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4일에서 7일까지. 3박 4일동안 도쿄에서 먹은 것들.

 

 

 

 

 

 

 

 

 

 

 

 

 

 

 

 

 

 

 

 

 

 

 

 

 

 

 

 

 

    4일내내 내 갤럭시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였다. 도쿄에 하루 더 있는 Y언니랑 키치조지에서 헤어지고, 신주쿠에서 코인라커 찾느라 정신없이 헤매다가 겨우 넥스를 탔다. 올 때도 넥스를 타고 왔는데, 올 때랑 갈 때랑 같은 방향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올 때는 오전 풍경. 갈 때는 오후 풍경. 같은 풍경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하고 면세점에서 남은 돈으로 자그마한 핸드크림을 몽땅 샀다. 다음에 올 걸 생각해서 돈을 남기진 말자고 생각했다. 미련없이 돈을 탈탈 털었다. 그래도 약간의 동전이 남아 식당에 들어가 에비수 생맥주 작은 사이즈로 하나 시켰다. 식당의 창가 바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활주로를 마주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았고, 중국 비행기, 미국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았다. 식당에는 올드팝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시월 나흘동안, 다른나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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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시대 둘이서 몇번이나 여기에 왔던지.

행복했던 그 시절 그리고 지금도 행복합니다.

- 추억의 벤치 2003.07

 

    결국 태풍 때문에 가마쿠라와 에노시마는 못 갔다. 그게 이번 여행에서 제일 아쉬웠다. 마지막 날, 신주쿠 역 코인 라커에 짐을 넣어두고 키치조지에 갔다. 그리고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저 벤치를 만났다. 벤치마다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앉았던 벤치의 옆옆 벤치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붓같은 도구를 들고 벤치를 청소 중이셨다. 아주 작은 먼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구석구석 꼼꼼하게 쓸고 계셨다. 그 할아버지는 딱 그 벤치 하나만 오랫동안 청소하셨다. 이 벤치들은 뭘까 궁금했다. 이 문구를 새긴 사람들은 누군지, 이 곳에 어떤 추억이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청춘의 시대라. 공원을 둘러보고 이 벤치에 앉았다. 시장에서 사온, 조금은 식어버린 멘치까스도 먹고, 차도 마셨다. 볕도 좋고, 그늘도 좋고, 나무도 좋았다. 화요일 낮이라 한적했다. 공원 안에 있는 동물원을 구경하고 줄지어 걸어 나가는 귀여운 유치원생들도 보고, 지나가는 자전거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도시락을 먹는 직장인 언니도 봤다. 공원 호수를 마주하고 30분째 미동이 없던 할아버지도 봤다. 옆 벤치에서는 어떤 남자가 기묘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청춘의 시대. 벤치에 앉아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나무들을 보며 '청춘시대'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어제도 여전히 내 청춘시대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오늘도 청춘시대일 지도. 그리고 내일도 청춘이기를. 이 공원과 청춘이라는 단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3박 4일의 도쿄 여행을 기분좋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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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로, 비오는 밤

from 여행을가다 2014. 10. 29. 22:09

 

 

 

 

 

 

 

 

   여행갈 때마다 늘 최고로 여기는 것. 하루종일 열심히 돌아다니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씻고 동네로 나가 맛있는 음식과 생맥주로 배를 채우고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것. 둘째 날 밤, 비가 오고 있었지만, 했다. 최고로 여기는 것! 

 

    7시에 메구로역에서 언니와 만나기로 했다. 누구든 10분이 지나면 벌써 돌아와 있거나, 늦는 거라고 생각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버려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고 기다리다 10분이 되어도 언니가 안 나타나길래 아파서 먼저 들어가 있나보다 하고 숙소로 갔다. 방에 있을 줄 알고 카운터에서 열쇠도 안 받고 곧장 올라갔는데, 언니가 없었다. 카운터에서 열쇠 찾는 말을 언니가 알려줬고 그걸 적어뒀었다. 그 페이지를 찾아 더듬더듬 말을 건네고 열쇠를 찾아왔다. 옷이며 몸이며 다 젖은 터라 바로 씻었다. 그 사이 언니가 왔다. 씻고 나와 언니를 로비에서 만났다. 언니가 점심에 먹은 음식 사진을 보여줬다. 내게 헤매지 않았냐고 물어봐줬다. 비가 많이 와 힘들었지만 둘이 잘 다닌 걸로 결론. 언니가 물색한 동네 라멘집으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메구로 극장이 있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뭔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라멘집은 손님이 많았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배가 고파 라멘도 시키고, 교자도 시켰다. 언니가 명란밥이 있다고 하길래 그것도 시키자고 했다. 당연히 생맥주도 시켰다. 맛있었다! 내일 날씨는 어떨까. 다음 날은 본격적인 태풍 진입의 날이었다. 앞에 앉았던 여학생 둘은 교자와 라멘 그릇을 깔끔하게 비우고 갔고, 옆에 앉은 여자 둘은 라멘을 다 먹고 담배를 폈다. 구석 테이블에는 중국인 가족이 와서 금방 먹고 일어났고, 창가 쪽에 서양인 부부도 있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겨울 한정으로 나온 맥주도 사고, 짭잘해서 자꾸만 손이 가던 오징어 안주도 사고, 세일 중이던 파인애플도 샀다. 무척 달았다. 내일 먹을 페코짱 요거트도 사고, 커다란 UCC 커피 패트도 샀다. 숙소에 와 이바다시에서 사온 페코야끼를 꺼내봤는데, 애들 눈알이 으시시한 것이 무서웠다. 역시 디테일한 일본. 크림치즈 맛에 귀여운 치-즈 이쑤시개 핀을 꽂아줬다.

 

   언니는 씼었고, 나는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1회를 무려 생방송으로 봤다. 자막 따위는 없으나 책으로 읽어 대충 내용이 이해가 갔다. 마트에서 사온 맥주도 마셨다. 언니가 씻고 나왔고, 각자에 침대에 앉고 누워 각자의 술을 마셨다. 드라마가 끝나고 예능 프로를 했는데, 개그맨 둘이 썰렁한 몸개그를 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웃겼다. 술 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그랬나. 언니가 지금 나오는 저 사람, <고잉 마이 홈>에 동네 아저씨로 나온 사람이 개그맨인데, 엄청 소심하고 집에만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개그맨이다, 그 사람이 낯가림 특집 토크쇼 같은 데 나왔는데, 낯가림이 심한 개그맨들이 모인 프로였다,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엄청 웃겼다. 그리고 그 개그맨이 좋아졌다. 욕심내지 않고 딱 두 캔만 마시고 잤다. 내일 날씨는 어떨까 걱정하면서. 고생했지만, 그만큼 기억에 남을, 그리고 벌써 남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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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가구라자카에서 닛포리 역으로 바로 갈까 했다. 두껍긴 하지만, 반팔을 입고 나와서 너무 추웠다. 계속 비 맞고 다니니 다음날 감기에 걸려 하루를 온종일 날려 버릴까봐 걱정도 됐다. 보고 싶었던 야나카 산책 거리는 타바타 역에서 시작해 닛포리 역에서 끝난다. 책에 의하면 3~4시간 소요. 어차피 보고 싶은 것은 닛포리 역에 다 있으니까 닛포리 역으로 바로 갔다가 조금 둘러보고 숙소로 일찍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언니를 기다리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일본까지 왔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두 정거장 더 가 타바타 역에서 내렸다.

 

   일단 첫번째 코스. 타바타문사촌기념관이다. 타바타에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살았다고 한다. 동네가 좋아 모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좋아 모이고 그랬던 모양이다. 문인들이 함께 모여 살며 풍요로운 인연들을 많이 이어간 모양이다. 기념관은 아주 작은데, 원고들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년의 남녀가 기념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어를 모르니 그냥 물건들을 빠르게 둘러보고, 작가들이 실제로 살았던 마을을 본떠 만든 모형 앞에 썼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타바타에 살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한자이름을 더듬더듬 찾아 버튼을 누르니 오른쪽 가장자리에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야나카 산책하기. 책의 설명은 이랬다. "타바타 역을 마주하고 오른쪽 옆에 있는 건물 3층으로 올라가면 니시닛포리 역으로 가는 전철 선로와 평행한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니시닛포리 역이 보이는 육교가 나오는데 육교 위로 올라가면 닛포리 공원과 사찰을 지나 언덕길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언덕길에서 좌회전하면 마주하는 것이 유야케단단이고, 오른쪽이 야나카긴자 입구다.(도보 40분)"

 

   건물 3층을 올라가라고? 진짜 이상했지만, 올라갔다. 그러자 전철길과 평행한 주택 길이 나왔다. 와! 3층에서 시작되는 타바타 -니시닛포리 길을 보는데, 막 가슴이 설레였다. 여기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나. 딱 내가 원하는 길이었다. 한적했고, 전철과 함께 걷는데 옆에는 또 집들이 있어 특별했다. 이 길에서도 이어폰을 꺼냈다. 출발하는 전철도 보고, 비 맞고 있는 공중전화 부스도 보고, 불이 켜 있는 집들도 보고, 사람도 없고 비도 와 조금은 으스스했던 절에도 들어가 봤다. 좋았다. 역시 두 정거장 더 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신나서 걷다보니 금새 닛포리 도착. 물론 그 사이사이 소소한 헤맴은 있었다. 이 길을 걸어보려고 결심한 건 이 문장들 때문이었다.

 

    타바타에서 니시닛포리 그리고 닛포리까지 걷는 길은 가장 일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닛포리는 '히구라시노사토' 즉, 해가 질 때까지 있어도 질리지 않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경치가 아름다워 에도시대 문인들이 사랑했다고 한다. 일본의 예술인과 문학인들의 작업터, 사찰과 묘지, 드넓게 펼쳐진 전철길, 오랜 시간 비바람과 지진을 견뎌온 나무들, 오며가며 마주치는 동네 고양이까지 모든 '일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동네다.

- p.98 <도쿄 일상산책>

 

 

 

   

 

  

 

 

 

   저녁노을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계단이 있다고 했다. 이름하야 유야케단단. 이걸 제일 보고 싶었는데. 흠. 하지만 소용없었던 건 말해서 무엇하랴. 하루종일 비가 오고 있었는 걸. 근사한 노을은 보지 못했지만, 스산한 초가을 비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이것저것 동네 구경을 했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지만, 책에서 본 각 가게의 특성을 그대로 표현한 동그란 그림 간판은 구경할 수 있었다. 지붕 위에 있었던 생생한 모형 고양이들도. 책에서 어두워지면 으스스해지니 가지말라고 했던 묘지에도 갔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묘지 앞에 나팔꽃을 닮은 이름 모를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동네 빵가게, 동네 반찬가게, 오래된 동네 커피집, 한국식당 '짠', 깔끔한 동네 이발소, 서서 술을 마시는 술집 (팟캐스트에서 말로만 들었던!), 아기자기한 것이 많았던 소품가게, 동네 마트, 맥주 자판기 등. 여기저기 구경했다. 산책하는 동안 동네에 스피커로 음악이 울러퍼졌는데, 경음악이었다. 음이 잔잔한 것이 조금 쓸쓸한 날씨와 잘 어울려 나의 산책길을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주었다. 언니와 7시에 메구로 역에서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닛포리 역에 도착하니 그때부터 몸이 으슬슬했다. 자판기에서 따뜻한 녹차 패트를 뽑아 들고 전철을 탔다. 닛포리에서는 고양이 엽서를 한 장 샀다. 여름 축제에 가는 고양이의 모습을 그린 거였는데, 숙소에서 언니에게 보여주니 진짜 귀엽다고 했다. 아, 닛포리에서 고양이도 한 마리 봤다. 진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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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바시 역과 가구라자카 역 사이 언덕에 있는 가구라자카는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그 옛날 기모노를 차려입은 게이샤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뿌렸을 이곳은 조용히 마음을 비우고 걷기에 좋다.

   수많은 인연이 밟고 지나다녔을 돌길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아득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죽이고 귀 기울이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 바람의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알려졌으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나츠메 소세키도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p. 26 <도쿄 일상산책>

 

 

 

   

 

 

 

 

    

    이 책이 이번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덕분에 길을 많이 헤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헤맨 건 가구라자카에서. 메인 가이드북이라기 보다는 서브 가이드북이라 지도가 정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대략의 아기자기한 그림지도인데, 혼자 다닌 둘째날 이다바시 역에서 몇번 출구로 나가야 하느냐부터 나의 문제는 시작되었다. 정확한 출구번호가 없어서 헤매다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정확한 출구였다. 하지만 ㅠ) 나가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오른쪽 같기도 하고, 왼쪽 같기도 했다. 캐널 카페는 분명 저걸 말하는 것 같은데. 일본인 젊은 남녀가 내가 나온 출구 부근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와세다 도리 뭐라뭐라고 했다. 앗! 내가 찾는 길인데! 그들을 따라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초행길 티를 너무 많이 냈다. 내게는 책이 있었고, 그들에겐 핸드폰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따라갔어야지. 그런데 왼쪽에 와세다 도리라는 팻말이 있어 길을 헤맬 그들을 비웃으며 왼쪽으로 걸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오른쪽으로 갔다. 흠. 한 30분 넘게 아주아주 한적한 길을 비를 헤쳐가며 걸었다. 너무 한적한데 생각이 들 무렵, 길을 잘못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으이구. 혹시나 싶어 다시 길을 돌아가 젊은이들이 간 오른쪽으로 길을 건너 가보니 거기가 바로 내가 찾던 가구라자카 길이었다. 으이구. 바보 멍충이.

 

 

 

 

 

 

 

 

   가구라자카에 온 건 <친애하는 아버님께> 배경지이기도 했지만 (사실 드라마는 2회까지밖에 못 봤다;;) 존 레논의 단골 장어집이었던 타츠미야에서 장어덮밥을 먹기 위해서. 이다바시 역에서 길을 헤맬 때 초조했던 건 길을 잃어서이기도 했지만 런치 타임 시간에 늦을까봐. 이 시간에 가지 못하면 장어덮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가구라자카 길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이란. 타츠미야는 헤매지 않고 금방 찾았다. 그 앞에 절이 있다고 해서 절 부근에서 골목길을 유심히 보며 걸으니 간판이 보였다.

   

    줄을 서야 할 줄 알았는데, 가게 안은 한적했다. 손님은 나 뿐이었다. 나중에 단골 할아버지인 듯한 분이 들어왔고. 연습한대로 장어덮밥 중자와 맥주를 시켰다. 빙비루밖에 없다고 해서 다이죠부라고 말했다. 빅 오어 스몰이라고 물으시기에 (당연히) 빅이라고 말했다. 티비가 켜져 있었는데, <전국노래자랑>같은 티비 프로가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일요일 점심 때다. 뭔가 우리랑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전국노래자랑>이 끝나자 날씨 뉴스가 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태풍이 굉장한 것 같았다. 다이소 우비가 튼튼하다고 해서 사왔는데, 영 부실했다. 벌써 어깨죽지가 조금 찢어졌다. 사실 아침을 먹고 얼마되지 않아서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는데, 아주아주 비싼 장어덮밥이기 때문에 밥 한톨, 맥주 한 모금 남기지 않고 깨끗히 먹었다.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니 다시 걸을 기운이 났다. 운동화는 완전 젖어 버렸지만, 청바지는 이미 흠뻑 젖었지만. 아자!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따. Y언니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 기억해뒀다. 장어집을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조용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그리고 걸었다. 소매가 스칠 정도로 골목이 좁다고 해서 '소데스리자카'라는 수식어가 붙은 효고요코초. 산책 책에서는 이 곳을 가구라자카의 숨겨진 보물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좁은 골목길만 찾아서 걸었다. 걷다보니 길이 막히기도 했고, 누군가 집에서 나와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비가 오는데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같은 관광객도 보였다. <친애하는 아버님께>는 조금밖에 보지 않아서 그 배경 골목길이 어딘지 정확하게 몰랐는데, 어떤 집 앞에서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는 두 명의 사내아이를 보고 저기구나 알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맞더라. 산책 책에 소개된 화장품가게에 가서 더듬거리며 책에서 추천해준 상품을 말했더니 친절하게 한국어 팜플렛을 줬다. 추천 상품은 곤약 스펀지였는데, 친절한 언니가 내 손에 직접 시연을 해 줬다. 포장해달라고 하고 다른 추천 상품은 없나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떻게 알고 여기를 왔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책에 나와있어서 왔다고 하면서 책을 보여주니 스고이, 하면서 일본 언니들 특유의 감탄사를 내지르며 좋아했다. 친애하는 아버님께 골목길에서는 한 일본 아주머니가 내게 길을 물어봤다. 물론 일본어로;

 

 

 

 

 

   걷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해져 커피도 한 잔 마셨고, 숙소에서 언니랑 먹으려고 페코짱 붕어빵도 샀다. 팥 하나랑 치즈크림 하나랑. 붕어빵 페코짱에 눈알이 없어 어째 좀 무서웠다.

 

 

 

 

 

 

 

 

 

   그리고 이 길을 걸었다. 나는 이 길이 산책 책에 소개된 그린로드인 줄 알았다. 방금 전까지. 정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마도 더 내려갔어야 했나 보다. 책을 보니 느낌이 좀 다르네, 비가 와서 그런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랫길 같다. 그런데 이 길이 참 좋았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데, 사람도 없었고, 옆으로는 전철이 지나가고, 녹차빛 강물이 흐르고, 비 때문에 조금 쓸쓸한 기분까지 드는 것이. 하지만 그래, 비가 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 하루종일 비를 맞고 다니니 추웠다. 운동화는 흠뻑 젖어 질퍽거렸지만,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고생한 여행이 나중에 더 기억에 남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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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스러움이 피부로 느껴지는 시로가네라는 명칭은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1947년 구가 통합되면서 시바구가 미나토구로 변경됐지만, 도쿄로 유학한 그가 머물던 사회교육가 선생의 집이자 어리고 귀여운 꽃 아사코가 살던 지역이 '시바구 시로가네'다. 창문과 지붕이 뽀족한 집에서 함께 살자고 속삭였던 소녀 아사코와 피천득의 인연이 짧고도 길게 얽힌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 p. 392 <도쿄일상산책>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이 책이 출간됐다. 제목도 컨셉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도쿄는 서울과 많이 비슷하다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화려하지 않고 소소한 구경거리가 있는 곳. 서울로 따지면 서촌이나 북촌, 광화문 같은 곳. 산책하기 좋은 길을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렇지만 비가 왔다. 그냥 비가 아니라 태.풍.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손님이었다. 반갑지 않지만 꼭 올 손님. 둘째날은 언니와 나랑 각자 가고 싶은 곳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만나기로 한 날.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어김없이 오셨다. 비님이. 우선 씻기로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언니가 가져온 유산균과 아사히베리를 챙겨 먹고, 숙소를 나섰다. 아침은 메구로역 근처의 저렴한 규동집에서 규동세트. <사랑이하고싶어사랑이하고싶어사랑이하고싶어>를 보고 규동 체인점에서 꼭 한번 규동을 먹고 싶었는데 소원 풀었다. 심야식당 보면서 늘 먹고 싶었던 돈지루도 시켜 같이 먹었다. 그것도 소원 풀었다. (밤에 인터넷 검색을 하던 언니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지만. ㅠ)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원래의 계획에서 약간 수정됐다. 산책 책에서 봤던 피천득의 그곳, 시로가네까지 걸어갈 수 있으니 그리로 가보기로 했다. 책에 소개된 이 길에는 자연교육원이 있고, 프라치나 가로수길이 있고, 하포엔이 있다. 우리는 자연교육원 담장 길을 걸어서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무척 좋아보였음.), 프라치나 가로수길로 가게 되었는데, 그 중간에 있던 길이 좋았다.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고, 집들이 있었다. 중간에 조그만 사원도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길의 느낌이 참 좋았는데, 역시나 아쉬웠다. 지금도 좋지만, 비가 오지 않았으면 정말 정말 좋은 길이었을텐데.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운동화와 양말은 흠뻑 젖었고, 입은 우비도 썩 편하지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우산을 써야 하니 쉽게 꺼낼 수가 없고, 비가 오지 않았으면 볼 수 있었을 선명한 그곳의 색들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따뜻했다. 몸은 비에 젖어 점점 차가워지는데,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와서 상점들이 대부분 전등을 켜놓았다. 그 주황색 빛 때문에 저녁길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 온 거 같지 않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하포엔은 사실 기대가 없었다. 도심 속 정원이라길래 얼마나 좋을까 했다. 그런데 산책 책에 나온 것처럼 들어가자마자 배꼽인사를 하는 관리인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곳이구나 싶었다. 아주 잘 꾸며진, 넓은 일본식 정원이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은 에도시대 초기 오쿠보 히코자에몬이 여생을 보낸 곳. 도쿄에서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로 꼽혀 결혼 예식이나 행사 장소로 인기를 끈다고 한다. 우리가 간 날이 일요일이었고, 그날도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지나가는 신랑과 신부도 봤고,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부와 신랑도 봤다. 반듯하고 정갈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을 비를 맞으며 걸었다. 조금 있으면 물들 단풍나무들이 있었고, 팔뚝만한 잉어들이 있었다. 하포엔은 무료 개방이라 우리처럼 결혼식이나 행사 참석이 아니라 관광하러 온 외국인들도 많았다. 모두들 팔뚝만한 잉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시로가네 길을 걸으면서는 그렇게까지 느껴지진 않았는데, 하포엔에 들어오니 여기가 얼마나 부자 동네인지 알겠더라. 하포엔에서도 생각했다. 흑. 좋은데, 비만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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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는 흐렸다. 여행 첫날이었다. 이른 아침에 인천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낮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도로 흐렸다. 그래서 걷기 좋았다. 비도 오지 않았고, 원래 흐린 날을 좋아하기도 하고. 넥스를 타고 고탄다에서 내려 1시간 넘게 기다려 스테이크를 먹고, 메구로의 숙소로 이동했는데 Y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감기가 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날의 원래 일정은 고탄다에서 함박스테이크 런치를 먹고 (우린 늦어서 런치를 못 먹었지 ㅠ), 메구로 숙소에 짐을 풀고, <최고의 이혼> 배경지 나카메구로를 걷고, 부유한 동네라는 다이칸야마를 구경하고, 에비스에서 저녁으로 유자라멘을 먹는 것. 아, 에비스 전에 일정이 있었다. 에비수 맥주박물관에서 갓 나온 신선한 에비수 생맥주를 마시는 것. 결국 언니는 다음날 일정을 위해 숙소에서 몸을 추스리기로 하고, 나 혼자 길을 나섰다. 언니에게서 에비스 가는 방향 설명을 들었다. 숙소 앞에서 길을 건넌 뒤 쭉 직진을 하다 우회전을 하면 된다고. 언니 말대로 쭉 직진을 하다 나타날 때쯤 됐는데 생각이 들었을 때 우회전을 하니 가든 플레이스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가이드북 지도를 보고 맥주박물관을 찾아가는데, 지도에 있는 건물들이 나오지 않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헤매다 어떻게 할까 용기내서 경비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나타났다. 맥주박물관!

 

    말이 박물관이지 그리 크지 않았다. 오래된 맥주병, 잔들을 훑어보고 바로 테이스팅 살롱으로 이동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곳에서 갓나온 신선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 했다. 지난 오사카 여행에서 남은 동전 400엔을 넣고 에비수 코인으로 바꿨다. 코인 하나에 생맥주 한 잔씩을 마실 수 있다. 스테이크를 먹고 얼마되지 않은 터라 안주 없이 맥주만 마시기로 했다. 에비수 프리미엄 맥주와 에비수 흑맥주를 반씩 섞은 프리미엄 믹스로 주문했다. 고레 히또쯔 구다사이. 맥주를 주문 받으면 그 맥주에 맞는 컵받침을 준다. 그걸 옆 맥주대에 보여주면 거기에 맞는 맥주를 따라서 짠-하고 올려준다. 따르는 걸 봤는데, 맥주거품이 넘치도록 따른 후에 자 같은 물건으로 거품을 맥주 잔에 딱맞게 잘라낸다. 그리고 컵 주위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고 건네준다. 한 잔을 들고 구석자리에 가서 앉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높았다. 거기서 맥주를 마시며 이 책을 읽었다.

 

    먹거리의 추억.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먹었는가?

    잊어버린 기억이 더 많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도 많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그날이 특별한 날이었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콜라를 처음으로 마신 날도, 흔하고 흔한 여름날의 오후였다. 

   친구가 살던 단층의 연립주택.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부엌. 그대로 선 채 콜라를 마셨던 환상적인 그날의 나. 옆에 있던 친구도, 친구의 어머니도 수다를 떨며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름날에 누군가가 함께 웃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쌓여 과거가 되는 것이기에 그 날, 아무것도 아닌 날에 웃고 있던 예전의 나를 추억하게 해 주는 콜라의 존재.

    과연 작았을까?

    오히려 최초의 한입은 미래의 자신에게 용기를 복돋아주는 커다란 한입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p. 214-215, 끝내면서.

   

    끝내면서, 부터 읽었는데, 이 부분을 읽고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벌써 취한건가, 생각하며 높은 테이블에서 내려와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환전한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자판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이번 코인으로는 퍼펙트 에비수를 주문했다.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두번째 맥주를 받을 때 조그맣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했더니 뭐라고 한마디를 더 해준다. 흑. 그렇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코인을 받는 총각이 잘 생겼었다! 두번째 맥주를 마실 때는 이어폰을 꺼내 김동률을 들었다. 그리고 구석 높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혼자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자도 있었고, 나랑 같은 가이드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도 있었다. 그 한국인 무리는 두 명이서 맥주 한 잔과 두 잔을 각각 마시고 떠났다. 책을 읽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내 앞에 또 있었는데, 그 사람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등이 좀 외로워보였는데, 쓸쓸해보이지는 않았다. 그 미묘하고 기묘한 차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렇게 두 잔을 마시고 가든 플레이스의 야경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시간 전만 해도 생소했던 길이었는데, 한 번 걸어봤다고 익숙해져 버린 그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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