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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골목 바이 골목 6 2017.05.07
  2.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2016.05.18

골목 바이 골목

from 서재를쌓다 2017. 5. 7. 22:57





   연휴 첫날, 앞으로의 3일을 알차게 보내보겠노라고 일찍 일어나 조조영화를 보러 갔더랬다. <나의 사랑, 그리스>였는데, 동생이 말한대로 영화는 제목만큼 밝지 않았고,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기까지한 우리의 IMF 생각이 났다. 동생은 그때 엄마가 휴지를 사주지 않아서 예전에 엄마 가게에서 쓰려고 만들어놓은 냅킨을 일일이 펴서 일을 봤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그 시절 혼자 서울에서 흥청망청 산 것만 같아 미안했다.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그리스는 어떨까,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영화를 보고 생각해봤다.


   영화를 보고 나와 걷는데, 너무 더웠다. 아직 겨우 5월인데, 벌써 한여름이 성큼 온 것만 같았다. 결국 걷다가 뭔가 시원한 걸 마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가게를 지나고, 늘 지나면서 궁금했던 맥주가게 앞에서 망설였다. 이제 오픈하시는 것 같은데. 용기를 내서 들어가서 안주 없이 맥주만 마시고 가고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인 아저씨가 그럼요, 라고 말했다. 나는 카스 생맥주를 한잔 시켰고, 이층에 올라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불광천을 걸을 때마다 언젠가 저 2층에 앉아 맥주를 마셔보리라 생각을 했던 장소였다. 그러니까 연휴 첫 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와 진정한 낮맥을 했다는 이야기. 맥주가 들어가니 알딸딸해지는데, 2층 열어놓은 창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 나는 카스 생맥이면 되는 사람인 것이다. 취기가 오르고 바람이 불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최고가 되는, 쉬운 사람인 것이다. 아, 좋았다. 한 잔 더 마시고, 읽던 책도 다 끝내고 나와서 집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남은 이틀은 미세먼지 핑계대고 집안에서 뒹굴대면서 티비를 보고 잠만 자댔다는 이야기. 아, 시간을 돌리고 싶다. 김종관 감독의 <골목 바이 골목>은 아쉬운 구석이 많은 산문집이었다. 물론 저때 맥주 마시면서 읽을 때는 최고였다.

*

   인파에 몸을 실을 때도 있지만 집으로 가기 위해 그 풍경을 벗어나냐 할 때가 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군중들을 역류하자면 나란히 걸을 때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단지 몸의 방향을 바꿨을 뿐임에도 순간 나는 외지인이 된다. 거주지에 있지만 관광객이 된 듯한 시선으로 행진에 압도된 채 군중을 가로지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다가온다. 표정들이 다가온다. 끊임없이 스쳐가고 나는 너무 많은 얼굴을 본다. 내가 아는 얼굴, 혹은 나를 아는 얼굴이 다가올 수도 있다. 나는 갑자기 그 많은 얼굴들을 볼 자신이 없어진다. 큰길의 차도를 걷다가 가장자리로 간다. 좁게 이어진 골목들을 타고 집으로 갈 요량으로 대로를 벗어나 보지만 골목 입구에는 의경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 조용한 골목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의경들에게 내가 이곳의 거주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함성 가득한 그곳에 서서 의경들로 메워진 골목의 입구를 지나기 위해 지갑 속 신분증을 꺼냈다.
- p. 60

   얼마 후 사진을 현상해보니 사진 안에는 밀랍 신사의 표정도 그가 보던 사진도 없었다. 찍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담지 못한 실패한 사진이었다. 하지만 더러 실패한 사진도 이야기를 한다. 그들과 나 사이의 먼 거리를, 액자 너머의 세상을 보는 그들보다 더 먼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같은 장소에 있음에도 경계면 너머에 이를 수 없었던 그곳에 대한 기억을.
- p. 89-94
 
   (...) 우리는 별말 없이 걸었고 때로는 많은 말을 하기도 했다. 흑해 너머에는 터키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길을 말수 없는 그 소년과 걷다 보니 문득 끝없는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그럭저럭 잘 견뎌낸 한 사람의 표정이 보였다. 좋은 계절에 있지만 머물지 않는 사람들의 산책 속에서, 머물고 있지만 가장 먼 곳까지도 갈 수 있는 그의 외로움이 멋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 p. 133-136

   내가 섬에 머물렀던 날에는 해질 무렵부터 많지 않은 비가 내렸다. 관광객들을 위한 거리는 텅 비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몇 개의 선술집에만 등이 달려 있고 마을 사람들과 료칸에 하루 묵어가는 손님들만 남는다. 취한 연인들이 술집에서 나와 숙소를 찾는다. 하루를 머물고 하루라는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다지 갈 데 없는 거리를 반복해서 걷는다. 누군가는 고급 료칸을, 누군가는 주머니 가벼운 여행객을 위한 작은 료칸을 찾는다. 맥주 한 잔에 적당한 산책을 하고 주머니 가벼운 나를 위한 료칸에 들어가 내가 머무는 섬과 그 너머의 바다와 그 너머의 도시를 보았다. 바람결에 어디선가 대나무 풍경이 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길 끝에서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번지고 사그라졌다. 여행객을 가워 놓은 섬은 비밀스럽다. 밤이 지나고 나는 작은 소란이 들리는 방 안에 누워 가로등 불빛이 스며든 천장을 보았다. 세 시간의 거리, 하지만 제법 먼 곳에 숨어들어 여행의 첫날을 맞이했다. 작은 섬, 작은 방에, 완전히 갇힌 채로.
- p.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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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에서 이 책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옥 숙소에서 불을 끄고 혼자 누워 있다가. 홍대에 있는 카페꼼마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 앞에서는 흠집이 있어 정상 판매를 하지 못하는 책들을 싸게 판매하고 있었다. 그 책들을 둘러보다 발견했다. 김종관 감독의 책. 그렇게 산 책이었다. 한동안 책장에 고이 꽂혀 있었는데, <최악의 여자>를 보고 이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어서 죽도록 쓸쓸한 서른 두 편의 이야기'. 서른 두 편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에 대한 김종관 감독의 산문이 있다. 그러니까 예순 네 편 모두 김종관 감독이 쓴 거다. 서른 두 편은 모두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섹스에 관한. 끈적끈적한 섹스가 아니다. 촉촉한 섹스이다. 읽는 중에 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이 촉촉한 섹스책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꽤나 감성적인 섹스다.



   "하나의 천장 아래서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침대도 있었다. 좋은 침대가 아니었고 매트리스도 바꾼 적이 없다. 매트리스를 가끔 뒤집어주기는 했다. 내가 누우면 빈자리가 남지 않는 작은 침대였다. 물론 나 혼자만 누워 지내지는 않았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낡은 침대는 사연이 많아졌다. 나는 그 사연들을 일일이 신경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천장만 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는 지치지 않았지만 나는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심기일전했다. 침대가 바뀌었고 천장이 바뀌었다. 전보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약간 더 큰 침대를 보며 살고 있다. 자주 시트를 갈고 있다. 아직 매트리스를 뒤집은 적은 없다. 창에는 아직 커튼이 없어서 아침이면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들이 침대를 돌아다니다가 눈을 찡그리게 한다. 그 시간이면 나는 이불 안으로 숨어들거나 잠에서 깬다.
   요즘은 일어나도 한동안 침대에 있고는 한다. 침대에 기대어 창문 너머 풍경 보는 것을 즐긴다.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작업을 할 때도 있다. 가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사이 커피를 쏟아서 얼룩이 생기기도 했지만 괜찮다. 침대에 기대어 창문 너머 바람에 숨을 쉬는 나무 이파리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그리운 침대에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 p. 56-57


   사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흠모해 왔다.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본 순간부터. 그 뒤로 실제 그를 보기 위해 낙원의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그의 단편과 중편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던 때였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가서 가만가만 그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그때의 느낌은 영화를 좋아하는, 어린시절이 그렇게 풍요롭지 않았던 사람. 단편영화에 많은 애정이 있는 사람. 그 뒤,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는 한 편의 장편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최악의 여자>가 두 번째 장편 영화. 전주에서 본 영화가 좋아서, 그를 흠모하기 시작했던 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그를 좀더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왠지 그를 좀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험의 기회가 생겼을 때, 그 모험에 가담하거나 옆길로 스쳐간다. 때로는 스쳐간 모험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녀와 그 좋은 분위기에서 왜 자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면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고 진도를 나가보자면, 섹스는 재밌었던 것으로, 관계는 결국 안 되는 쪽으로."
- p. 153


  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어떤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알 거 같았는데, 어떤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도통 모르겠다. 이게 그의 이야기일까, 이 사람이 그일까, 이 감정은 그가 느낀 감정일까. 내내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 그래,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은 흐르고 무수한 선택으로 우리는 현재를 만났다. 변한 것과 그대로인 것,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이 남았다. 어둠 속에 가둔 가능성들 속에서 다른 운명으로 흘러간 나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가끔 그곳에서 온다. 벽 너머 어둠 속에 잊혀진 기억 몇 개와 선택하지 않은 길들에 상상을 덧대어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나와 다르게 움직이는 거울 속의 나를 보게 되지만 그 환영들이 빛이 닿는 곳에 머물 수는 없다."
- p. 187


   <최악의 여자> GV에서 들은 것과 감독이 직접 쓴 제작기에 의하면, 김종관 감독은 많이 걷는다고 한다. 걷다가 커피집에 들어가 마시고, 또 걷다가 지치면 어딘가에 들어가 마시고. 그가 하는 운동의 전부이자 유일한 것이 걷기라고 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이와세 료에게 빠져 그를 캐스팅했고 (그 전에 영화에 관심을 보였던 일본배우는 누굴까), 이와세 료는 감독님이 마시는 걸 좋아해서 함께 엄청나게 마셨다고 했다. (술과 커피, 차를 말하는 듯. 이와세 료는 술을 잘 못 마시다고.) 김종관 감독은 이와세 료라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핑계로 계속 불러냈다고 했다. 정말로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말들을 듣고 시작한 책인 지라, 책을 읽으면서 뭔가 풀리지 않을 때 계속 어딘가를 걸었을 감독을 상상했다. 서울의 이곳저곳, 골목과 골목 사이를 촉촉하게 걸어다녔을 모습을.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눈하트를 날리며 무언가를 마셔대는 모습을.


    "잊고 사는 데 무리가 있다면 잘 살아야 한다."
- p. 144


   뒤의 이야기보다 앞의 이야기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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