의 가치가 판가름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인구에 비해 대형 서점이 많고, 아이슬란드 문단도 활발해, 1955년에는 할도르 락스네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대표 장편소설 <독립한 민중>을 라디오에서 몇 주에 걸쳐 낭독했고, 그 시간에는 전국민이 말 그대로 라디오 앞에 못박혀 있었다고 한다. 버스가 운행을 멈추고, 어선도 조업을 중지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작가수도 많아서 에리캬비크에만 340명이 '작가'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나가세 마사토시 주연의 영화 <콜드 피버>에서 언급했듯이, 아이슬란드는 인구당 작가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p.27~28


 

   요리뿐만 아니라 주류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옛날부터 음주에 얽힌 말썽이 많아서 (아마도 겨울이 길고 혹독한 탓이리라) 오랫동안 금주제도가 이어지다 제법 근년에 들어서야 폐지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맥주에 대해서는 그후로도 계속 금주법이 적용되어, 놀랍게도 아이슬란드에서는 1980년대 말까지 맥주를 전혀 마실 수 없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자기 집 헛간에서 손수 맥주를 만들어 마셨고, 밀매업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외국 맥주를 대량으로 국내에 들여왔다.

- p. 33


 

   숲은 전혀라고 말해도 될 만큼 없다. 아이슬란드가 궁핍했던 시기에 사람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산림을 모조리 벌체해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이곳에 자라 있던 수목의 99퍼센트가 사람들 손에 베여나갔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고작이라 나무를 심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 남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며 여기저기서 식수를 시작했는데, 남쪽과 달리 수목의 성장이 더뎌 울창한 숲을 이루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기껏해야 사람 키만한 나무밖에 없다. 그러나 비록 큰 나무가 없다해도, 푸른 이끼에 뒤덮인 용암대지가 끝도 없이 펼쳐지고 곳곳에 자그만한 한랭지 꽃이 가련하게 피어 있는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그런 풍경 속에 홀로 서 있으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소리, 혹은 아득한 시냇물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깊은 내면의 고요가 존재할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머나먼 고대로 이끌려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섬에는 무인의 침묵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 섬에 유령이 가득하고 말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무척 과묵한 유령들이리라.

- p. 49



   오로라는 이윽고 말이 꼬여서 의미를 잃어가듯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는 따뜻한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었다.

- p. 60



   (...) 그러나 이제는 긴 할주로가 생겨, 많은 관광객이 시간을 절약하며 발이 묶일 걱정 없이 유럽 각지에서 이 섬으로 직행할 수 있다. 물론 편리하지만 왠지 서운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불편함은 여행을 귀찮게 만들지만, 동시에 일종의 기쁨 - 벌거로움이 가져다주는 기쁨 - 도 품고 있다.

- p. 89~90



   나는 몰라보게 밝아진 가게 안을 둘러보고는 "이게 정말 그 파트랄리스 가게라고?" 하며 입을 딱 벌리고 말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생 '파트랄리스 가게'는 우리 마음에 쏙 들었다. 예전처럼 마리자가 메뉴에 빠지지 않고 올라 있고, 역시 예전처럼 맛있었다. 하나하나 양이 푸짐한 것도 변함없다. 가격은 합리적이고(혹은 상당히 싸고), 그러면서 재료는 신선하다. 생선을 주문하면 주방으로 손님을 데려가 직접 실물을 보여주며 고르게 하고, 그것을 눈앞에서 조리해준다. 이 가게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레몬과 올리브오일을 뿌린 신선한 생선 요리를 먹고 있으면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이틀 연달아 이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만 레치나 와인은 톡 쏘는 독특한 향이 예전보다 조금 엷어진 것 같다. 나는 그 촌스러운 향이 무척 좋았는데.

- p. 102~103



   이따금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마음이 가는 상을 만난다. 왠지 반가움 비슷한 감정마저 든다. 그런 상을 만나면 "오호, 네가 이런 데 있었구나"라고 무심코 말을 걸고 싶어진다. 대부분 칠이 벗어지고 표면이 변색되고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것들이다. 개중에는 코나 귀가 아예 사라진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스름 속에서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한눈팔지도 않고, 우기도 건기도 가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뎌온 것이다. 백년이고 이백 년이고. 나는 그중 몇몇 조각상과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음이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다정한 친근감을 안겨주는 분위기는 서유럽의 여느 성당들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 성당에는 보는 이를 압도하며 장엄한 기분을 자아내려는 면이 있다. 물론 그것도 그것대로 멋지지만, 라오스의 사원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압도적인 힘' 같은 것이 엿보이지 않는다.

- p. 177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떄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책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 p. 181~182



   그 때문인지 가기올레 인 키안티, 라다 인 키안티, 카스텔리나 인 키안티... 등등. 조금 신기한 울림을 가진 토스카나 마을의 이름들이(모두 오래된 성벽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른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그런 이름을 보거나 듣기만 하면 마을의 풍경과 그곳에서 마신 와인, 이름 모를 레스토랑에서 나온 음식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면 '아아, 다시 그곳에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한다. 다름에는 꼭 알과 로메오를 빌려야지, 라고도.

   이것에 나는 개인적으로 '토스카나 열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p. 213~214



(....) 그렇게 오래 혼자 여행해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혼자서 낯선 땅을 여행하다보니 단순히 숨을 쉬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쯤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 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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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에서 하루키는 말한다. "잊을 만하면 띄엄띄엄 청탁이 들어와 여행기를 쓰는 작업을 하다보니, 차츰 원고가 쌓여서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습니다. 한데 모은 글을 새삼 다시 읽어보자 '아, 다른 여행에 대한 글도 써둘걸 그랬다' 하고 은근히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써야 한다! (불끈)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떠나보내며, 한번 더 읽고 싶다고 표시해두었던 문장들을 옮겨둔다. 라오스야, 잘 가라. 그곳에서 행복하렴. 역시 하루키 최고의 여행기는 <먼 북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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